87년 6월민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꼽지만 실상 전두환 정권의 몰락 징후는 이미 그 전해인 86년부터 속속 불거져 나왔다. 다시 말해 민중의 생존권 보장 요구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폭발 일보 직전으로 치닫는데 반해 독재권력은 오로지 폭력적이고 야비한 방법으로 이를 억눌러왔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으로 부천경찰서에서는 아예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추악하고 더러운 만행이 저질러져 당시 사회를 경악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공권력에 의한 여성 유린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은 위장 취업한 혐의로 연행된 여대생을 심문하면서 엉뚱하게도 ‘5?3 인천 시위’ 관련 수배자의 행방을 추궁했다. 모른다고 하자, 뒷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그 여대생의 옷을 벗겨 차마 글로 적지 못할 폭언과 폭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지금은 여성학 박사로 더 알려진 권인숙(41) 씨는 당시 경찰에 의한 성고문 피해자이면서도 공권력의 추악함을 적극적으로 폭로한 투사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불길을 지피는 역할을 하게 된다.
85년 봄, 서울대 의류학과 학생이던 권씨는 부천에 있는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인 (주)성신에 ‘허명숙’이란 이름으로 취업해 노동자들의 투쟁에 동참하다가, 이듬해 6월 4일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혐의로 부천서 형사들에게 연행됐다. 문귀동은 부천경찰서 서장의 지시로 6일 새벽, 7일 아침과 밤 등 세 차례에 걸쳐 권씨에게 성폭행에 해당되는 고문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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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인 공포와 경악과 굴욕감으로 거의 실신 상태에 빠진 권씨는 유치장에 입감된다.
권씨는 검찰에 송치되기까지 열흘 동안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또한 수치심 때문에 몇 차례나 자살을 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곤 했으나, 그와 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는 각오로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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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을 떨치고 일어서다 인천 학익동 소년교도소로 옮겨온 후, 권씨의 피해 상황이 재소자들에게 알려지면서 양심수 약 70여 명이 ‘문귀동 구속, 서장과 내무장관 사임, 군부독재 퇴진’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권인숙 씨 역시 28일부터 단식투쟁을 시작해 사건은 비로소 외부의 관심을 끌게 된다.
권씨를 비롯해 감옥 안의 여성들이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감옥 바깥에서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울분에 차서 가열차게 폭로 투쟁을 벌여나갔던 일군의 여성들이 있었으니 바로 <성고문대책위원회> 회원들이었다.
86년 ‘3·8세계여성의 날’을 기해서 노조운동에 연루되어 해고된 여성노동자들과 ‘여성평우회’, ‘여성의 전화’ 같은 여성단체가 모여서 만든 것이 <생존권대책위원회>였고 이 모임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도맡으면서 이름이 <성고문대책위원회>로 바뀌게 된다. 당시 대책위에서 실무를 전담했던 이영순(57) 씨는 이미 70년대 초부터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차별받는 여성노동에 대해 고민해왔던 터라 부천서 사건에 대한 분노는 남달랐다.
“<생존권대책위원회>가 여성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맡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인천교도소에 두 번 갔는데 (권씨의) 부모가 절대적으로 반대했어요. 아예 얼굴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5?3 인천항쟁 사건 가족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의 뜻을 전달한 거죠. ‘은폐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나서야 한다, 그래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여성단체에서 관심을 가지고 왔다.’라고요. 두 번째 갔더니 본인이 결심했대요. 그때 변호사 접견을 요청했지요.” 면회를 마치고 나온 이씨는 곧 이돈명, 이상수 변호사를 만나 피해자의 의사를 전달했고 이들 변호사들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매우 신속하게 대처해 나갔다. 당시 인천교도소에서 권씨를 처음 접견한 이상수 변호사는 그날의 소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5?3시위 사태를 수사하면서 여자 구속자에게 성적 고문이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 떠돌았고 구속자들로부터 실제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나 구속자들이 수치심 때문에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꺼리고 증거도 확보할 수 없어 유야무야되고 만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권양의 경우는 처음부터 달랐다. 직접 만나서 듣게 된 내용은 엄청났지만 꼭 정확한 사실을 외부에 알려 다시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권양의 확고한 자세가 나를 놀라게 했다.’(이상수 변호사 수기 중에서, 1986. 7. 3)
성고문대책위의 활동과 탄압 성고문대책위원회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사건의 진상과 정권의 실체를 밝힌 홍보 전단을 만들어 문귀동이 사는 아파트 등 부천 시내에 뿌리는가 하면, 부천경찰서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관계자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항의에 부천서는 가증스럽게도 ‘피해자의 일방적 의견이다, 권양은 문제학생이고 사생활이 문란하다.’고 응대했다. 게다가 정권은 성고문대책위의 핵심 활동가 중 한 명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하는 등 겁을 주어 이 ‘골치 아픈’ 여성들의 폭로투쟁을 종식시키려 들었다.
그럴수록 이 맹렬 여성들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 연대를 호소하며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했고 집회와 기도회를 통해 이 사건을 더욱더 폭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성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남성 종교인과의 미묘한 갈등도 있었다. “사건 자체가 (여성으로서) 너무나 처절한 내용이었잖아요? 본인이 결심하고 얘기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진보진영의 어느 신부님조차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왜 바보처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가만히 당했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상황에 닥친 여성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라고 지적해 준 적이 있어요.”
이영순 씨는 어쨌든 종교계와 진보진영에서 자기 문제로 안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점은 큰 성과였다고 평한다. “개인적으로 미행당하고 연금이 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으나 당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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