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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 광화문 네거리로 나서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101인 선언

 


1974년은 대한민국의 헌정 사상 가장 엄혹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1월 8일, 새해 벽두를 대통령 긴급조치 1호로 불안스럽게 시작한 그해에는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문인간첩단 사건 등 굵직한 정치공작과 각종 시국사건들로 점철됐다. 특히 양심적 문학인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바로 11월 18일 ‘문학인 101인 선언’을 통해 민족, 민중, 민주를 지향하는 문예운동조직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탄생한 것이다.

왜 시대는 ‘자실’이라는 투쟁적인 문인 조직체를 필요로 했을까? 그 대척 지점에 박정희라는 독재자가 있었다. 72년 12월, 그는 대통령의 초법적인 절대권력과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했고 이에 73년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헌법개정청원운동으로 맞섰다. 그러자 독재정권은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등의 정치공작을 통해 대대적인 검거를 함으로써 저항의 싹을 자르려 들었다.

갇혀있는 자유, 김지하
이런 엄혹한 시절에 문학인들도 가만 있을 수 없다며 74년 1월 7일, 문학인 61명이 명동의 한 다방에서 73년 12월에 있었던 헌법개정청원운동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였다. 중앙정보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월 14일 ‘문인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발표했는데, 일본에서 발행되던 공산주의 계열의 문예지에 글이 실렸다는 이유로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등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잡아 가둔 것이다. 한편 70년대 반독재투쟁의 상징이 된 시인 김지하는 74년 7월에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내란선동죄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시인은 당시 참혹한 감옥 생활을 이렇게 노래했다.

철창에 걸린 피묻은/ 낡은 속옷이/ 숱한 밤 지하실의/ 몸부림치던 하얀 넋/ 찢어진 육신의 모든 외침이/ 고개를 저어/ 아아 고개를 저어/ 저 잔잔한 침묵이 나를 부른다/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어둠 속에서/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저 시뻘건 시뻘건 육신의 어둠 속에서/ 부릅뜬 저 두 눈이

자실의 창립회원인 박태순 선생(소설가, 64)은 “김지하의 이러한 고통과 절망이 ‘원료’가 되어 ‘자실’이 견인될 수 있었다. 감옥 안의 김지하가 감옥 밖의 문인들로 하여금 ‘자실’을 결성하지 않으면 도무지 못 견딜 상황으로 인도하게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70년 문인들의 거리, 청진동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 선 문학인 단체, ‘자실’의 출범은 분명 시대적인 필연이었으되 그 구체적인 과정은 짐짓 즉흥적이고 돌발적으로 보였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엄청난 사건은 청진동 빈대떡 골목에서 잉태됐다. 70년대 당시 야트막한 조선 기와집의 빈대떡 주점들이 붙어있던 이 광화문 뒷골목에는 이외에도 이문구가 편집장으로 일하는 ‘한국문학’과 시인 고은이 상근하다시피 했던 ‘민음사’등 각종 잡지와 출판사의 사무실이 있어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만남의 광장’ 기능을 하기에 충분했다. 

 

 

시대에 대한 슬픔과 울분으로, 제대로 된 문학인 구실을 못한다는 죄책감으로 문인들은 이곳에 모여 술만 마신 게 아니라 시국에 관한 논의에 열을 올리곤 했다.

74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문학인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을 무렵인 10월 24일에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하며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당국의 언론탄압에 맞섰다. 곧 전국의 31개 신문, 방송 기자들이 일제히 자유언론수호운동에 뛰어들어 반독재투쟁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탄생
74년 11월 15일 저녁, 청진동에 있는 귀향다방으로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고은, 신경림, 백낙청, 염무웅, 조태일, 이문구, 박태순, 황석영 등이었고 모임은 처음부터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선언문 발표를 확정하고 그것을 표출시키는 형식과 방법에 관해 논의하는 단계에서 “데모를 벌여서 이를 발표하자.”는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장소가 광화문 네거리 종각 앞으로 정해진 이유에 대해서 박태순 선생은 ‘자실 70년대 문학운동사’(실천문학, 1984)란 글에 이렇게 썼다. 

 

 

“유신체제 하에서 신음하는 민족현실에 문학인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알린다면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고…… 광화문 종각 앞을 시위 장소로 천거한 것은 이문구였는데 <유신만이 살 길이다> 따위의 선전탑만 내걸린 이곳을 시민의 광장으로 탈환해야 한다는 것과 종각 앞 의사회관 건물에는 ‘예총’과 ‘문인협회’ 사무실이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3일 뒤인 18일을 시위 날짜로 정하자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간만에 비굴한 침묵을 깨고 압제에 떳떳하게 맞설 결의로 뭉친 문인들은 신속하게 

역할 분담을 해서 이틀만에 무려 101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따라서 염무웅이 작성한 선언문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문학인 101인 선언’이 됐다. 하지만 선언문의 주체인 단체 명의가 아직 딱히 없었다. 이들은 한국문단과 사회에 새로운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학단체의 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 고심 끝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고 확정했다. 

고은은 “<자유>라는 명제에 문학표현의 자유를 담아내면서 민주 염원을 포괄하고 <실천>은 우리 문학이 문학실천운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며 흡족해 했다. 대표간사로 고은이 상임간사로 신경림,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조해일이 임명됐다. 모임을 마친 뒤 고은과 박태순은 동대문시장에서 플래카드를 만들 때 필요한 원단과 자재를 구입해 화곡동 고은의 집에서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인 석방하라 -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고 쓴 플래카드 두 벌을 제작했다. 

문인들, 광화문 네거리에 나서다
마침내 11월 18일 오전 10시 무렵에 고은, 이호철, 염무웅, 황석영, 양성우, 백낙청, 조태일, 최민, 한남철, 조해일, 조선작, 송영, 이시영, 송기원, 윤흥길, 석지현, 임정남, 김국태, 김연균, 백도기, 이문구, 박태순 등 30여 명이 광화문 네거리에 나와 선언문을 낭독했다.

사전에 아무런 낌새도 풍기지 않은 갑작스런 거리 시위에 놀란 종로경찰서는 황급히 주모자 급 7명을 연행한 후 시위를 해산시켰고 이에 한남철, 황석영 등은 ‘문인협회’ 사무실을 점거해 ‘연행 문인 석방하라’며 농성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윤흥길, 황석영, 임정남 등은 사복경찰과 ‘레슬링’을 벌였고 문학신인 송기원, 이시영은 두 개의 플래카드를 빼앗으려는 경찰과 끝까지 몸싸움을 벌이며 반정부 구호를 외쳐 경찰을 질리게 만들었다. 광주에서 상경한 시인 양성우가 전날에 먹지를 대고 여러 벌 손으로 직접 복사해서 뿌렸다는 선언문에는 당시 문학인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가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되어 있으며 왜곡된 근대화 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권력과 금력에서 소외된 대다수 민중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정치가의 독단적인 결정에 맡겨질 일이 아니라 전국민적인 지혜와 용기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믿고, 이에 우리 뜻있는 문학인 일동은 우리의 순수한 문학적 양심과 떳떳한 인간적 이성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의, 선언하는 바이며 이러한 우리의 주장이 실현되는 것만이 국민총화와 민족안보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문학인 101인 선언문’ 전문)

신문들은 고은이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자실’의 시국선언을 크게 보도하면서 1)김지하를 비롯 긴급조치 구속 인사 석방 2)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3)서민대중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획 기적인 조치 및 현행 노동관계법 개정 4)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의 마련 5)우리의 주장은 문학자적 순수성의 발로이며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계속될 진실한 외침이라는 5개항의 결의문도 그대로 인용해 보도했다.
언론자유실천운동을 진행 중이던 일선 기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해 행동하는 문인들을 동반자로 인식해 시위 사건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실’은 범상치 않은 출발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당국에 협력하는 ‘문인협회’와 이에 저항적 자세를 보이는 ‘자실’이라는 두 단체가 오래 전부터 문학사회에 양립해 온 것처럼 인식하게 됐다.  

독자적인 문예운동조직으로 성장
11·18 선언에 함께했던 이들은 ‘자실’의 실체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 분명한 전망이 없는 상태였으나 주변의 기대와 격려 속에서 열심히 지속시키자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했다.

곧 이어진 간사회의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반체제적인 문학단체의 성격과 내부적으로는 문학운동의 이념성과 실천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큰 방향을 정하고 회원 모집을 시작했으니 한국 최초로 문인들의 독자적인 ‘문예운동조직’이 기틀을 마련하게 된 셈이다.
‘자실’은 70년대 내내 김지하, 양성우 등 구속문인 석방 투쟁과 YH사건 등 시국 현안에 대한 성명을 통해 실천적인 문학운동의 중심 축으로 나섰다.
 

 

80년 5·18민중항쟁 직후 주도적인 문인들의 구속과 필화 사건 등으로 모임이 중단되기도 하지만 84년 12월 19일, 흥사단에서 ‘84 문학인대회 및 민족문학의 밤’을 기점으로 ‘자실’은 당당히 재건되었다.

“84년은 신군부의 강압적인 통치 상황이라 문단의 어른들은 주저했지만 채광석, 김정환, 이영진 등 젊은 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요. 83년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뜨잖아요? 채광석이 김근태 씨와 절친했는데 문인들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자실’을 재출범시킨 거죠. 80년대는 각 지역에서 동인지 운동도 열심히 하고 민주화, 광주, 민중의 생활상 문제로 시낭송도 많이 했어요.”
5·18민중항쟁을 직접 겪었던 이승철 시인(48)은 자실의 재탄생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롭게 시작된 ‘자실’은 이제 공덕동에 버젓이 사무실까지 마련했다. 시인 홍일선이 개인적으로 쓰는 것처럼 꾸며서 사무실을 얻었고 집기를 들여놓고 나서야 ‘자실’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조광다방 건물 2층이었는데 옆방에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함께 입주했다. 내부에 문이 달려있어 자연스럽게 서로 오가며 활발하게 교류하고 사안에 따라 연대활동을 했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던 마포경찰서가 보기에 이 두 단체는 항상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무슨 성명서를 낸다 하면 경찰이 먼저 다 알고 있어. 그 당시는 도청도 심했으니까, 전화감이 굉장히 안 좋더라구. 정보과에서는 성명서를 입수해서 치안본부에 보내야 하는데 젊은 문인들은 경찰이라고 하면 재떨이를 던지고 난리를 치니까 아예 들어오질 못했어요.”
이승철 시인은 마포서와의 인연을 회상하며 살짝 웃음을 짓는다.

자실의 비판적 계승, 민족문학작가회의
87년 6월항쟁이 일어난 뒤 ‘자실’은 독재타도 뿐만 아니라 내실 있는 문예운동을 하자는 내부의 요구에 따라 민족문학작가회의(민작)로 확대·개편되게 된다. ‘민작’은 ‘자실’의 투쟁적 전통을 계승해 각종 필화사건과 김남주 등 문인 구속에 저항하는 한편 분단시대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남북작가대회, 북한동포 지원 운동, 베트남 등 아시아 작가와의 협력, 반전평화운동 등 세계 민중의 ‘자유’를 위해 여전히 ‘실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문학이 개인 사상의 표현이고 상상력에 기반한 창작활동일지라도 그 개인이 시공간적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작품이 타인들에게 소통되는 구조를 본다면 문학은 마땅히 사회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빼어난 예술적 성과와 상업적인 성공 이전에 중요하게 평가되는 문학의 자질이 사회적 책임이고 인간에 대한 바른 성찰일 것이다.

출판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엄청난 물량의 문학작품이 생산되는 요즈음, 내가 디딘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진정한 주인으로 살게끔 안내하는 작품은 과연 얼마나 될까? ‘자실’이 생긴 지 31년, 지금 우리 주변의 문학에 대해 작가와 독자 모두 한번쯤 고민해 볼 일이다.  


글 최영환
1974년 서울 출생
2004년 청계천 르뽀집 『마지막공간』 공저(삶이보이는창), 경기도 시흥
작은자리이주노동자센터에서 활동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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