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부산지부의 반 아펙(APEC) 교육과 교원평가제 거부 투쟁은 야당과 수구언론의 색깔론 공세로 인해 지난 11월의 쟁점이 돼버렸다. 현재 조합원 수 10만 명의 전교조는 언론이 부추킨 부정적인 여론과 내부 강온파 대립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제도교육을 받은 한국 사람치고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보지 않은 이는 거의 드물 것이다. 입시경쟁에서 승승장구해 사회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극소수 중에서도 시험과 강제적인 규율로 점철된 학창시절을 유쾌하게 회상하는 이는 얼마되지 않을 것 같다.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행학습의 압박을 받고 중·고등학교에 가서는 성적의 노예가 돼버린다. 제3자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2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고 신자유주의적 경향은 더욱 노골적으로 교육과 인간관계마저 상품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복잡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지난 일을 돌아보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작은 지혜라도 건져 보자는 심정으로 충남 교육운동의 현장을 찾았다.
진정한 교사로 살고 싶은 권리 전교조 창립 이전인 1986년 6월 14일, 충청남도 천안 오룡동 성당에는 오후부터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90여명이 되는 군중이 모였고 하나같이 눈빛이 결연하고 비장했다. 그들은 바로 충남지역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었고 이 날의 모임에서 ‘충남지역 교육민주화 선언’이 발표됐다.
이미 교수들의 시국 선언 발표가 있었고 과열입시경쟁의 조장으로 중·고생들의 자살이 연이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는 『이웃끼리』 문집 사건으로 세 명의 교사와 홍성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회원 여섯 명이 좌천됐으며 문제 교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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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교권의 실질적 보장, 교육행정의 관료성과 비민주성 철회, 교원의 자주적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보장, 비교육적 잡무 제거 및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폐지를 천명했던 선언문에 그 자리에 있던 64명의 교사가 서명을 했다.
6·14선언은 그때만 해도 공개적인 교사단체 하나 없이 뜻있는 교사 활동가들 개인이나 소모임 형태로 진행해왔던 교육 운동이 이후 대중 지향적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본적인 상식 수준의 요구 사항을 비밀리에 모여서 거창한 선언 형태로 발표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이는 당시 정권의 탄압과 교사들의 자각 정도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학교 분위기가 폭압적이고 경직되어 있었어요. 교육 운동하는 선생님들에 대해서 일일보고식으로 교장한테 상황보고가 올라갔고, 동료교사들과 차단시켰죠. 교육 내용면에서 보자면 국어, 도덕, 역사 교과서는 거의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권 홍보의 수단이었구요. 교장이나 교육 관료의 말에 복종하고 사사건건 지시받는 구조였어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매도당하는 분위기였죠.”
교육민주화선언 발표 당시 중심적으로 일을 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이인호 교사(49, 현 천안중앙고)의 말이다. 그는 『이웃끼리』 문집이 문제가 되어 강제로 좌천된 경험이 있다.
공주사대 국어과 77학번 동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교육현장에서 가르치던 아이들의 글을 모으고 농촌지역 학생들의 모임을 진행했다. 그 아이들의 글과 생각을 모아 만든 문집이 『이웃끼리』 문집인데 당시 인쇄를 맡은 인쇄소 주인의 신고로 전량 압수되고 교사들이 연행된 일이 『이웃끼리』 문집 사건이다.
| “지금은 웃으면서 하는 얘기인데, 제가 당시 중학생 담임을 하고 있었어요. 그 때 한 아이가 써 온 글을 학급문집에 실었는데 그 내용 중 코뚜레에 소의 피가 묻어 안쓰러워 닦아주었다는 일상적인 대목이 있는데요. 그 글을 학교에서 이상하게 분석해서 코뚜레의 의미가 뭐냐, 피는 뭘 뜻하냐, 소는 뭐냐 이렇게 추궁당한 적이 있어요. 제 결혼식(부인이 박경이 교사)때도 청첩장에 조재도 교사의 시가 실린 것 때문에 집회로 의심받을 정도였어요.”
글쓰기 모임과 홍성YMCA 중등교육자회 대학에서 80년 5월을 겪었던 이들 젊은 교사들은 경직되고 척박한 교육 환경에서도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크게 이인호, 조재도, 황금선 교사 등의 ‘글쓰기모임’과 민병성, 박경이, 이순덕 교사 등의 ‘홍성YMCA 중등교육자협의회’(홍성 Y교사회) 활동으로 나타났다.
민병성 교사(47, 현 홍동중)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교사들끼리 운동하기에 사회적 여건이 안 되니까 Y회원으로 들어가 소모임 형태로 시작했어요. 첫모임은 풀무학교 기숙사에서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서울 Y교사회 회장이던 이수호 선생님도 내려와 격려해 주었죠.” 홍성 Y교사회는 1984년 11월 24일에 창립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참다운 인간화 교육을 모색하고 교육현장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한 실천적인 모임이었다. 여섯 명의 교사가 준비 모임을 통해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민병성 교사는 현재 신협으로 바뀌어 리모델링한 건물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 곳(홍성Y)에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홍성신문도 처음 여기서 만들었고, 농민회도 여기서 모임을 했어요. 충남 서부 민주화운동의 센터 역할을 한거죠. 우리가 이 곳에서 회의할 때면 옆 소방서 건물에서 경찰들이 사진을 찍어가기도 하고 장학사들이 방해해서 못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이들은 주로 교육 강연회 개최, 교사를 위한 레크레이션 강습, 학생중심 수업모형 연구 등의 활동을 하고 독서와 토론을 꾸준하게 했다. 합법적인 활동이었음에도 학교장은 수시로 회원교사들에게 홍성 Y교사회에서 탈퇴할 것을 종용했고 교무실 내에서의 언동, 우편물, 전화내용을 기록하고 감시했다.
그러던 중 충남지역의 교육운동 열기에 불씨를 지피는 일이 터지는데 바로 『민중교육』지 사건이 그것이다. 1985년 여름, 문인 교사들에 의해 발간된 무크지 『민중교육』이 현행 교과서를 비판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주장했다며 정권은 용공 혐의를 씌워 김진경 교사 등 세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20여 명을 해직했다. 이 때 충남에서도 여섯 명의 교사가 강제로 교단을 떠나야 했다. 이에 참여한 문인그룹이 서울의 ‘오월시’ 동인과 충남의 ‘삶의 문학’ 동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민중교육』지 사건은 교육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환기시켰고 오히려 정권에 대한 반발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해직 교사를 위한 전국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져 당시 1천만 원의 기금이 모이기까지 했다.
한편 조재도, 전인순 등 해직 교사들은 위축되기는커녕 더욱 열성적이고 헌신적으로 움직여 6·14선언을 조직하고 9월, 충청민주교육실천협의회(충청민교협)를 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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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독서하는 체육교사 여기에 또 한번 운동의 열기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 사건이 있으니 바로 한 사람의 치열한 투쟁과 죽음이다. 그의 이름 이순덕. 평범한 여성 체육교사였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동료 교사 박경이 를 만나 홍성Y 활동을 하기 전까지는 평범했다. 1956년 예산에서 태어나 1979년 한양대 체육과를 졸업하고 태안중, 서산여중을 거쳐 1982년 예산여고에 부임하기까지 그는 멋 내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여교사였다. 고향 동생들 같은 학생들과 친해질수록 막연하게 교육 현실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품었으나 별다른 대안이 없어 답답했다. 그런 고민이 깊어질 무렵 그에게 흥미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1984년 새로 부임해온 박경이라는 국어 교사는 학급 운영이나 학생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한번은 박경이가 반 아이들과 만든 학급신문에 학교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실리자 직원조회 시간에 교감이 신문을 집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일이 있었다. 그때 박경이는 너무도 태연하고 당당하게 항변했고 그 모습은 이순덕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순덕은 박경이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으나 박경이는 진한 화장에 화려한 옷을 입은 그녀의 관심과 호의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박경이는 소설과 수상록을 즐겨 읽고 동료 교사들에게 책을 빌려주곤 했는데 이순덕은 자청해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 체육 교사가 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 속으로 비웃던 박경이도 이 사람이 이틀 만에 다 읽고 찾아와 독후감을 얘기하고 끊임없이 질문하자 다르게 생각되었다. 이순덕은 『객지』,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노동의 새벽』, 『교사와 권리』, 『페다고지』 등을 빌려 읽으며 사회와 역사에 대해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박경이 교사의 표현에 따르면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듯,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그는 탐독했고 토론했다. 둘은 급격히 친해졌고 우정에서 점차 동지애로 발전했다.
이순덕은 훗날 동료들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학생들에게 잘못 가르친 지난 5년 동안 큰 죄를 진 것 같았고 한없이 부끄러웠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특히 선생에게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달았다. 그 뒤 YMCA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선생님을 만나 배우면서 이런 생각은 더 깊어졌다.”고 한 그는 자신이 체육을 하느라 기초 지식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하면서 하루 다섯 시간 이상을 자지 않고 독서를 했다. 또한 그는 옳다고 토론한 것은 가능한 한 실천하고, 현실에 적용시키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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