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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은 세련된 아파트 단지와 번듯한 상가들이 즐비한 목동의 거리에는 지나는 행인들마저 왠지 귀티가 흐르는 것 같다.
가을이 깊어가는 안양천의 깔끔하게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를 하며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들 중 20여 년 전 그 곳에 있던 뚝방촌과 생존권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 그 악다구니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정부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 1983년 4월 12일, 서울시는 강서구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140만평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한다. 당초 이 계획은 개발지역의 땅을 서울시가 전량 사들이는 ‘토지공영개발’ 방식을 처음 시도하여 인구 10여 만 명의 수용이 가능한 주거지를 만든다고 해서 국민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목동 주민들 또한 ‘서민들을 위해서 적은 규모의 주택을 많이 세워 임대해준다.’는 기사 내용에 너나 할 것 없이 반갑고 감사한 마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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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목동에는 가구주 2,500세대, 세입자 5,200세대로 약 32,000여 명의 인구가 살았고 김포가도와 경인 고속도로 중간에 위치한 이 지역에는 안양천변을 옆에 끼고 길게 뚝방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64년부터 여의도, 영등포, 회현 등 서울시내 각 지역의 무허가 주택 지역에 살다가 집이 철거되면서 쓰레기차에 실려 서울시가 허가해 준 이 곳에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것이다. 주민들은 수도 시설이 없어 30가구에 하나 꼴로 있는 펌프로 흙탕물을 끌어올려 걸러서 밥을 지어 먹었다. 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등불과 석유불을 쓰면서도 벽돌 한 장씩 사서 올리는 낙으로 움막집에서의 고단한 하루 하루를 견뎠다.
그런데 서울시는 얼마 후 10~15평 서민형 주택 대신 20~58평형의 아파트를 짓겠다고 계획을 번복하면서 ‘당신들이 사는 목동 지역은 무허가 건물이다. 지금까지 살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특별히 생각해서 가옥 당 이주비 50만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주겠다. 대신 입주권이나 이주비는 철거가 확인된 후에 주겠다.’는 발표를 했다.
우리가 원한 건 서민형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기가 막혔다. 애초에 서울시가 철거민 정착지로 정해서 대지를 가구당 8평씩 분할해 주었던 곳이기에 ‘무허가’라 볼 수 없었고 주민들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집을 지어왔던 피눈물 나는 역사가 깃든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년 동안 각종 공과금은 물론 취득세, 재산세, 건물 분 토지사용료 납부 등 국민으로서 의무는 다 하면서 이곳을 정착지로 알고 살았던 이들에겐 당국의 발표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엄포였다.
당시 1차 아파트 분양 가격을 보면 제일 작게 지어진 20평이 2,100만원으로 가난한 주민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금액이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 서민형 임대 아파트를 지어달라고 했어요. 우리는 이대로 떠날 수 없었어요. 거기가 우리의 생존 터전이었거든요. 전부 다 ‘하꼬방’ 식으로 뚝방촌인 거지. 우리가 보증금 20만원에 3만원 내고 살았어요. 가옥주들은 그 작은 집을 몇 개로 쪼개서 세를 놓고 세입자들은 작은 방에 식구가 여섯, 일곱 명씩 살았어요. 찢어지게 가난했던 거지. 대부분 막노동, 공장 일을 했고 종이를 줍거나 비닐하우스에서 일해주거나 하면서 근근히 살았거든요.”
당시 가난한 아낙네에서 철거민대책위의 투사로 변신한 ‘목동아줌마’ 최순옥(55) 씨는 지금도 떨리는 음성으로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그 때 애기 들쳐 업고 운동 상당히 했어요.(웃음) 처음엔 주민 대표들하고 모여서 진정서, 탄원서 쓰고 하다가 안 되니까 구청장, 시장 면담하고 그래도 안 되니까 몸으로 싸운 거지.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친 거예요. 이건 민주주의 아니다. 말로만 민주주의 하자 해놓고 와서는 윽박지르고 강제로 나가라고 한다면 이건 아니지. 갈 곳이 없으니까 사람이 독해지더라구. 애들은 넷 있는데 엉덩이 두를 데 하나 없다고 하니까 겁날 게 없어. 천막에서 하늘만 쳐다보니까 기가 막히지.”
정부에서는 주민들의 절박한 사정과 거센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들 돈 벌 때 너희들은 뭐하고 이제 와서 이러면 어떻게 하느냐’느니, ‘관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으면 이주비와 입주권도 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무시했고 선철거 후입주 조치로 가옥주와 세입자들 사이에 이간질을 조장했다. 즉 집을 헐고 나서야 알량한 입주비라도 받을 수 있었기에 세입자들은 당장에 세간살이를 들고 나와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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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천막 생활을 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84년 8월 27일, 1차 아파트 분양 가격에 당황한 주민들이 구청장에게도 무시당하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시장을 만나기로 나선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수가 1,000여 명. 그들은 김포가도를 거쳐 양화대교까지 몰려갔다. 하지만 어느새 출동한 전투경찰의 제지로 그 자리에서 연좌 농성이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밤늦게까지 김포 진입로는 전면 차단됐고 성산대교 일대는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는 등 일대 혼잡을 빚었다.
경찰이 시위 참가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할머니가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실신했고 다수의 부녀자들이 폭행당했으며 10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됐다.
이에 굴하지 않고 주민들은 밤늦게까지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오목교에서 목동 거리 쪽으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이번에는 40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의 무차별 구타로 연행됐다. 이 날 이후 뚝방 100여 미터 가량 경찰 차량이 배치됐고 목동 아파트의 분양 일정이 확정되면서 투기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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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의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목동의 실상을 조사하여 시민들에게 알렸고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는 양화교 시위의 경과와 동기를 학보에 실어 이 문제를 학내에 알려 나갔다.
10월 말, 1통부터 14통까지 철거되고 날씨까지 추워지자 갈 곳 없는 주민들은 더욱 다급해졌다. 11월에는 주민들이 오목교까지 나가 ‘아파트 입주권을 세입자에게도 혜택을 달라’, ‘우리는 갈 곳이 없다 대책을 세워 달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던 중 경찰과 구청 직원들에게 폭행당하거나 연행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12월 18일 주민 500여 명은 뚝방에 모여 대책 회의를 한 후 경인고속도로를 점거한 채 생존권 보장을 울부짖었으나 전경 부대들은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23명을 구로 경찰서에 연행해갔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치지 않고 싸웠다. 스스로를 지키고 어린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단결해서 투쟁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옥주 300여 명이 시청 앞 광장에서 농성을 하는가 하면 구청, 목동 개발사업소, 파출소, 김대중 씨 귀국 환영회 등 여론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단결된 목소리를 외쳤다. 여의도 신민당사를 점거해서 5일 동안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누구를 위한 도시개발인가? 당시 신학생으로 목동에서 도시빈민운동에 참가했던 박병구(46) 씨는 목동 철거민 투쟁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80년대 초에는 학생운동의 시위도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민중운동 차원에서는 목동 주민들이 처음으로 집단 행동을 한 거였어요. 구호 속에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군사정권은 물러가라’라든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포기하겠다’라는 결의가 있었을 만큼 생존권을 넘어 정치적인 부분까지 언급했었죠.”
84년 10월 29일, CBS 라디오의 ‘다시 어디로 가야 하나’란 프로그램에선 당시 목동 주민들의 말을 그대로 보도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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