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용산역을 향해 가는 택시 안. “나비축제 보러 가시나 보죠?” v 광주가 고향이라는 운전 기사는 내가 함평에 간다니까 그렇게 되물었다. 거센 농민운동의 진원지였던 함평은 30년이란 세월을 거쳐 어느덧 축제의 고을로 재인식되는 것일까? 전라남도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함평은 서울에서 기차로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태풍주의보 때문에 우려했으나 막상 도착한 함평에는 가을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다. 강렬한 햇볕에 고개를 바로 들기 어려웠으나, 들녘의 벼이삭을 여물게 하기 위한 고마운 볕이라 생각하니 밉기는커녕 정다운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에서 맛볼 수 없는 풀내음 묻은 바람이 외지인을 반겼고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논은 군데군데 노르스름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아침에 만난 택시 기사의 말대로 읍내 이곳 저곳에 나비축제 선전물과 나비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푸근한 산과 들에 어울리지 못하고 왠지 생뚱맞아 보였다.
정부를 믿은 농민들 1976년 고구마 피해보상운동의 대표 격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서경원 전 의원과 가톨릭농민회 회원이었던 장성옥 노인의 안내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관련자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들었다.
그해 3월부터 농협 임직원들은 함평군 내 7,000여 고구마 생산 농가를 상대로 출하 희망 전량을 작년에 비해 17.4% 인상된 고시가격으로 수매하겠다고 선전했다. 수확 시기 직전인 9월에는 농협 전남 도지부장이 직접 함평까지 내려와 “농가소득 증진을 위해 농협이 전량 수매할테니 상인에게 헐값에 팔지 말고 농협에 출하할 것”을 독려했다.
이에 농민들은 철석같이 농협의 약속을 믿고 상인에게 유포시킬 판로나 별도의 저장대책을 마련치 않은 채 수확한 고구마를 농협에서 제공한 포대에 담아 길가에 쌓아두고 농협 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을마다 수확한 고구마는 길가에 쌓인 채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어도 농협은 어쩌다 한두 차씩 실어갈 뿐, 대부분의 고구마는 눈비를 맞고 추운 날씨에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때 밭에는 거지반(거의) 고구마 농사제. 저그 도로가에다 가마니 가마니 해서 쌓아 놓거든? 자기 것 죽 쌓아 놓고, 그 다음 다른 사람 것 쌓아 놓고. 그런데 안 가져가 버리니까 한쪽에서는 막 썩고 난리 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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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 고구마 농사를 지었던 황의권(함평군 대동면) 씨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들이 안타까워 농협에 문의하면 곧 실어갈테니 걱정말라는 말뿐, 마을 어귀나 밭고랑 가에는 고구마 썩는 냄새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를 찔렀다. 불안해진 농민들은 개별적으로 상인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제 농협수매가 진전이 없다는 낌새를 알아챈 상인들은 배짱을 부렸다.
“신한제분(함평 소재의 주정회사)에 넣을라케도 제분공장하고 배경이 있는 사람만 한 차씩 실어 넣고. 그 사람들 술 받아줌시로 우리 것 좀 실어가달라고 사정, 사정을 한 거이지.”
15kg들이 고구마 한 포대 가격이 당초 1,317원에서 600원으로, 200원으로 폭락했다. 그나마도 농협 전용포대로는 수매가 안되니 모두 비워서 새 포대에 담아야만 사갔고, 그러다보니 썩은 것을 추려내고 나면 포대 수마저 줄어 손실이 더욱 컸다.
방해 책동에도 굴하지 않는 농민들 당시 함평지역 농민운동 세력은 가톨릭농민회,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육 이수자 모임, 농촌문화 연구회, 4H회원 등 80여 명이었는데 이 중 10여 명 정도가 주도하고 있었다. 서경원을 주축으로 한 17명의 농민들이 읍내 식당에 모여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구성하고 각 농가별 피해내용을 조사하기로 결정했으니, 이때가 1976년 11월 17일이다. 대책위에서는 각 농가별 피해내용을 생산량, 수매 계획량, 실 수매량, 부패량, 감량, 수매처, 수매 금액, 피해액 등 서식을 작성해 조사에 들어갔다.
“우리는 밤마다 생산 농가에 가서 피해 현황에 대해 상담과 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이튿날 농협 직원들이 파견되어 그것을 무효화시키는 거야. 어떻게 하냐면, ‘본인이 생산한 고구마는 영농 형편상 상인에게 판매하였으므로 농협 등 기타 기관에 대해 하등의 책임이 없음을 확인합니다’라는 <확인서>에 도장을 받아 갔어요.”
당시 상임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노금노(동학농민혁명 함평군기념사업회 회장) 씨의 설명이다. “그때는 유신독재 치하였기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은 관과 싸운다는 것에 대해 엄청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농협 직원들이 나오면 아이고 이거 큰일났구나 하면서 그 확인서에 도장을 찍어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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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에는 경찰까지 개입되어 농민 대책위원들을 연행해다가 ‘때가 어느 때인데 반정부활동 하느냐’, ‘활동을 계속하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집어 넣는다’는 식의 협박을 했고, 마을 단위 교육에 참가하는 농민들에게도 겁을 주었다.
그러한 방해 책동에도 대책위원들은 다시 마을로 들어가서 두려움에 떠는 농민들을 격려하고 조사활동의 정당성에 대해 설득했다. 대책위원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농민들로부터 ‘몇 월 며칠, 농협과 경찰들이 찾아와 작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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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확인서는 강압적인 방식에 의해서 받아간 것이기에 앞으로 고구마 피해보상운동 과정에서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음을 해명합니다’라는 내용의 <해명서>를 받아냈다. 노금노 씨의 생생한 설명은 이어진다.
“그해 11월 말까지 각 마을별로 조사를 완료키로 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12월 31일에야 함평군 전체 7,300세대의 고구마 생산 농가 중 9개 마을 160농가만 조사에 응했어요. 그런 방해 책동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농가가 피해 조사에 응했을 거예요. 활동가들은 수적으로 적고 군농협 임직원과 경찰, 행정 직원들은 천 명이 넘었으니까. 어쨌든 조사 결과 160농가 손해액이 총 309만원으로 나왔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추정해 보니 전라남북도를 합쳐서 고구마 농가의 손해액이 24억원 정도. 현재 시가로 약 2,000억원 정도의 피해 규모인 셈이었죠.”
분노와 함성이 투쟁으로 77년 1월 9일에는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함평 천주교회에서 2차 대책위원회가 열렸고 농협이 직접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결정에 따라 군농협 측에 문건을 통해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농협 측은 계속 발뺌을 하면서 경찰과 협력해 대책위원들의 활동을 계속 방해했다. 피해보상운동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농민들은 하나, 둘 투쟁의 대열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책위에서는 강제출자거부운동과 비료강매거부투쟁을 벌려 승리함으로써 투쟁의 불씨를 가까스로 이어나가 4월에는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 고구마피해보상을 사안으로 기도회를 열게 되었다. 월간 『대화』에 이 사건 내용이 자세히 보도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700여 명의 농민들과 반유신 민주화운동 세력이 집회에 결합했고, 농협 도지부에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실패했다.
대책위에서는 이에 도단위의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 아래 6월 10일 서울 동대문 천주교회, 8월 대전가톨릭회관, 부산 기독학생청년집회 등에 대표를 파견해 고구마 피해보상운동 상황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했다.
어느덧 함평 고구마 사건은 노동운동 쪽의 동일방직 사건과 더불어 전국적인 사안으로 부상하게 됐다. 사태가 점차 심각해짐에도 농협 측에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운동을 무마시키려 할 뿐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78년으로 넘어오자, 많은 피해 농가들도 보상에 대해 의구심이 커지고 함평을 떠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결국 대책위에서는 최후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서 투쟁해야겠다는 구상 아래 4월 24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 다시 한번 대규모 농민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날 문익환 목사, 김수환 추기경, 김대중 씨, 김영삼 씨 등 각계 민주 인사들과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와 규탄대회가 진행됐고 옥내 행사가 끝나자 울분과 분노를 참을 길 없는 농민들이 가두로 진출했다. 이는 평소에 농협이 땅의 주인인 농민 위에 군림하는 구태의연한 관료적 속성뿐 아니라 농민의 희생만을 강요해 온 근대화 정책, 영세농의 상환 능력을 무시한 획일적인 주택개량사업, 악덕 재벌들의 토지 투기, 물가폭등을 막기 위한 농산물 수입 등 당시 정권의 전반적인 농정 실패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었다.
700여 농민들은 머리띠에 붉은 글씨로 ‘고구마 피해 보상하라!’, ‘농민운동 탄압 중단하라!’, ‘구속회원 석방하라!’등을 써서 묶은 채 각종 피켓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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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장대를 든 농민들과 곤봉과 방패를 든 전투 경찰들은 몸싸움을 시작했다. 경찰들의 수적인 우세 탓도 있었으나 장기전을 예상한 대책위는 저녁에 다시 성당에 복귀해 그날로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분노와 함성으로 하룻밤을 보낸 농민들은 다음 단계 투쟁으로 단식을 결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때는 농번기 철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할 시기에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농민들의 심정은 착찹하기만 했다. 단식투쟁에 참여하는 이들은 그래서 더욱 비장한 각오를 했고, 일을 하기 위해 돌아갈 수밖에 없는 많은 농민들은 남은 이들을 향해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전남의 농민들을 비롯해 강원, 경북, 경남, 충남 등 전국 각지의 농민운동가 73명이 참가한 단식투쟁단은 ‘직접피해보상 명목이 아니면 단돈 한 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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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수 없으며 대금은 즉각 단식현장에 갖다 놓으라’, ‘구속 중인 농민회원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전국가톨릭농민회 지도 신부단과 민주 인사들,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지원했다. 그러나 경찰은 성당 주위를 대형 차량으로 막아 시민들의 관심을 분리시켰고, 단식자의 가족들을 농촌에서 단식현장까지 데려다가 귀가를 종용시키는 야비한 방법까지 동원해 투쟁을 종식시키려 들었다.
단식투쟁의 나날이 지날수록 하나, 둘씩 탈진해서 병원에 실려 갔고 정부와 공권력은 협상에서 무성의한 태도로 책임을 회피하려만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가자들은 그동안 수출제일주의 근대화 정책에 희생만을 강요 당해온 자신들의 삶과 인간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굶어 죽기를 각오했다.
긴 3년의 싸움, 농민의 승리 시간이 지날수록 귀향 농민들은 지지 방문단을 조직해 농성장을 다시 찾았고 전국 각지에서 격려 전문이 보내졌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농성단을 사수하기 위해 경찰과 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광주 대교구의 신부들이 투쟁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단식 5일째 날, 관계 당국은 농민들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78년 5월 2일, 단식 농성 9일째에 농협 도지부장 대리가 농성장에 찾아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액 309만 원을 전달했다. 모든 단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농협 판매과장이 현금 봉투를 전달할 때 그의 손은 후둘후둘 떨리고 있었고 보상금을 건네 받는 대책위원장 임정택 씨의 두 뺨 위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농성자들은 서로 부등켜 안으며 있는 힘을 다해 만세를 불렀다.
“농민운동 만세!” “함평 농민 만세!” “가톨릭농민회 만세!”
사건 발생 3년만에 얻은 승리였다. 그날 이후 전국의 중앙 일간지에는 ‘농협 고구마 수매자금 80억 원 유용’, ‘단군 이래 최대의 부정사건’, ‘농협 임직원 659명 무더기 징계’ 등등의 제목으로 사설과 함께 대서특필되면서 함평 고구마 사건이 만천하에 공개되기에 이른다.
언론에서는 당초 정부에서 고구마 수매 대금으로 지원한 돈이 고구마 생산 농가로 전달되지 않고 일부 단위 농협이 주정회사나 중간 상인과 결탁하여 관계 서류를 허위로 꾸며 농협 자금을 회사 측에 빼돌린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농협의 임직원이 정부에 의해 임면된다고 봤을 때 유신독재 권력의 핵심부와 주정회사라는 독점재벌의 야합으로 돈이 엉뚱하게 유용된 사건으로 보는 게 정확하다.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운동은 70년대 농민운동의 기폭제이자, 반독재민주화운동 세력의 투쟁의 한 축이기도 했다. 또 1930년대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최초로 정부 측과 대항해서 승리했던 사례다.
아직도 농민들은 싸울 수밖에 없다 농민운동사적으로 1945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한국전쟁으로 와해된 후, 5,60년대 관 주도의 운동과 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위축된 상황에서 함평의 쾌거는 농민들에게 주체적인 인식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운동 과정에서 다분히 교회에 인적, 물적으로 의존되었던 경향이 내부적으로 비판되기도 했다.
이러한 자성의 움직임은 84년 함평, 무안 농민대회와 85년 소몰이투쟁을 거치면서 농민의 자주적인 대중조직 결성을 이끌어 냈다. 85년부터 군 단위의 자주적 조직을 결성했던 군 농민회들은 87년 2월 ‘전국농민협회’를 결성했고, 곧이어 6월 민주대항쟁과 변화된 정치 상황에서 농민운동은 이론과 조직, 실천 면에서 훨씬 깊이를 더 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함평에서 돌아오는 길, 저 가을 들녘과 논두렁마다 농민들의 피눈물과 역사를 개척하는 의지가 서려 있다고 생각하니 남도의 풍경이 더욱 장엄하게 가슴에 다가왔다. 함평의 농민들은 현재 골프장 건설 반대 투쟁을 하며 여전히 흉폭한 자본에 맞서 그 땅과 문화와 혼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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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영환 1974년 서울 출생 2004년 청계천 르뽀집 『마지막공간』 공저
| 사진 황석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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