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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신림 사거리는 대형 쇼핑몰과 나이트클럽, 오락실 등 각종 상가와 바쁘게 지나는 행인들로 분주하기만 하다. 19년 전 이곳에서 반미 시위 도중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흔적을 다시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 집회 참가자들에게 들은대로 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방향으로 100m 정도 걷다보니 연좌농성이 시작됐다는 가야쇼핑센터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건물 진입로 쪽의 도로변에서 집회는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열사들이 분신한 3층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다. 인근의 상인들 몇 분에게 물었으나, 86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버스정류장 바로 뒤편 안경점 진열장 안으로 나이 지긋한 노인분이 눈에 띄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86년 일을 물어봤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바로 이 건물에서 그랬다오. 나도 그날 상황을 목격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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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부터 그곳에서 가게를 해왔다는 60대의 상인은 당시 지역의 방범위원으로서 열사들의 타고 남은 옷가지를 수거해서 맡았던 인연까지 있었다. “아침부터 분위기가 다르더라구. 버스에서 학생들이 무리지어 내려와서 미리 약속한 것처럼 도로에 자리 잡고 앉더라 이거야. 옥상에서 분신했는데, 오전 시간이라 밝으니까 불꽃은 안 보이고 아지랑이처럼 연기가 하얗게 피어올랐어요. 한 사람은 앞으로 뛰어내렸고 한 사람은 뒤로 떨어졌나? 앞에서는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닭장차가 와서 끌고 가 때리고……. 우리도 그러지 말라고 밖에서 소리쳤어.”
서강빌딩. 낡은 적벽색의 3층 건물은 아무런 푯말 하나 없이 거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건물 1층의 분식집과 빵집에선 당시 열사들 또래의 젊은이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중이었고 옥상을 올려다보니 때 묻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1986년 4월 28일 오전, 이곳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나? 출세를 보장받았던 서울대생 두 사람은 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던 것일까? 그들이 몸을 사르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반미’를 외치다 80년 5월 광주를 겪거나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에게 전두환은 더 이상 일국의 대통령일 수 없었고, 신군부를 지원하고 두둔하는 미국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나 우방으로 인정될 수 없었다.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건 등은 오랫동안 한국의 우방으로 인식되어 온 미국의 또 다른 면을 공개적으로 폭로한 사건들이었다. 더욱이 86년으로 넘어오면서 신군부의 폭압정치는 극에 달했고, 남한에 배치되어 있는 전술핵이 실제로 사용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감 있게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인식하고 미국의 패권전략, 군사독재, 조국 통일에 대한 고민을 해오던 학생운동 진영은 마침내 결연한 행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86년 3월 18일 서울대 IMC회관 앞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이 ‘반전반핵 평화옹호 투쟁위원회’(반전반핵투위)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은 정치학과 4학년생인 이재호가 맡았다. 그의 선창에 따라 집회 참가 학생들은 “반전반핵 양키 고 홈!”, “민족생존 위협하는 핵 기지를 철수하라!”, “친미독재 타도하고 미제국주의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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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소수의 선도 투쟁이었다면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은 이론을 토대로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죠. 하지만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농성자들도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 단지 광주학살의 배후를 묻고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에 문제 제기하러 들어온 거다.’ 국민적 정서를 고려한 거죠. 그런데 86년이 되면서 반미를 전면적으로 내걸고 투쟁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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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83학번이자 공대 학생회장으로 신림 사거리 집회를 함께 준비했던 장유식 변호사(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 회장)의 설명이다. 분단된 조국과 독재정권 하에서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학생들 사이에서 반미자주화운동은 급물살을 타고 확산됐다. 4월 4일에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가 결성되고 ‘반전반핵투위’도 이에 소속되어 이재호 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청계천 4가 미 공병대 앞에서 성조기 소각 투쟁, 영등포 로터리에서 반미투쟁, 미국의 리비아 폭격 규탄투쟁, 남영동 미 8군 USO 타격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한편 투쟁위원회와는 별도로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운동이 진행됐는데 학생들은 각 단과대학과 총학생회 선거 공간을 이용해 핵전쟁 위기와 민족공멸의 상황을 알려 나갔다. 자연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김세진은 반미 시위와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평소 성실한 모습과 토론에서의 치열한 태도로 주변 학생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전방입소 거부 투쟁 결의 그 무렵, 성균관대에서는 85학번 2학년 500여 명이 전방입소 훈련 거부를 선언하고 100여 명이 철야농성에 돌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는 학생들을 군 조직의 일부로 취급하던 시기였어요. 1학년 때는 문무대라고 불렀던 학생병영훈련소에서 일주일 정도 내무반 교육과 사격 훈련을 받았고, 2학년 때는 전방입소훈련이라고 해서 실제 전방 부대에 들어가 병영문화를 강제로 체험하게 했죠. 총학생회가 있기 전에는 학도호국단으로 학생들을 관리했고, 2학년 때까지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장유식 변호사의 말처럼 전방입소제도는 대학을 군 구조의 일부로 편입시킴으로 해서 대학사회의 비판의식을 말살시키려는 억압 장치였던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와 자민투는 성균관대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 4월 28일부터 5월 3일까지 예정된 서울대 85학번들의 전방입소 거부 투쟁을 결의하였다. 4월 16일에는 총학생회장 김지용을 위원장으로, 이재호를 공동부위원장으로 하는 ‘전방입소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4월 28일 입소거부투쟁을 집중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별위원회는 학교 안을 돌면서 홍보를 하고, 『민족의 활화산』이라는 소책자도 만들어 교내와 타 대학교에 배포했다. 입소 당사자인 85학번들은 학내 곳곳에서 전방입소훈련과 미국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과별, 단과대별로 입소 거부를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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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오르는 학생들의 의지에 따라 특별위원회는 전방입소 거부선언을 한 뒤, 4월 28일부터 중앙도서관에서 농성하면서 ‘민족대학’을 선포하고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었으나, 그 낌새를 눈치 챈 학교 당국은 26일 오전부터 28일까지 도서관을 휴관시켜 버렸다. 1차 농성 계획이 무산되자 급히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의대 도서관을 농성 장소로 선정하고, 김세진이 사전 답사를 책임졌다.
거사 예정일은 27일 오후 1시, 농성 현장을 지휘할 지도부로 김세진, 이재호 등이 이때 결정됐다. 이 계획은 26일 밤 4,5명씩 조 단위로 연락체계를 갖추고 있던 85학번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에 의해 캠퍼스 주변이 통제되고 진입을 시도하던 학생 100여 명이 연행되는 것으로 두 번째 농성 계획도 불발되었다.
27일 밤 특별위원회 회의에서는 비상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격론이 벌어졌고, 농성 지도부였던 김세진, 이재호는 연달아 농성 계획이 무산된 것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꼈다. 결국 입소 당일인 28일 아침 9시 학교와 거리가 가깝고 경찰이 봉쇄하기 어려운 신림 사거리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당시 열사들의 동기이자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던 이정승(42) 씨는 장소 선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림 사거리는 전에도 가끔 가두투쟁 장소로 활용됐었죠. 의대 도서관 농성이 불발로 그치면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기 때문에 다시 시내에서 집회를 잡기에는 무리였어요. 학교와의 근접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습니다.” | |
예기치 않은 분신 다음날 400여 명의 입소 대상 85학번들이 가야쇼핑센터 부근에서 신림 사거리까지 연좌한 채 근처에 있는 한 3층 건물 위를 주시했다. 4학년 선배인 김세진, 이재호가 옥상에서 집회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핸드마이크로 ‘전방입소훈련은 미 제국주의의 대학생들에 대한 용병교육이고 식민지노예교육’이라는 내용을 연설한 뒤 홍보물을 뿌리며 구호를 선창했다.
“반전반핵 양키 고 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출동했다. 그들은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한 뒤에 연행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두 사람이 있는 건물 옥상까지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은 공업사에서 미리 사 온 시너를 온몸에 끼얹으며 올라온 경찰들을 향해 외쳤다. “시위대에게 덤벼들지 마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 그러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실적 세우기에 급급한 경찰들은 두 학생에게 다가갔고, 결국 그들은 라이터 불을 당겨 몸에 붙이고 말았다.
온몸이 화염에 휩싸인 채 이재호는 고통에 못 이겨 옥상에서 떨어졌고, 김세진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장유식 변호사는 두 열사의 분신이 세간에 자살로 알려졌던 일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당시 언론 보도에 ‘분신자살’이라고 표현됐는데 절대 자살이 아니에요. 그때만 해도 지도부가 석유를 끼얹고 위협하는 건 상징적인 몸짓이었어요.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고 대오를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결연한 투쟁의지였던 것이죠.” 이정승 씨도 같은 생각이다.
“분신 전날 세진이를 비롯한 학생회장들과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국수를 간단히 먹었는데, 그 때 세진이는 자기가 먼저 정리해서 (교도소에) 들어갈 테니 열심히 싸워 달라고 부탁했어요. 전혀 죽으려는 생각이 없었고 예기치 않은 분신이었어요.” 김세진 열사가 분신 이틀 전에 부모님에게 쓴 편지 내용 역시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중략) 저의 행위는 한순간의 영웅심이나 학생회장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학 들어와서 읽은 수백 권의 책과 객관적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고뇌하며 오랜 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중략) 이 땅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교도소 안에서 고민하고 나와서도 변혁 해방운동에 이 몸을 바칠 것입니다.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편지 드리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1986년 4월 26일자 김세진 열사의 편지 중에서)
두 열사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가슴속에서 불길보다 더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인문대 학생회장 이정승이 학생들 앞으로 나가 구호를 선창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85학번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가면서도 “세진이 형~”, “재호 형~”을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거나, 두 사람이 선창했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남은 자들의 몫 한강성심병원으로 실려 간 두 사람은 이미 의식불명상태였고 이재호 열사는 전신 80%, 김세진 열사는 60%에 걸쳐 3도 화상을 입었다. 검게 그을린 살갗으로 약간의 의식을 회복한 뒤에도 이들은 “제가 죽는 건가요? 저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요. 친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라며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평소 효심이 깊었던 두 열사는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하며 투쟁의 정당성을 설득하다가 마침내 김세진 열사는 5월 3일, 이재호 열사는 5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나이 모두 스물셋 이었다.
‘생명 경시 풍조’이니 ‘고생을 모르고 자라 나약하다.’느니 언론의 잔인한 매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결연하고 헌신적인 투쟁은 이후 반미민족자주화운동의 밑불이 되었고 독재정권에 대한 대중적 분노는 이듬해 6월 항쟁을 통해 폭발하였다. 열사들의 진실한 마음과 의지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이라크파병반대시위와 미군기지 확장반대 시위 등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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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들이 산화한 지 20주년 되는 내년 4월, 심포지엄, 추모 문집, 영상물 상영 등을 통해 ‘김세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