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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표 윤영규 선생의 삶과 기록

 

현재 사업회 사료관은 기록물의 수집정책 및 방법 등 기능적 측면에서 볼 때 조직형 보존소가 아니라 수집형 보존소(Collecting Repository)이며, 기록물의 법적인 수집대상이 공기록물보다는 사기록물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료관의 기록물은 특성상 한 조직의 내부 자료가 다량 수집된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다양한 출처의 자료가 소량씩 수집되어 있는 매뉴스크립 컬렉션(Manuscript Collections)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 사례로 전교조 초대위원장을 역임했던 윤영규 선생의 기증자료(‘윤영규 컬렉션’)를 통해 선생의 삶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선생은 대학시절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수십여 상자의 자료를 지난 2002년 사업회에 기증했다. 선생이 기증한 13,000여 건에 달하는 자료는 한신대 재학 중에 일어난 4·19 당시 ‘대학생수습원’ 완장, 50~60년대에 발행되었던 수십여 종의 월간지를 비롯하여 전남지역의 교육민주화운동에 관한 여러 자료가 있다.
 
YMCA중등교사협의회, 민주교육실천협의회,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와 전교조 활동자료 등 교사시절부터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을 몸소 실천하신 선생의 삶의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생의 기증 자료 중 절반 이상은 전교조 초기의 자료이지만 그 밖에도 학생운동, 노동운동, 5·18 관련 자료 등 온갖 운동단체들의 성명서, 유인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전교조와 선생의 개인적인 자료를 제외하더라도 무려 800여 단체의 기록물이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한 출처(provenance)당 평균 건수는 5건이어서 선생의 자료를 분류하고 또한 전체의 체계 속에서 서로 연관시켜주는 분류체계를 만드는데 상당한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잘한 신문스크랩부터 제자들이 보낸 서신이나 메모 등의 기록물을 정리하다 보면 그의 삶과 관련된 기록을 수십여 년 동안 어떻게 저토록 꼼꼼히 간직할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선생이야말로 기록이 역사의 바탕이 됨을 일찍이 깨달은 분이 아닐까 싶다.

 

선생의 삶

1935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윤영규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한국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1961년 졸업과 동시에 목포 영흥 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광주 숙문중학교와 광주상고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광주 YMCA에서 청소년 서클을 지도하는 활동을 하다가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개월 간 중앙정보부 광주분실에 구금되었다.
이 일로 10여 년간 재직했던 광주상고에서 파면 당한 선생은 이후 순탄치 않은 길을 걷게 된다. 후에 복직하였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흥사단아카데미, 밀알회, 기독학생회, 불교학생회 등의 지도자로 구성된 광주 청소년지도자협의회, 광주양서협동조합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참교육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선생은 전남도청에서 홍남순 변호사, 조비오 신부, 송기숙 교수 등 광주지역 민주인사로 구성된 17인의 수습대책위원 중 한 분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의 역할로 선생은 보안대에 끌려가서 계엄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80년 12월 말에 석방되기도 하였다.

참교육 실천의 한 길


5·18 광주항쟁으로 인해 또다시 교직에서 쫓겨나고 학원 강사 생활을 하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선생은 1982년 광주YMCA중등교사협의회 창립을 주도하는 등 참교육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후 복권이 되어 나주중학교로 복직, 1986년에는 한국YMCA중등교사협의회 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 때 5·10교육민주화선언을 주도하다 고흥군의 외딴섬으로 좌천되었고, 이에 항의하여 1주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여 집시법 및 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기도 했다.
5·10 ‘교육민주화선언’에서 선생을 비롯한 교사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는 역사의 필연이며 각 부문의 민주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교육부문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 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무기력한 말단 관료, 역사 속의 방관자의 위치를 탈피, 새로운 교사로서 참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민의 교육적 요구를 올바르게 실천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교육의 민주화는 민주사회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바탕이라는 자각에서 새로운 교육건설의 역사적 과제를 짊어지고 모든 장애와 고난을 이기며 민주교육을 실천해 나갈 것을 오늘 엄숙히 선언”하였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확산되던 87년 9월 27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 만세!’를 내건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가 결성되었고, 선생은 초대회장이 되었다. 전교협은 ‘창립선언문’에서 “맹목적인 복종을 단호히 거부하고 교사의 단결을 기초로 교사의 의견을 수렴하고 학생교육을 정상화하며, 학부모의 올바른 교육적 요구를 받아들여 이 시대 이 땅의 참된 교육을 실천해 갈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자주적 교원단체가 결성되고 교사의 제반 민주적 권리가 확립될 때까지 결연히 싸워 나갈 것”과 “우리 교사와 학생·학부모의 희망찬 내일을 위해 교육의 민주화를 힘차게 추진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한 참교육을 실천해 나가자”고 선언하였다.
전교협이 결성된 지 2개월 반 만에 14개 시·도 교사협의회 조직이 결성되는 등 교사들의 자주적 조직 건설 요구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침내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창립으로 이어졌으며, 선생은 초대위원장으로 또다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가속화하면서 선생은 네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된다.
선생이 청춘과 반생을 바친 참교육의 뜻은 전교조를 통해 교육 민주화, 나아가 사회 민주화의 진전으로 나타났다. 13,000여 건에 달하는 기록은 우리 시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다.

 

후배 사랑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

선생은 전교조 초대위원장과 2대위원장을 역임한 이후에도 사회민주화운동에 지속적으로 헌신하였다. 1991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공동의장을 역임하였고, 이 무렵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위원회 창립을 주도하다가 또 다시 수배되기도 하였다. 선생의 머리는 희어졌지만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열정은 해가 거듭될수록 깊어갔다.
선생이 1994년 세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을 애도한 ‘조사(弔辭)’는 먼저 떠난 후배에 대한 선생의 애정과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보여주는 글로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김남주, 당신께서 반제민족자주와 반파쇼 민중해방 그리고 조국통일사업의 최전선에 서서 ‘혁명’을 불피울 때, 제국주의·독점자본·반통일의 거대 세력에 대한 ‘전사’로서의 단호함을 결행할 때, 전인류적 억압과 착취와 수탈을 깨부수는 전세계적 ‘시인’의 진면목을 푸담하고 실답게 제공할 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마지못해 영위된 우리의 삶은 어쩌면 당신에게 죽음을 안겨준 ‘재앙’이었음을 고백합니다.(중략)
나의 죽음을 의탁해야 할 후배 가운데 하나인 당신의 죽음 앞에서 조사를 읊조리는 이 이승의 선배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영결해야 할 이 시간, 우리 사회 전체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너무 외롭게 그토록 고달프게 분투하던 당신의 마지막 신체 앞에 서 있는 나이 많은 선배는 의식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김남주를 위한 조사(弔辭)

 


<전명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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