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의 잔설이 이른 봄까지 날리던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새학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하던 학교생활에서, 그래도 새학기만큼 매력적이고 가슴 뛰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옆자리 짝꿍도 바뀌고, 모든 교과목의 담당 선생님들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새학기 첫 번째 한문 시간이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의 한문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칠판에다 흰 분필로 뭔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로 시작하는 이성부 시인의 ‘봄’이라는 시를 단숨에 써내려갔고, 우리는 그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마 그때 교실 창문 밖으로는 겨우내 안달 난 봄이 살금살금 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처음 그녀를 만나고 나서, 스무 살이 넘어서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의 자취방엘 놀러갔던 적이 있다. 그녀가 살고 있던 방에는 책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많은 책들 중에서 무심코 빼든 책이 바로 독일의 ‘케테 콜비츠’라는 화가의 판화집이었다. 어찌나 느낌이 강렬하던지,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그날 캄캄한 골목길을 되짚어 나오며 그림이 갖는 힘에 대해 생각하며 온몸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오롯하다.
이라크전쟁을 주제로 삼았던 ‘봄’展 손끝이 시릴 정도로 날이 찬데, 하늘은 깨질 듯이 맑다. 바람이 불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나직나직한 건물들이 들어서있는 동네가 왠지 낯설지 않다. 받침 하나가 떨어져 나간 동네 슈퍼 간판 아래로 호빵이 뜨거운 김을 올리고 있었다. 2층으로 연결된 좁다란 계단을 밟아 올라가서 ‘늦바람’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서쪽으로 난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작업실의 그림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녁 7시 30분에 열린다는 ‘대중미술강좌 - 불화(佛畵)’편 준비로 작업실에는 이주연 사무국장이 미리 나와 있었다. 작은 공장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성동구에 1997년에 들어온 ‘늦바람’은, 그동안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다. 지금 세 들어 있는 작업실은 들어온지 딱 1년이 됐단다.
1995년 마음이 맞는 작가 두명이서 시작한 ‘늦바람’은, 처음에는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산하에 그림 동호회로 있었다. 그러다 단체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1997년 민예총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시민 미술단체로 꾸려나가게 됐다.
지금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주연 씨도 1997년 ‘늦바람’ 일반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림 수업은 공식적으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진행되지만, 시간이 나는 회원들은 언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작업실 문은 늘 열려있다. ‘늦바람’은 한 달에 한 번씩 야외스케치를 떠나고, 갤러리 탐방을 다닌다. 두 달에 한 번씩은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서 그림과 관련된 대중강좌를 열
기도 한다. 바로 오늘 열리는 강좌가 대중강좌의 한 꼭지이다. 또 일 년에 한 번씩 정기 전시회를 여는데,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을 열었다. “통일행사 같은 데 참여하기도 합니다. 재작년 봄이었나 왕십리 문화공원이 새로 생겼을 때, ‘봄’이라는 이름으로 야외전시회를 열었거든요. 봄이라고 해서 예쁜 그림만 전시한 게 아니었어요. 이라크전쟁을 주제로 삼은 전시회였어요. 그렇다보니 구청 공무원과 마찰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그림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건데 뭘 그러냐고 하면서 담당 공무원 전화 몇 번 받고 그냥 계속 전시회 열었어요.” 동그란 얼굴의 이주연 사무국장의 대답이 명쾌하다. 그러고 나서는 회원들이 야외전시회를 좋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회원들은 전시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그림 그리기 방식을 다양하게 모색하게 된다.
늦바람 10주년 기념 전시회도 열었어요 지난 여름에는 ‘늦바람’이 생긴지 10주년 되는 기념으로, 광진문화예술회관에서 ‘우리시대의 풍속화’라는 제목의 전시회와 ‘시민 미술의 모색’이라는 세미나가 동시에 열렸다. 보통 전시회를 열 때 20점 정도의 그림이 걸리는데, 10주년 기념전시회 때는 무려 60점의 그림이 걸리기도 했다. 회원은 들쑥날쑥하기는 하지만 스무 명 정도 되고 대부분 직장인이다.
“그림은 처음에 안 빠지고 석 달 정도는 그려야 좋아지는 것 같아요. 우선 회원이 들어오면 그림보다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공간에 흡수되는 게 좋아요. 그래야 그림 그릴 맛도 나고 그렇죠.” 이주연 사무국장의 말이 맞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게, 늘 사람 관계 속에서 방향들을 잡아나가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화가들이 그림 지도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림을 오랫동안 그려온 초창기 회원들이 그림 지도를 하고 있다. 대중강좌를 통해서 그림의 이론적인 부분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다.
“저기 벽에 붙어있는 은박지들은 뭔가요?”
흰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은박지를 가리켰다. “대중미술 강좌 시간에 한 건데요, 회원들의 얼굴 모양을 뜬 거예요. 서로 짝을 이뤄서 은박지를 대고 상대방의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칭찬을 해주는 거예요.” 어떤 효과가 있냐고 묻자, 이주연 사무국장은 사람의 따뜻한 감촉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고 대답한다.
는 초등학교 벽화작업은 다른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서 프로젝트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벽화작업은 처음 기획부터 제작까지 전적으로 아이들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벽화에 색칠을 할 때는, 설령 그림꼴이 안 나오더라도 동네 꼬마들까지 와서 합세를 하게 된다. 나중에 아이들이 다 돌아간 뒤에 아이들 모르게 ‘늦바람’ 회원들이 뒷마무리를 한다.
성동구에서만 하던 벽화작업을 내년에는 광진구까지 넓혀 볼 생각이다. 역량이 더 모아지면 서울 전역에 벽화작업을 해보고 싶은 큰 꿈도 있다. 나도 서울에서 그네들이 작업한 벽화를 많이 봤으면 싶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요?” “처음에 들어온 회원들은 마치 입시미술처럼 정형화된 그림을 보고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죠.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그림 보는 눈이 틔어요. 그림을 그린 사람의 뒷심이 느껴지는 개성있는 그림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신기한 게 그림에도 연륜이 느껴져요. 사십대 분들은 이미 선 긋는 거부터 달라요. 과감하고 거침이 없는 게 이십대들과는 확실히 달라요.”
그림의 대중화를 꿈꿉니다 처음에 작은 책자로 만들었던 소식지 『동백화』는, 지금은 인터넷 웹진으로 발행하고 있다. 벌써 56호씩이나 발행한 『동백화』에 실리는 기사들은 모두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글쓰기로 이루어진다. 마지막 원고 정리도 회원 중에 한 명이 하고 있다. 수채화반과 유화반으로 나누어진 소모임도 회원들이 꾸리고, 야외스케치와 갤러리 탐방도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가끔 아이들이 많이 참여하는 행사에 ‘페이스 페인팅(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해주러 나가기도 한다. 얼굴에 쓰는 물감은 조금 비싼데, 거의 재료비만 받고 해주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서울대병원 소아과병동을 돌며 아픈 아이들의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는 일도 하고 있다. “늦바람에 몸담고 있으면서 어려운신 점이 있다면요?” “크게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회원들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 없어서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어요. 벽화작업이 그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경제적인 여건이 안 따라줘서 못하고 있는데, 저희가 초등학생을 데리고 갤러리 탐방을 다녔던 적이 있거든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저희도 덩달아 즐거웠죠.” 이주연 사무국장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림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팍팍한 현실에서 예술이라는 걸 접하게 되면 사람들 마음이 훨씬 넉넉하고 풍요로워지거든요.” 요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푹 빠져서 산다는 이주연 사무국장은 겸재의 그림이야말로 어떤 유명한 서양화가들의 그림보다 훨씬 현대적이라고 말한다. 일어나는 나에게 이주연 사무국장이 그동안 열었던 전시회 도록을 챙겨준다. 그냥 선 채로 넘겨봐도 도록에 실린 그림 솜씨가 다들 대단하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서 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겨울을 날 준비로 나무들은 스스로 몸속의 물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겠지. 나는 ‘늦바람’ 전시회 도록이 들어있는 가방을 단단하게 고쳐 맸다.
소백산의 잔설이 이른 봄까지 날리던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새학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하던 학교생활에서, 그래도 새학기만큼 매력적이고 가슴 뛰는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옆자리 짝꿍도 바뀌고, 모든 교과목의 담당 선생님들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새학기 첫 번째 한문 시간이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의 한문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칠판에다 흰 분필로 뭔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로 시작하는 이성부 시인의 ‘봄’이라는 시를 단숨에 써내려갔고, 우리는 그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마 그때 교실 창문 밖으로는 겨우내 안달 난 봄이 살금살금 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처음 그녀를 만나고 나서, 스무 살이 넘어서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의 자취방엘 놀러갔던 적이 있다. 그녀가 살고 있던 방에는 책이 굉장히 많았는데, 그 많은 책들 중에서 무심코 빼든 책이 바로 독일의 ‘케테 콜비츠’라는 화가의 판화집이었다. 어찌나 느낌이 강렬하던지,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그날 캄캄한 골목길을 되짚어 나오며 그림이 갖는 힘에 대해 생각하며 온몸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오롯하다.
이라크전쟁을 주제로 삼았던 ‘봄’展 손끝이 시릴 정도로 날이 찬데, 하늘은 깨질 듯이 맑다. 바람이 불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나직나직한 건물들이 들어서있는 동네가 왠지 낯설지 않다. 받침 하나가 떨어져 나간 동네 슈퍼 간판 아래로 호빵이 뜨거운 김을 올리고 있었다. 2층으로 연결된 좁다란 계단을 밟아 올라가서 ‘늦바람’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서쪽으로 난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작업실의 그림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저녁 7시 30분에 열린다는 ‘대중미술강좌 - 불화(佛畵)’편 준비로 작업실에는 이주연 사무국장이 미리 나와 있었다. 작은 공장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성동구에 1997년에 들어온 ‘늦바람’은, 그동안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다. 지금 세 들어 있는 작업실은 들어온지 딱 1년이 됐단다.
1995년 마음이 맞는 작가 두명이서 시작한 ‘늦바람’은, 처음에는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산하에 그림 동호회로 있었다. 그러다 단체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1997년 민예총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시민 미술단체로 꾸려나가게 됐다.
지금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주연 씨도 1997년 ‘늦바람’ 일반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림 수업은 공식적으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진행되지만, 시간이 나는 회원들은 언제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작업실 문은 늘 열려있다. ‘늦바람’은 한 달에 한 번씩 야외스케치를 떠나고, 갤러리 탐방을 다닌다. 두 달에 한 번씩은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서 그림과 관련된 대중강좌를 열
기도 한다. 바로 오늘 열리는 강좌가 대중강좌의 한 꼭지이다. 또 일 년에 한 번씩 정기 전시회를 여는데, 지금까지 모두 일곱 번을 열었다. “통일행사 같은 데 참여하기도 합니다. 재작년 봄이었나 왕십리 문화공원이 새로 생겼을 때, ‘봄’이라는 이름으로 야외전시회를 열었거든요. 봄이라고 해서 예쁜 그림만 전시한 게 아니었어요. 이라크전쟁을 주제로 삼은 전시회였어요. 그렇다보니 구청 공무원과 마찰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그림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건데 뭘 그러냐고 하면서 담당 공무원 전화 몇 번 받고 그냥 계속 전시회 열었어요.” 동그란 얼굴의 이주연 사무국장의 대답이 명쾌하다. 그러고 나서는 회원들이 야외전시회를 좋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회원들은 전시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그림 그리기 방식을 다양하게 모색하게 된다.
늦바람 10주년 기념 전시회도 열었어요 지난 여름에는 ‘늦바람’이 생긴지 10주년 되는 기념으로, 광진문화예술회관에서 ‘우리시대의 풍속화’라는 제목의 전시회와 ‘시민 미술의 모색’이라는 세미나가 동시에 열렸다. 보통 전시회를 열 때 20점 정도의 그림이 걸리는데, 10주년 기념전시회 때는 무려 60점의 그림이 걸리기도 했다. 회원은 들쑥날쑥하기는 하지만 스무 명 정도 되고 대부분 직장인이다.
“그림은 처음에 안 빠지고 석 달 정도는 그려야 좋아지는 것 같아요. 우선 회원이 들어오면 그림보다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공간에 흡수되는 게 좋아요. 그래야 그림 그릴 맛도 나고 그렇죠.” 이주연 사무국장의 말이 맞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게, 늘 사람 관계 속에서 방향들을 잡아나가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화가들이 그림 지도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림을 오랫동안 그려온 초창기 회원들이 그림 지도를 하고 있다. 대중강좌를 통해서 그림의 이론적인 부분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다.
“저기 벽에 붙어있는 은박지들은 뭔가요?”
흰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 얼굴 모양을 한 은박지를 가리켰다. “대중미술 강좌 시간에 한 건데요, 회원들의 얼굴 모양을 뜬 거예요. 서로 짝을 이뤄서 은박지를 대고 상대방의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칭찬을 해주는 거예요.” 어떤 효과가 있냐고 묻자, 이주연 사무국장은 사람의 따뜻한 감촉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고 대답한다.
는 초등학교 벽화작업은 다른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서 프로젝트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다. 벽화작업은 처음 기획부터 제작까지 전적으로 아이들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벽화에 색칠을 할 때는, 설령 그림꼴이 안 나오더라도 동네 꼬마들까지 와서 합세를 하게 된다. 나중에 아이들이 다 돌아간 뒤에 아이들 모르게 ‘늦바람’ 회원들이 뒷마무리를 한다.
성동구에서만 하던 벽화작업을 내년에는 광진구까지 넓혀 볼 생각이다. 역량이 더 모아지면 서울 전역에 벽화작업을 해보고 싶은 큰 꿈도 있다. 나도 서울에서 그네들이 작업한 벽화를 많이 봤으면 싶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인가요?” “처음에 들어온 회원들은 마치 입시미술처럼 정형화된 그림을 보고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죠.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그림 보는 눈이 틔어요. 그림을 그린 사람의 뒷심이 느껴지는 개성있는 그림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신기한 게 그림에도 연륜이 느껴져요. 사십대 분들은 이미 선 긋는 거부터 달라요. 과감하고 거침이 없는 게 이십대들과는 확실히 달라요.”
그림의 대중화를 꿈꿉니다 처음에 작은 책자로 만들었던 소식지 『동백화』는, 지금은 인터넷 웹진으로 발행하고 있다. 벌써 56호씩이나 발행한 『동백화』에 실리는 기사들은 모두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글쓰기로 이루어진다. 마지막 원고 정리도 회원 중에 한 명이 하고 있다. 수채화반과 유화반으로 나누어진 소모임도 회원들이 꾸리고, 야외스케치와 갤러리 탐방도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가끔 아이들이 많이 참여하는 행사에 ‘페이스 페인팅(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해주러 나가기도 한다. 얼굴에 쓰는 물감은 조금 비싼데, 거의 재료비만 받고 해주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서울대병원 소아과병동을 돌며 아픈 아이들의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는 일도 하고 있다. “늦바람에 몸담고 있으면서 어려운신 점이 있다면요?” “크게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회원들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 없어서 늘 미안한 마음이에요. 시민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어요. 벽화작업이 그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경제적인 여건이 안 따라줘서 못하고 있는데, 저희가 초등학생을 데리고 갤러리 탐방을 다녔던 적이 있거든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저희도 덩달아 즐거웠죠.” 이주연 사무국장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림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팍팍한 현실에서 예술이라는 걸 접하게 되면 사람들 마음이 훨씬 넉넉하고 풍요로워지거든요.” 요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푹 빠져서 산다는 이주연 사무국장은 겸재의 그림이야말로 어떤 유명한 서양화가들의 그림보다 훨씬 현대적이라고 말한다. 일어나는 나에게 이주연 사무국장이 그동안 열었던 전시회 도록을 챙겨준다. 그냥 선 채로 넘겨봐도 도록에 실린 그림 솜씨가 다들 대단하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서 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겨울을 날 준비로 나무들은 스스로 몸속의 물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겠지. 나는 ‘늦바람’ 전시회 도록이 들어있는 가방을 단단하게 고쳐 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