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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빨리 내리는 겨울저녁, 일민미술관 5층 영상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방송국’ 박경주 대표는 짧은 커트머리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이였다. 그곳에는 박경주 대표 말고도 방송국 친구들 여러 명이 컴퓨터 앞에서 사진 파일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 10월부터 영상미디어센터의 후원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이주노동자 시민기자 양성을 위한 미디어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리며 그네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친자매들처럼 다정하고도 정답다. 기다리는 친구들은 금방 도착하질 않는다.
다국어 라디오방송 계획하고 있어요
외국인상담소에서 태국어 통역을 하고 있는 쥴리아는 한국에 온 지 12년이나 됐다. ‘이주노동자방송국’에서 매주 화요일 밤 10시에 ‘렝안타이의 즐거운 편지’를 진행한 지 6개월이 됐다. 처음 방송할 때는 무척 긴장되고 떨렸다던 쥴리아는 태국음식점을 경영한 경험도 있다. 한국에서 만나 쥴리아와 친구가 된 오라니는 한국에 온 지 7년 된, 헤나 염색 일을 하는 주부다. 헤나 염색을 배우고 싶어 하는 수강생이 있으면 강습도 하는데 겨울철은 비수기다. 결혼 6년차라는 오라니는 서른셋이나 됐다는데 아직 앳된 얼굴이다.
의정부에 산다는 차우는 베트남에서 왔다. 긴 생머리를 얌전하게 묶은 그녀는 말할 때 수줍어하기는 했지만 야무져 보였다. 차우는 미디어교육을 받은 후 나중에 다국어 라디오방송에서 베트남어 라디오 진행을 맡을 예정이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홈페이지 들어가 보고 알았어요. 한국에 나와 있는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을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싶어요. 그래서 함께하게 됐어요.” 차우는 느리기는 하지만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태국에서 온 지 4년이 된 파나타는 CCTV를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 듬직한 맏언니 같은 그녀는 미디어교육을 받고 난 뒤 영상팀에 합류할 예정이다. 버마 NLD (버마민주민족동맹)활동가 조나잉은 과묵해보였다. 한국에 사는 이주노동자 중 버마에서 온 사람들은 3,000여 명 정도로 그리 많지가 않단다.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이 나중에 모두 자신의 나라 말로 하는 다국어 라디오방송에 합류할 예정이에요.” 함께할 친구들에게 둘러 쌓여있는 박경주 대표의 표정이 뿌듯해 보인다. “처음 이주노동자방송국을 만들 때부터 다국어 라디오방송을 계획했던 건가요?”
“처음에는 한국어 사이트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독립할 수 있는 사이트는 독립을 해서 각 사이트의 연대체가 되는 거예요. 각 사이트에 올라오는 뉴스들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는 거죠. 그렇게 대안적인 국제뉴스가 되고, 꼭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친구들도 기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해서 인터넷 대안언론으로 자리 잡고 싶어요.” 나중에 자신의 고향으로 간 이주노동자 친구들이 고향에서 소식을 올릴 수도 있을 거라고 박경주 대표는 덧붙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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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대안언론으로 자리잡고 싶어요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한 뒤, 1992년 독일로 가서 영화와 사진을 공부한 박경주 대표는 2001년 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이주노동자방송국’을 만들게 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아지려면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미디어에서 잘못 비춰지기도 하고요. 그런 걸 어떻게 하면 보완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독립적인 매체를 만들자 싶었어요. 인터넷이 국경을 넘듯이 이주노동자 문제도 국경을 넘는 문제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가능성이 많을 것 같아서 인터넷 라디오방송국을 만들게 된 겁니다.”
원래 문화활동가였던 박경주 대표는 처음에 전민성 기자와 게릴라사이트를 기획했었다. 전민성 기자는 기사를 쓰고, 박경주 대표는 영상을 담당하기로 했었다. 준비하고 고민하던 중에 다국어 라디오방송국을 기획하게 되었고, 이주노동자 친구들에 대한 미디어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박경주 대표는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했던 게 지금 출판 사업에 도움이 되고, 사진과 영화를 공부한 것도 방송일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진보넷에서 서버 지원을 받고 있지만, 방송국 운영 자금은 부족한 실정이다. 그래도 올해는 미디어교육으로 신청한 기금을 받기로 되어 있어서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하지만 앞으로 보다 견고한 운영자금의 확보가 필요하다. 인터넷언론으로 『이주노동자』라는 정기간행물도 등록했다. 계간 『이주노동자』는 한 번 발간했고, 이제 곧 두 번째 책이 나올 예정이다. 아무래도 인터넷언론이다 보니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타블로이드판 종이신문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뿌린다. 첫 번째는 1만 부나 찍어서 거의 다 돌렸다.
이주노동자방송국 홈페이지에는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잭의 만평(그림일기) 코너가 있다. 2005년 8월 27일자 잭의 그림일기에는 “빨래걸이, 수도꼭지, LPG가스통, 모든 것을 갖춘 생활이지만 단속에 의해 주인과 헤어질 수도 있는 물건들입니다.”라는 말이 있다. 알록달록한 빨래가 널려 있는 그림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는데, 늘 그들은 언제 단속반에 걸려서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살고 있는 것이다. 잭의 글을 읽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는 태국에서 그림을 전공한 오라니가 잭과 함께 이주여성노동자의 애환을 풀어갈 예정이다.
올봄에는 사무실이 생길 거예요
아직 사무실이 없는 이주노동자방송국은 라디오 진행자들이 각자의 집에서 윈앰프방송을 통해 녹음을 하고 인터넷을 통해 방송을 내보낸다. 거의 대부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데, 생업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밤늦게 방송을 하기란 사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방송을 한 시간 꽉 채워서 하던데, 쥴리아 씨는 진행하면서 어려운 점이 없으세요?” “처음이라 사실 다 어려워요. 방송 들으시는 분들이 얼마나 이해를 할까 궁금해요. 홈페이지에 덧글 올라오는 거 답변하기도 어렵고요.” 직접 한국말로 덧글에 답변을 한다는 쥴리아의 말에 조금 놀랐다. 그때 막 오늘 밤 10시에 방송이 있는 수레스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동그란 얼굴에 잔뜩 웃음을 머금은 수레스에게서 바람 냄새가 난다.
“수레스 씨는 한국에 온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주 오래 됐어요.” 수레스는 ‘아주’라는 말을 길게 발음한다. 한국에 온 지 14년이 된 수레스는 경기도 오산에 살고 있고, 한국 사람과 결혼해서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이 있다. 매주 토요일 밤 10시에 방송을 하고 있는 수레스는 한국말에 능하다. 수레스를 만난 박경주 대표는 당장 오늘밤 방송을 걱정한다. 걱정 말라는 수레스의 말에는 그동안의 경험이 묻어난다. “방송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일하고 나서 밤에 방송하다 보니까 그 점이 제일 어려워요.” 이주노동자방송국은 2004년 11월에 만들어져서, 작년 5월 18일에 개국했다. 봄에는 홍대입구 쪽에 사무실도 하나 마련할 계획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합법 이주노동자들이 됐으면
사무실을 얻고 나면 그곳에서 라디오방송을 녹음할 계획이다. 올해 다국어 라디오방송이 안정된 뒤에는, 출판사업에도 주력할 생각이다. 출판국에서는 동화책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앞으로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전망을 어떻게 보냐고 박경주 대표에게 물었다. “소수의 문제를 다룬 독립미디어다 보니 갑자기 대중성을 확보하기란 어렵겠지요. 앞으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문제가 어떻게 풀리는지에 따라서 저희 이주노동자방송국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박경주 대표의 말이 끝나자 수레스가 한마디 거든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생기기 전에는 이주노동자 소식을 많이 들을 수 없었거든요. 이제 다국어방송이 되면 다른 친구들도 많이 듣게 되고, 좀 더 활발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 한국에 40만 이주노동자들이 있는데, 그중 50%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에요. 모두다 합법 이주노동자가 됐으면 좋겠고요. 앞으로도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막 인도네시아에서 온 하디와 데니스가 들어선다. 그리고 전민성 기자가 마지막으로 왔다. 그렇게 모두 열 명의 친구들이 모이니 교실이 꽉 찬다. 집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고 수레스의 방송을 듣는다. 볼륨을 높이자 ‘이주노동자방송국’ 로고송이 나온다. ‘들어봐요 평등 세상 차별 없는 세상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미래 이주노동자방송국 우리 함께 해요.’ 우리 모두의 바람대로 정말 평등한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이른 봄까지 소백산자락에 눈이 날리던 지방에서 나고 자랐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꿈이며, 다큐멘터리가 힘을 갖는 세상을 기다린다.
글 류인숙 사진 황석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