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평화를 위한 순례 [유은하]
전쟁과 평화는 여전히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화두이다. 인간 역사에서 유례없는 참혹한 세계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 20세기를 거쳐 온 인류는 냉전이 종식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열망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인류는 ‘인종 청소’라는 새로운 단어를 등장시킨 구 유고슬라비아의 잔혹한 내전과 9·11 테러로 촉발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또 겪어야만 했다.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초강대국의 힘의 논리를 관철시킨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은 영원한 평화에 대한 열망을 현실과 유리된 한갓 사치스런 감정처럼 보이게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은 자신의 추악한 전쟁을 세계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응징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전 세계에 전파하려는 고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정당성을 부여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이 결코 강자의 이익 관철을 위한 가면으로 전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이라크에서 반전평화활동을 하고 온 유은하(29) 씨를 만나 보았다.
그의 첫인상은 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갔다 온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렇듯 큰 용기를 주었는지 궁금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이슬람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해 아랍문학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고, 기독교인으로서 거대한 종교집단에 대해 관심도 많았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호감이었으나 정이 느껴졌습니다.
아랍문학을 비교해 보고 싶은 학문적 욕구와 신앙인으로서 선교활동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1993년 말부터 이슬람권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종국에는 아랍 전문가가 되고 싶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슬람권에 학문과 종교적으로 관심 많았어
이라크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지난 해 초에 이슬람권에 가겠다는 그의 계획은 앞당겨졌다. “나중에 준비가 되어서 선교하러 갔을 때, 그들이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반전운동의 흐름도 역사도 잘 몰랐습니다. 가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전쟁터로 이끈 그의 신앙심은 이라크 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생사를 함께 한 보기 드문 고귀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3월 7일 또는 3월 15일 전쟁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지난 해 3월 6일 그는 일단 요르단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요르단 주재 이라크 대사관을 찾아가 이라크 비자를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한 그는 마침내 평화운동비자를 얻어 이라크 바그다드에 3월 14일 아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전쟁이 발발한 3월 20일까지 피켓시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반전활동을 각 국의 동료들과 함께 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민간인 피해자들을 만나 피해 사례들을 수집했고, 이것들을 미국에 보내 전쟁의 부당성과 비인간성을 알리는데 힘을 보탰지요.” 이라크 정부는 민간인들과의 접촉을 통제했으나,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현장이나 피해자가 있는 병원의 출입은 허용했다. 또한 전쟁 중에는 물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여, 바그다드의 한 정수장에서 캠프를 차려놓고 거기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겪어 본 전쟁은 그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내일 아침을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천신만고 끝에 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를 너무도 힘들게 했다.
이런 두려움과 무기력의 심연으로부터 그를 헤어나게 해 준 것은 같이 활동하던 경험 많은 반전평화활동가들이었다. 처음 폭격이 시작되었던 새벽에 같이 있던 동료는 “은하야. 차를 마셔라. 너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지 말 것을 충고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위험한 상황에서 그는 자기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한 끝임 없는 기도를 통해 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용기를 줘
4월 9일 마침내 미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바그다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숙소인 알 파나르 호텔로 달려가 ‘전쟁은 해결책이 아니다’가 적힌 반전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에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한 용기를 내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고 시위를 했다. 그러는 사이에 뒤에 있는 탱크로부터 포탄이 한 발 날아왔다.
“현수막을 들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려 왔습니다. 어제 미군이 대포를 쏘아 우리 숙소 맞은편의 팔레스타인 호텔에 있던 두세 명이 죽었던 게 기억났습니다.” 그는 무척 겁이 많고 복잡하고 감성적인 성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집착이 없어지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지요.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의지가 생기더군요.”
그 후 미군 탱크들로 막혀 있는 도로 한복판에 최병수 씨의 걸개그림 <야만의 둥지>를 깔아 놓고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연좌시위를 시작했다. 중무장한 미군들이 뭐하는 거냐고 묻자, “이거 그린 한국 사람이 이 그림을 시위용으로만 쓰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시위하고 있어요.”라는 동료의 대답을 들으면서 무척 유쾌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의 종전 선언으로 외국인 동료들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그는 장애인 시설을 중심으로 구호활동을 하다, 지난 해 5월 말에 1차 귀국하였다. 장애인 봉사활동을 같이 할 팀을 꾸려 6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 구호활동을 했고, 8월 초에 귀국했다고 한다.
이라크에 갔다 온 것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후회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장의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4개월 동안 40년을 압축해서 경험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묻자, “달라졌습니다. 선교사란 말로 예수를 믿어라가 아니라, 자기가 선교해야 할 나라의 사람들을 삶과 죽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 심한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라크가 주는 정신적 상흔이 있습니다.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습니다. 같이 아픔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같이 울어주기라도 해야 마음의 짐을 벗을 것 같은데…….” 지난 해 9, 10월에는 한때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으며, 탱크나 군인을 보면 슬픔, 두려움, 외로움, 무력감, 미안함 등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고 한다.
육체적으로도 많이 허약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한국군 파병 논의를 보면서 파병을 반대하는 기자회견도 하고 청와대 앞 일인시위 그리고 각종 강연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이라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건강이 좋아지면 이라크에 다시 가고 싶어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전쟁이란 여전히 인간사에서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을 구별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입장과는 달리 전쟁을 악으로 보고 모든 전쟁을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냉엄한 현실을 도덕과 정의를 포기하는 핑계로 삼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영혼의 깊이가 얼마나 천박한 지를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라크 침략 전쟁의 승자로 자부하는 미국은 이라크에 해방과 자유를 부여했다며 자신의 부당한 전쟁을 은폐하려 하지만, 이라크의 패배가 곧 정의의 승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라크 전쟁의 진정한 패자이자 희생자 중의 하나는 강자의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된 정의와 도덕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런 비애는 유은하 씨와 같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적인 사랑이 없다면 사람들을 강자 숭배와 냉소주의로 내몰아 비인간적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전환될 수도 있다.
자유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되는 것처럼 평화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황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