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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생명의 기록. 故 송건호 선생의 기증자료

잊혀져 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생명의 기록. 故 송건호 선생의 기증자료


1975년 유신의 칼바람에도 직필을 놓지 않았던 동아일보 기자들의 강제 해직에 책임을 지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해직 당했다. 아니 그는 해직 당한 것이 아니라 언론자유를 외친 젊은 기자들을 해직하라는 사주의 압력에 저항하여 젊은 기자들이 해직되기 전 날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돈이 없어 술과 담배를 배우지 못했다던 사람, 속세와 타협하지 않고 한길을 가려면 자기 주변 정돈을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던 사람,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많은 말을 늘어놓지 않았던 사람, 그는 절대 침묵과 고독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故 송건호 선생은 언론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는 언론계의 거목다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4년 대학 재학 시절부터 조선일보 기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 자유신문, 경향신문을 거쳐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까지 20여 년을 언론계에 몸담고 있었다.
동아일보 사태 이후에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가, 1978년부터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KNCC) 인권위원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의 기증자료 중에는 1970, 80년대 KNCC 관련 일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하 민언협)를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월간지 『말』을 창간해 보도지침사건(1986년) 등을 폭로했으며,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해 초대 사장과 발행인을 역임했다. 하지만 의외로 민언협 관련 자료와 한겨레신문 관련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으로 인한 잦은 이사와 독재정권으로부터의 감시와 탄압 과정에서 압수당하고 분실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역사를 남기는 것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지 깨닫게 해 주는 대목이다.


동아투위 관련 자료와 각종 신문 스크랩 


 

 

 

 

 

 

 

그의 소장자료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관련 유인물이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각종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아투위 관련 유인물은 민주화운동사에서, 특히 언론운동사에서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활동사진이나 내부 자료 등이 없는 점은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그의 육성자료가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큰 공백을 남길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그의 활동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는 관련자들의 구술과 구속과정에서 압수당한 자료에 대한 반환운동을 통해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사업회의 과제이기도 하고 역사적 과제이기도 하다.
故 송건호 선생의 기증자료 중 또 눈에 띠는 것은 각종 신문 스크랩이다.
특히 하지 군정과 남로당 그리고 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 관련 스크랩 등은 여러모로 활용 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꼼꼼함과 역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신문스크랩의 보존상태와 종이상태는 매우 불량하기 때문에 참고자료로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가 선별을 거쳐, 적절한 보존 처리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기록을 복원하고 종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복원하고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보존하는 것이기에 시급히 필요한 일이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1987년 6월항쟁의 감격적인 승리 뒤에 도적같이 찾아온 대선 패배의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 한겨레는 이 한마디를 건네며 국민에게 다가갔다. 창간 발기인 3,342명, 창간 주주 27,052명으로 시작한 한겨레신문은 감격 그 자체였으며 한국 사회 참언론의 포문을 열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실천하는 언론인 故 송건호 선생이 서 있었다.
당시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계에서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모금에 의한 신문 창간 소식이 알려지자 그간 수십 명의 외신기자들이 찾아왔고, 우리 역시 억누를 수 없는 감격으로 전혀 새로운 신문의 제작에 창조적 긴장과 흥분으로 이 날을 맞이하였다.”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 감격하던 모습, 해직된 동아일보 후배기자들을 편집국에 되돌리라 호령하던 모습은 이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의 정신과 삶은 기록을 통해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때문에 그가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던 구절이, 살아남은 우리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르는 것이다.


국민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처음 신문사에서 나와 굶어 죽을 것 같은 죽음의 공포가 매일 나를 괴롭혔지. 아이들을 보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던 겨. 우리 큰 딸애가 학업도 중지하고 돈 벌러 나가야 했고…… 지금도 큰딸에겐 빚을 진 기분이여. 사실 돈이 무서워. 다들 의로운 마음을 가졌다가도 돈에 져서 뜻을 바꾸었거든……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둔감해진 거여. 죽음의 공포가 찾아드는 간격이 길어지더니 한 십년 지나니까 둔감해졌어…… 그리고 아무도 굶어 죽지 않았지.”
동아일보사태로 인한 사직 이후 그의 부인은 행상에 나섰고, 그의 딸들은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고, 그는 청탁원고에 근근하면서도 유신의 마수에 흔들림 없이 민주주의와 참언론을 위해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신과 가족 모두가 겪어야만 하는 가난과 핍박의 고통을 모를 리 없음에도 그는 꿋꿋하게 한 길을 걸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파킨슨병을 앓던 그는 1997년 이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투병생활을 하던 중 2001년 1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민주주의와 참언론을 저버리지 않아


30여 년의 군사독재 시절은 철저한 은폐와 조작의 역사였으며, 객관적 기록 파기의 역사였다. 수많은 반정부인사, 무고한 학생과 지식인, 장기수들을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공안당국의 회의 내용과 행동들은 모든 공식, 비공식 기록물에서 자취를 감췄다. 개인적인 일기와 메모, 민주화운동 관련 문건과 자료들이 무조건 압수되고 파기되었다. 이렇게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되어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故 송건호 선생의 자료는 삐뚤어진 그 역사를 바로 잡는 진실의 기록이며, 잊혀져 가는 역사를 되살리는 생명의 기록이며, 역사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이런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故 송건호 선생의 부인 이정순 여사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유영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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