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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역은 고속철도(KTX)가 생긴 이후 서울역과 맞먹는 번잡함이 생겼다. 열차 노선에 따라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것과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것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력에 써 있는 숫자가 아직은 겨울바람을 느낄 때가 아닌데 KTX 여승무원들이 250일 넘도록 파업을 하고 생활하는 한국철도공사 노조 사무실로 가는 용산역 뒷길은 눈물이 날 정도로 바람이 매섭다.
담을 넘지 못하는 그
두어 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에 민세원(34) KTX 열차승무지부장이 전기장판을 깔고 앉은 자리에서 누군가와 쉼 없이 통화중이다. 통화 도중 수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있기 무섭게 핸드폰 벨이 또 울린다. | 지난 9월 노동부의 불법 파견 재조사 결과가 ‘100% 합법은 아니지만 종합해보면 적법파견’이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200일 이상 파업을 벌이던 노조원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렸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고 노조원들을 추슬러야 하는 민 지부장의 역할이 분주해질 만하다. “컨테이너 박스가 여름엔 덥고 지금처럼 겨울엔 춥죠. 불편한 거요? 수배 중이라 밖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것 빼고는 견딜 만 해요. 더구나 같이 생활하는 동생들도 있고 이 정도는 뭐……. 저 건물 사무실에서 공동으로 숙식하는 승무원들도 있는데요.” 현재 남아있는 KTX 승무원들은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모든 일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말대로 2층 사무실에 올라가보니 그곳은 수 십 명의 젊은 여성들이 겨울을 나기엔 부족한 환경이었다. 그는 대한항공의 스튜어디스, 승무원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그만두고 쉬다가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때마침 KTX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한국철도공사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KTX 여승무원들을 모집했다. 민 지부장은 그때 철도 노동자가 되었다. “대한항공 다닐 때는 제 스스로가 노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솔직히 이전의 제 생각은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 이른바 ‘노가다’라고 표현하는 이들에게만 노동자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줄 알았죠. 그런데 KTX 승무원이 되고 나서 제 스스로가 노동자라는 걸 알게 됐어요.” 실제는 항공사 승무원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노동자였는데, 다만 인식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차이일 뿐이라며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제자리를 찾았을 뿐이라고 한다.
공기업이 앞장서 비정규직 양산
KTX 여승무원에 지원한 이들 중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 시험 준비를 하던 이들도 꽤 있었다. 그래서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고 실제 항공사 승무원을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친구들이 많이 지원을 하게 됐다. “KTX 1기 승무원으로서 자부심과 긍지, 꿈을 안고 입사한 저희들에게 철도공사와 그 자회사가 약속한 것은 정년을 보장하고 항공사 승무원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노골적인 사탕발림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승무원으로 합격한 사람들까지도 KTX 1기 승무원으로의 비전을 보고 승무원직을 선택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문서화하지 않은 구두약속이기 때문에 유효하지 않다고 발뺌하는 것은 사기업도 아닌 공기업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는 KTX 승무원이 되기 전, 비정규직을 단순히 정규직보다 급여수준이 낮고 계약서를 쓰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당장은 계약직이었지만 KTX가 존재하는 한 승무원은 필요한 만큼 정규직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고 더욱이 최근 항공사 승무원도 2년 인턴제로 운영하고 있어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KTX 승무원이 되고 나서 비정규직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사용자의 언행을 당하고도 비정규직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계약이 안 되거나 해고가 두려워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해도 급여는 정규직의 4~60% 수준을 받고 KTX 여승무원이 일한 것을 같은 열차에서 함께 일한 남자 승무원인 철도공사 열차팀장이 일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제출하면 실제 일을 한 여승무원들은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지난해 노조를 만든 후 결코 짧지 않은 지루한 싸움을 하며 지금 여기까지 온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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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인식한 사람이 먼저 행동 한다
인터뷰가 한창 진행되는 데 컨테이너 박스의 현관문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수시로 열린다. 그때마다 오전 집회 일정을 나가는 승무원들이 민 지부장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하나같이 ‘지부장’이란 호칭보다는 ‘언니’ 라는 호칭이 먼저 나온다. “저희 승무원들 중에는 학생운동을 했거나 노조 경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말씀드렸듯이 ‘노동자’라는 개념 자체도 열차승무원이 되고 나서 바로 보기 시작한 것처럼 지난해 노조를 만들 때는 제가 승무원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고 항공사 근무 경력도 있고 하니까 어린 친구들이 언니처럼 의지하기 시작해서 이 일을 맡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저도 고민을 하던 중이었어요. 재계약도 정규직 전환도 안 되는 상황에서 굳이 다녀야하나 아니면 여기서 뭔가 바꿔보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였죠. 결국 후자를 선택하게 된 거죠.” 농성 시작과 함께 삭발을 한 그의 머리를 보고 싶다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진을 좀 사실적으로 찍자는 말을 했더니 기겁을 한다. 듬성듬성 자라 정리가 안돼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모습을 사진으로 보이면 더 솔직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단호하게 그렇지만 상대방에게 정중한 표현으로 거절을 한다. 그는 결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없는 그야말로 신혼이다. 남편 되는 이가 언제 왔냐고 했더니 처음 시작할 때 한 번 오고는 오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떨어져 지내는 것도 아프지만 오래갈수록 힘들고 지치는 게 노동자들로선 가장 약점이 될 수도 있다며 오히려 철도공사 측에서는 이런 노동자들의 아픈 구석을 노리는 건 아닌가라는 말을 한다. “처음 이철 사장님이 사장으로 온 다고 했을 때 저희는 정말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하는 말이나 운영하는 것을 보면 사형 선고까지 받고 과거의 민주투사였던 분이 현실적으로는 참 다르구나. 오히려 저희로선 실망감이 더 컸죠. 자신이 목숨을 바쳐 운동했던 것과 생계를 쥐고 있는 노동자의 인권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는 듯 해요.” 민 지부장은 한국철도공사 이철 사장에 대한 경력을 KTX 승무원이 되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먼저 인식한 사람이 먼저 행동해야한다.”며 민 지부장은 지금은 모두 한 곳을 보고 한 길을 가고 있지만 똑같이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조합원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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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희망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KTX 여승무원들이 경제적, 심리적인 이유로 농성장을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민세원 지부장은 단호하게 한마디를 던진다. “젊은 여성들의 자존심이 대가 없이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올바른 사회가 아니죠. 우리는 이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민 지부장을 그 복닥거리는 건물 안에서 요리 조리 세워 놓으면서 문득 방현석의 소설 「새벽출정」이 떠올랐다. 여공들이 노조를 만들어 농성을 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 20년 전 우리 공단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신분만 바뀐 여성노동자들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그때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글, 사진 황석선 stonesok@kdemo.or.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