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용수 선생의 8,90년대 민주화운동 사진필름 8만 7천여 점이 지난해 연말 사업회에 기탁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 기록에서 박용수 선생의 사진이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어떤 수식어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용수 선생이 80년대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을 뛰어다니며 찍은 사진들에는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열기와 함성, 용솟음치는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만큼이나 집회와 투쟁이 많았던 80년대에 2,30대의 젊은 나이에도 일일이 참여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집회와 시위마다 박용수 선생은 50대의 나이에 사진기를 둘러메고 어김없이 그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사진은 정직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에서 피사체의 각도와 구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어느 순간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엄청나게 바뀐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지 사진작가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진작가의 눈과 마음가짐이 사진의 모습을 좌우하는 것이리라.
박용수 선생이 민주화운동의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은 민주화운동 기록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기이자 큰 행운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단지 관제언론과 경찰의 렌즈가 아닌 민주화운동진영 스스로의 사진이어서만이 아니라 박용수 선생 자신의 삶과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애정이 담긴 사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애정이 담긴 그의 사진들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스스로의 투쟁기록을 본격적으로 사진으로 남기게 된 것은 80년대 민주화운동 역량의 발전과 전국과 지역을 총망라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글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박용수 선생이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민통련이 만들어진 때부터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서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박용수 선생은 그때부터 민통련 보도실장을 맡아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의 집회 현장을 뛰어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80년대의 수많은 집회 때마다 사진기를 메고 투쟁현장을 누비던 박용수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박용수 선생이 기록한 사진에는 80년대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투쟁의 현장들, 민주화운동 투쟁과정에서 마주했던 정겹고 그리운 얼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의 사진은 단지 투쟁현장의 기록에 멈추지 않는다.
유난히도 분신 등의 사건이 많았던 80년대, 분신사건이 벌어지면 항상 박용수 선생이 뛰어갔고, 젊은이들의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며 때론 부검 현장까지 그 순간들을 기록했다.
민통련 때부터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담아
자그마한 키에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집회현장과 시위대열을 뚫고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린아이 같이 환한 웃음을 웃곤 했지만 이내 사진에 열중하던 박용수 선생. 박용수 선생이 청소년 시절 장티푸스로 소리를 잃은 사실과 국내 유명한 사진관의 유능한 사진가였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시인이자 한글학자라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박용수 선생이 8,90년대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이 남의 사무실 한 모퉁이나 창고 한구석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사진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지금도 역시 어렵게 생활하며 남은 열정을 우리말 살리기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기에 그의 사진은 그의 시심(詩心)과 언어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정확하며 민주화운동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삶만큼이나 맑고 정직하다.
우리말 살리기를 위해 애쓰고 있어
선생의 민주화를 위한 뜨거운 애정과 8,9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이 담긴 소중한 사진들을 기탁해 주시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박용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사업회에서는 이 사진들이 잘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용수 선생의 8,90년대 민주화운동 사진필름 8만 7천여 점이 지난해 연말 사업회에 기탁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 기록에서 박용수 선생의 사진이 가지는 엄청난 중요성과 소중함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어떤 수식어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용수 선생이 80년대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을 뛰어다니며 찍은 사진들에는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열기와 함성, 용솟음치는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뜨거운 민주화의 열기만큼이나 집회와 투쟁이 많았던 80년대에 2,30대의 젊은 나이에도 일일이 참여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집회와 시위마다 박용수 선생은 50대의 나이에 사진기를 둘러메고 어김없이 그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사진은 정직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에서 피사체의 각도와 구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어느 순간을 포착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엄청나게 바뀐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지 사진작가의 기술뿐만 아니라 사진작가의 눈과 마음가짐이 사진의 모습을 좌우하는 것이리라.
박용수 선생이 민주화운동의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은 민주화운동 기록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기이자 큰 행운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단지 관제언론과 경찰의 렌즈가 아닌 민주화운동진영 스스로의 사진이어서만이 아니라 박용수 선생 자신의 삶과 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애정이 담긴 사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애정이 담긴 그의 사진들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스스로의 투쟁기록을 본격적으로 사진으로 남기게 된 것은 80년대 민주화운동 역량의 발전과 전국과 지역을 총망라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의 탄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글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한 박용수 선생이 민주화운동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민통련이 만들어진 때부터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서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박용수 선생은 그때부터 민통련 보도실장을 맡아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의 집회 현장을 뛰어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80년대의 수많은 집회 때마다 사진기를 메고 투쟁현장을 누비던 박용수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박용수 선생이 기록한 사진에는 80년대의 크고 작은 사건들과 투쟁의 현장들, 민주화운동 투쟁과정에서 마주했던 정겹고 그리운 얼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의 사진은 단지 투쟁현장의 기록에 멈추지 않는다.
유난히도 분신 등의 사건이 많았던 80년대, 분신사건이 벌어지면 항상 박용수 선생이 뛰어갔고, 젊은이들의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며 때론 부검 현장까지 그 순간들을 기록했다.
민통련 때부터 투쟁현장을 사진으로 담아
자그마한 키에 마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집회현장과 시위대열을 뚫고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린아이 같이 환한 웃음을 웃곤 했지만 이내 사진에 열중하던 박용수 선생. 박용수 선생이 청소년 시절 장티푸스로 소리를 잃은 사실과 국내 유명한 사진관의 유능한 사진가였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시인이자 한글학자라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박용수 선생이 8,90년대 민주화투쟁의 과정에서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이 남의 사무실 한 모퉁이나 창고 한구석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사진작업을 해왔다는 사실을, 지금도 역시 어렵게 생활하며 남은 열정을 우리말 살리기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기에 그의 사진은 그의 시심(詩心)과 언어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정확하며 민주화운동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삶만큼이나 맑고 정직하다.
우리말 살리기를 위해 애쓰고 있어
선생의 민주화를 위한 뜨거운 애정과 8,90년대 민주화운동의 현장이 담긴 소중한 사진들을 기탁해 주시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박용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사업회에서는 이 사진들이 잘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