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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주기를 맞아 다시 보는 전태일의 인간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지 올해로 35주기를 맞았다. 열사가 떠난지 35년 만에 청계천변 평화시장 앞길에 조성된 ‘전태일 거리’에는 그의 ‘사랑’ 정신을 이어줄 동판 블록 6,000여 개와 열사상이 세워져 후대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전태일의 ‘사랑’ 메시지를 만나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사업회에 남겨져 있다.
바로 전태일의 일기장과 그가 남긴 글들이다. 전태일이 언제부터 일기를 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것은 1967년경 평화시장 시절부터이다. 사업회가 주관한 2002년 민주화운동 역사전시회에 전태일기념사업회 측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시를 하면서 전태일 일기장 사본을 사료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전태일 일기장과 수기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1988, 일기·수기· 편지모음)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열사가 자필 일기장 속에 적어 내려간 그의 사소한 일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그를 느끼게 한다.
전태일 일기장에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평화시장의 실태조사 설문지, 사업계획서, 행정 기관에 보내는 진정서 등 노동 속에서 고민하는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신을 바친 노동자
전태일은 1948년 대구의 그다지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965년경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재단보조)’로 취직하면서 고된 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재단보조를 거쳐 서울에 올라온지 2년이 지난 1967년 2월 그는 재단사가 될 수 있었다. 재단사가 되었지만, 생활은 더 나아지지 않았으며, 그가 일하던 사업장의 사장은 겉으로는 칭찬을 하면서 속으로는 어떻게 더 일을 부려 먹을까하는 궁리만 했다. 전태일의 고뇌는 이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 1967년 3월 16일 일기 중에서 -

평화시장 재단사이자 노동자인 청년 전태일은 기계처럼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의 어두운 절망과 분노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전태일은 그 일기에서 3년 뒤에 있을 강력한 결연을 암시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 1970년 8월 9일 일기 중에서 -


그 순간에 던졌던 전태일의 몸과 마음이 이미 이 날의 결단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 분신의 의미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6가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기의 몸을 불사른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전태일 분신 사건’이다.
노동자의 분신, 투신, 자살은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되어 노동운동에서 투쟁수단의 하나가 되어 왔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은 민주노조 운동의 원년이 되었다. 이후 1970년대 노동운동은 청계피복 노동조합, 동일방직 노동조합, 반도상사 노동조합, YH 노동조합 등 각종 민주노동조합들의 결성과 불굴의 투쟁으로 활성화 되었다. 유신정권의 탄압과정에서 발생한 1976년 2월의 ‘방림방직 사건’, 1976년 4월의 ‘인선사 유령노조사건’, 1977년 9월의 청계피복노동자 투쟁, 1978년 2월의 ‘동일방직 오물사건’ 등은 긴급조치 9호 하에서 민중운동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얼마나 강도 높게 전개되었는가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촉발된 노동운동의 조직화는, 1980년대 전반기 소모임 운동 등을 통해 확충돼 나갔고 그 일환으로 민주노조의 건설과 재건을 위해 광범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1983년 말의 ‘살인명부(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을 시발로 하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 ‘청계피복노동조합’의 복구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대우어패럴 노동조합’등 민주노조가 군사정권과 기업가들의 방해 시도에도 속속 결성을
하게 된다. 뒤이어 수많은 노조의 결성과 결성을 위한 투쟁의 정점에서 1985년 6월의 ‘구로동맹파업’이 발생한다.

그리고 6월항쟁으로 군사정권의 억압적인 통치체제가 균열되는 바로 그 시점에, 노동자 대중의 광범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된다. 7~9월 동안에 전국의 4,000여 개 기업체에서 270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대중적인 파업과 농성, 시위에 참가하였고, 6·29선언 이후 10월까지 결성된 신규 노동조합은 1,100여 개에 이르렀다. 19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사실 50년대 분단의 고착화 속에서 노동계급 등 기층 민중들은 ‘침묵’과 방어적 생존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신은 국가 폭력에 맞서는 집단이 단순히 학생이나 지식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실제 이후 노동자들의 희생은 보다 적극적인 저항의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적극적인 희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전태일의 정신은 계속돼야
전태일이 우리 곁을 떠난지 35년이 흘렀다. 전태일 열사는 1960~70년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선성장 후분배라는 지배논리로 소외된 노동자, 민중의 권리 증진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바쳤으며, 전태일 열사의 ‘사랑’ 정신은 우리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한 노동자의 일기장에서 우리는 한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숭고한 ‘사랑’ 정신을 배우게 된다. 최근 청계천 복원 공사로 조성된 ‘전태일거리’의 기념조형물 등을 뛰어 넘어 전태일의 ‘사랑’ 정신은 기념사업으로 보다 구체화되어 후대에 널리 이어지기를 바란다.

 
 
<한만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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