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1일 통일운동가 김병권 선생이 타계했다. 3일 후에 거행된 민족통일장에서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조시를 통해 “이제 당신이 꿈꾸던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 꿈, 자립된 평화의 나라를 만들려던 꿈, 가난과 소외가 사라지는 해방된 사회의 꿈을 우리가 대신 지고 가겠습니다.”라며 선생의 죽음에 애석함을 표시했다. 김병권 선생이 한평생 이 땅에서 이루려했던 꿈을 편안히 자리에 앉아 인터넷 기사로 읽어내려 가려니 송구스런 마음이 앞선다. 김병권 선생은 1960~70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비합법 지하운동 조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1921년 대구에서 출생한 선생은 4·19혁명 당시 사회당 대구지부와 민족자주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고 1961년 남북학생회담 추진과 관련해 첫 옥고를 치렀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하 전략당사건)으로 5년간 복역한 후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1988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1995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재정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어 1998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전민련과 통일연대 고문으로 활동했던 선생은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을 하다 타계한 것이다.
자료 속에 나타난 선생의 삶 필자는 사료수집 차 지난 해 경기도 안산에 있는 김병권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처음 선생을 뵈었다. 팔십대 고령의 노인이었으나 눈빛이 형형하였고, 4시간 여 동안 자료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 표현한 ‘신념의 강자’라는 말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이 기증한 자료는 선생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전략당사건과 남민전사건 판결문, 범민련 자료, 민족화합운동연합 자료 등과 감옥에서 장기수분들과 주고받은 서신, 수백 통의 격려 편지, 자비를 들여 만든 ‘6·15공동선언 실현’ 관련 인쇄물이 선생의 안방 반닫이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특히 1995년 범민련사건으로 구속되어 1996년 청주교도소로 이감되기 전까지 자필로 작성한 153쪽에 달하는 자전적 수기는 1960년대 이후 통일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사의 한복판을 헤쳐나간 선생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자전적 수기에는 그분의 이력에서 보았던 모든 사건들이 등장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요양원에 있으면서도 평생 잊지 않았던 전략당사건의 권재혁 동지를 만난 일,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남민전 준비위를 결성했으나 우연히 강령과 규약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어 단독으로 한 일이라고 우겨 단순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던 일, 결국 남민전사건으로 10년의 옥고를 치룬 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은 5·16군사쿠데타 후 합법 공간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사회운동가들이 비합법 형태의 전위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탄생한 조직의 하나였다. 김병권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서클들의 연합조직을 만들어 차츰 당조직으로 발전시키려하였으며 당시는 서클활동 수준이었다고 한다.
권재혁, 이일재, 김병권 선생 등이 중심이었으며, 조직의 변혁노선은 민족자주통일이었다. 권재혁 선생이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인 김종태와 여러 차례 만나 조직을 통합하기로 결의한 가운데 통혁당 사건의 한 갈래였던 ‘임자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직 사건이 되었다.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라 명명된 것은 중앙정보부가 권재혁 선생이 세미나 때 발표한 논문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란 제목에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선생의 수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정보부 조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나 검사는 다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권 동지의 처가 집을 수색해서 권 동지가 작성한 논문 이름이 ‘남조선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선생은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함께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 태성장이라는 중국 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를 결성하였다. 전 해에 희생된 인혁당 관계자들의 속옷을 모아 남민전 깃발을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 해, 즉 76년 초순까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결성을 서두르기로 했다. (중략) 그런데 앞으로 가입할 사람들의 선서를 어떤 방법으로 하면 제일 엄숙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여러 방면으로 토의했으나 결국은 4월 9일에 억울하게 처형된 동지들의 내의를 수집해서 피부에 닿았던 속옷을 가지고 남민전 기를 만들어서 그 기에 손을 얹고 선서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하기로 했다. (중략) 그렇게 해서 총각인 여정남은 집을 이사해서 찾지를 못했고 그 이외 일곱 동지들의 속옷을 건네받았다. 이 속옷을 중화동으로 이사와 있는 전수진 할머니와 이문희가 밤을 새워가면서 남민전 기를 만들었다.
먼저 간 동지들을 위해 실천하다 전략당사건의 권재혁 선생, 남민전사건의 이재문, 신향식 선생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선생은 먼저 스러져간 동지들을 복권시키고 추모하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90년대 말부터 권재혁 선생의 기일인 11월 4일이면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인 독립공원 사형장 건물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민족주의자 권재혁 선생에 대한 애끓는 추모와 신원(伸寃)의 뜻을 담아서 추모제를 지내는 것이다. 선생이 말년에 노구를 이끌고 사비를 들여가며 ‘6·15공동선언 실현’ 선전활동에 앞장섰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6·15공동선언을 실현하여 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죽어간 동료와 동지들의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생이란 무엇인가 누가 물으면 우리는 대답하리라 마지막 순간에 뒤돌아볼 때 웃으며 기억할 지난날이라고…….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가 울려 퍼졌다는 영결식장 모습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것이 있다. 1995년 범민련사건 법정 최후진술에서 “건강도 좋지 않고 이게 마지막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던 선생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차디찬 감방에서 쉼 없이 써내려갔을 수기 중 한 대목이 그것이다. “나의 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실패한 삶은 아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난 9월 21일 통일운동가 김병권 선생이 타계했다. 3일 후에 거행된 민족통일장에서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조시를 통해 “이제 당신이 꿈꾸던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는 꿈, 자립된 평화의 나라를 만들려던 꿈, 가난과 소외가 사라지는 해방된 사회의 꿈을 우리가 대신 지고 가겠습니다.”라며 선생의 죽음에 애석함을 표시했다. 김병권 선생이 한평생 이 땅에서 이루려했던 꿈을 편안히 자리에 앉아 인터넷 기사로 읽어내려 가려니 송구스런 마음이 앞선다. 김병권 선생은 1960~70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비합법 지하운동 조직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1921년 대구에서 출생한 선생은 4·19혁명 당시 사회당 대구지부와 민족자주통일협의회에서 활동했고 1961년 남북학생회담 추진과 관련해 첫 옥고를 치렀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하 전략당사건)으로 5년간 복역한 후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1988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감옥 생활을 했다. 1995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재정위원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어 1998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전민련과 통일연대 고문으로 활동했던 선생은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을 하다 타계한 것이다.
자료 속에 나타난 선생의 삶 필자는 사료수집 차 지난 해 경기도 안산에 있는 김병권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처음 선생을 뵈었다. 팔십대 고령의 노인이었으나 눈빛이 형형하였고, 4시간 여 동안 자료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 표현한 ‘신념의 강자’라는 말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이 기증한 자료는 선생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전략당사건과 남민전사건 판결문, 범민련 자료, 민족화합운동연합 자료 등과 감옥에서 장기수분들과 주고받은 서신, 수백 통의 격려 편지, 자비를 들여 만든 ‘6·15공동선언 실현’ 관련 인쇄물이 선생의 안방 반닫이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특히 1995년 범민련사건으로 구속되어 1996년 청주교도소로 이감되기 전까지 자필로 작성한 153쪽에 달하는 자전적 수기는 1960년대 이후 통일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사의 한복판을 헤쳐나간 선생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자전적 수기에는 그분의 이력에서 보았던 모든 사건들이 등장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요양원에 있으면서도 평생 잊지 않았던 전략당사건의 권재혁 동지를 만난 일,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남민전 준비위를 결성했으나 우연히 강령과 규약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어 단독으로 한 일이라고 우겨 단순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던 일, 결국 남민전사건으로 10년의 옥고를 치룬 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은 5·16군사쿠데타 후 합법 공간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사회운동가들이 비합법 형태의 전위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탄생한 조직의 하나였다. 김병권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서클들의 연합조직을 만들어 차츰 당조직으로 발전시키려하였으며 당시는 서클활동 수준이었다고 한다.
권재혁, 이일재, 김병권 선생 등이 중심이었으며, 조직의 변혁노선은 민족자주통일이었다. 권재혁 선생이 통일혁명당 서울시당 위원장인 김종태와 여러 차례 만나 조직을 통합하기로 결의한 가운데 통혁당 사건의 한 갈래였던 ‘임자도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직 사건이 되었다.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다.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라 명명된 것은 중앙정보부가 권재혁 선생이 세미나 때 발표한 논문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란 제목에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라고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선생의 수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정보부 조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나 검사는 다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권 동지의 처가 집을 수색해서 권 동지가 작성한 논문 이름이 ‘남조선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선생은 이재문, 신향식 선생과 함께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 태성장이라는 중국 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를 결성하였다. 전 해에 희생된 인혁당 관계자들의 속옷을 모아 남민전 깃발을 만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 해, 즉 76년 초순까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결성을 서두르기로 했다. (중략) 그런데 앞으로 가입할 사람들의 선서를 어떤 방법으로 하면 제일 엄숙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여러 방면으로 토의했으나 결국은 4월 9일에 억울하게 처형된 동지들의 내의를 수집해서 피부에 닿았던 속옷을 가지고 남민전 기를 만들어서 그 기에 손을 얹고 선서하도록 하는 방법을 취하도록 하기로 했다. (중략) 그렇게 해서 총각인 여정남은 집을 이사해서 찾지를 못했고 그 이외 일곱 동지들의 속옷을 건네받았다. 이 속옷을 중화동으로 이사와 있는 전수진 할머니와 이문희가 밤을 새워가면서 남민전 기를 만들었다.
먼저 간 동지들을 위해 실천하다 전략당사건의 권재혁 선생, 남민전사건의 이재문, 신향식 선생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선생은 먼저 스러져간 동지들을 복권시키고 추모하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90년대 말부터 권재혁 선생의 기일인 11월 4일이면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인 독립공원 사형장 건물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민족주의자 권재혁 선생에 대한 애끓는 추모와 신원(伸寃)의 뜻을 담아서 추모제를 지내는 것이다. 선생이 말년에 노구를 이끌고 사비를 들여가며 ‘6·15공동선언 실현’ 선전활동에 앞장섰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6·15공동선언을 실현하여 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죽어간 동료와 동지들의 상처가 치유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생이란 무엇인가 누가 물으면 우리는 대답하리라 마지막 순간에 뒤돌아볼 때 웃으며 기억할 지난날이라고…….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가 울려 퍼졌다는 영결식장 모습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것이 있다. 1995년 범민련사건 법정 최후진술에서 “건강도 좋지 않고 이게 마지막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던 선생이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차디찬 감방에서 쉼 없이 써내려갔을 수기 중 한 대목이 그것이다. “나의 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실패한 삶은 아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