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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조작하다 오송회(五松會)사건

 

5·18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들어선 군부 는 1980년 7월 30일 이른바 ‘7·30조치’를 단행하여 새로운 군부정권을 위한 교육통제 장치를 정비하는 한편 교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더욱 강화하였다. 5공화국 시절 문교부(현재 교육인적자원부)는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전담실’을 설치해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교사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보고하도록 하고, ‘보안위원회’를 구성해 사립 중고교 교사채용 때 과거 전력 등을 조사하여 채용 여부를 판정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건전한 비판의식을 키워주는 교사들에게는 강제 연행, 장기 구금, 고문 등을 통해 좌경용공조작을 자행하여, 다수의 교사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신군부에 의한 폭정이 기승을 부리던 1982년,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 9명과 전직 교사 1명은 용공서적을 탐독하고 북한 방송을 청취하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좌경 의식화교육을 하는 등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5공 정권의 용공조작 사건 중 대표적인 예로 기록되고 있는 이른바 ‘오송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사들을 고문해 용공 지하조직을 만들다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 교사들인 이광웅, 박정석 등 5명은 평소 우리 사회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평불만을 품고 사회주의를 동경해온 자들인 바, 이들은 1982년 4월 19일 오후 4·19 위령제를 빙자하여 학교 뒷산에 모여 소위 ‘오송회’라는 용공 지하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체제 전복과 사회 혼란을 야기 시킬 목적으로 조직 확대를 꾀하여 동료 교사와 제자 등 주변 인물 다수를 포섭하였으며, 불온서적을 탐독하고 북괴 방송을 정기적으로 청취하는 등 암약을 해오다가 수사진에게 적발되었다.
경찰은 이들 5명 외에 이들을 배후에서 조성한 모 방송국 간부 조성용과 교사 3명 등 일당 9명을 구속하고 기타 관련자들을 불구속 입건함으로써 일망타진의 개가를 올렸다.
라는 내용의 경찰 수사 결과가 관련자들의 사진과 도표를 곁들여 TV로 전국에 보도되었고, 중앙과 지방 일간지에는 사설과 해설 기사 등으로 대서특필되었다. 폭압적인 독재 치하, 암울한 시대를 상징하고 있는 오송회 사건으로 인해 현직 교사와 방송인 등 연루자 9명은 7년에서 1년까지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고 그들 모두 영장 없는 불법 연행,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과 물증 없는 자백 강요 등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다.
이들은 88년과 99년 두 차례 교육부에 의해 특별채용 형식으로 교단에 다시 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일부는 동료 교사와 학부모들의 눈초리를 감당하기 힘들어 교단을 등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2년 1월 1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오송회 사건 관련자 7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민주화 열망을 시로 표현하다 92년에 돌아가신 이광웅 씨와 황윤태 씨는 서류 제출이 늦어 심사에서 제외됐다.

1982년 여름 군산제일고등학교 출신 제자들이 박정석 교사의 집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에게서 받은 복사된 시집 『병든 서울』을 놓고 내렸다. 『병든 서울』은 1987년 6월항쟁 직후에 해금되어 현재는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판금조치되어 있던 시집이었다.
그 시집에는 ‘인공’ 운운하는 구절이 실려 있었는데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안내양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은 1946년에 출간된 이 시집을 복사해 몇몇 동료 교사들과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교사이자 시인인 이광웅 씨의 뒷조사를 벌였지만 결국 ‘별것 아니다’ 라며 처음에는 수사를 중지했다. 문학을 잘 모르던 경찰은 이 시집을 전북대학교 철학과 송 모 교수에게 사상적 배경과 소견을 자문했고 ‘이 정도를 보관하고 있는 자라면 고정 간첩이나 거물임에 틀림없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다.
이 감정 결과를 토대로 이광웅 씨에 대한 수사를 다시 재개한 경찰은 그가 당시 판금 중이던 김지하의 시집 ‘불귀’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을 문제 삼았고, 특히 1982년 4월 19일 오후 1시경 군산제일고등학교 뒷산에서 동료 교사들과 4·19 위령제를 지낸 사실을 알아내 이광웅 씨 개인에 대한 수사를 오송회 사건으로 날조하게 되었다.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전북도경 대공분실은 이 시집을 단서로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고정간첩이나 대단한 지하 공산당 조직이라도 적발한 듯 과장된 수사보고를 냈고 1982년 11월 이광웅, 박정석을 비롯한 많은 교사들을 수업 중에 또는 인근 식당에서 연행하여 대공분실에 장기간 불법 구금한 채 협박과 고문으로 관련자들이 마치 공산주의자로서 평소에도 서슴없이 용공 언동을 일삼고 드디어 1982년 4월 19일에는 오송회라는 반국가 단체를 구성했다는 억지 자백을 얻어냈다.
몽둥이로 전신을 마구 때리고 물고문, 통닭구이고문, 비행기고문, 심지어 발가락 사이에 전선을 연결하는 전기고문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잠을 재우지 않고 밥을 굶기면서 관련자들이 사회주의자이고 오송회라는 단체도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용공단체로 구성하였다는 등의 자백을 얻어낸 뒤, 이 내용들을 계속적으로 암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고문과 자백, 암기의 과정은 관련자들이 1982년 11월 2일 경찰에 연행되어 불법구속되어 있던 25일까지의 24일 동안과, 11월 25일 구속영장에 의하여 정식구속이 집행되고 검찰에 송치된 1982년 12월 13일까지의 19일 동안을 합한 43일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결국 43일 동안 행해진 고문과 자백, 암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관련자들은 어떤 것이 자기의 생각이고 어떤 것이 수사관들의 생각인지, 어떤 일이 자기가 한 행동이고 어떤 것이 수사관이 일러준 것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정신적인 혼미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79년 1월에 나는 KBS로 직장을 옮겨 박정희의 죽음과 서울의 봄,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을 하염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5년 전의 대화내용이 문제가 되었어요. 날벼락 같은 연행에 이어 밑도 끝도 없는 언어의 편린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 사실이 되어 내 앞에 들이닥쳤습니다. 나보다 앞서 잡혀온 이광웅, 박정석 선생한테서 캐낸 것이었어요. 세상에 5년 전 대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강제로 정확하게 기억해내야만 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갖은 수모와 폭행을 당하면서 수백 장의 자술서에다 5년 전에 내가 말하고 남이 말한 내용을 억지로 기억해서 일목요연한 시나리오로 구성해야만 했어요. 그래야만 실감이 난다고 해서요.”
1982년 오송회 사건이 만들어지기 약 5년 전인 1978년에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약 1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던 조성용(67, 전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표) 씨가 연행된 까닭은 고문 과정에서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름을 대라는 수사관의 계속된 추궁을 견디다 못 한 박정석 씨가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조성용 씨와 문규현 신부의 이름을 댔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교 후배였던 이광웅, 박정석 선생을 만나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문학이야기, 세상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사실이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 사실이 되어 경찰의 고문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나더러 좌경 의식화된 진원을 밝히라는 데 이거야말로 죽을 지경이었어요. 경찰은 나에게서 압수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 14권을 들이대고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별수 없이 그것들을 뒤적이다가 라티모어와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 관계 논문 여기저기에 수없이 줄을 그어대었더니 통과되었어요. 그것은 나중에 법정에서 증거물로 제시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내가 소련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국외 공산계열 찬양 고무였습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착오를 했는지 아니면 ‘스키’와 ‘코프’ 때문이었는지 이 대목이 계속 따라다녔죠. 법정에서 모두진술(冒頭陳述) 때 이 점을 호소했더니 그제서야 공소장에서 삭제되었습니다.”
1983년 1월 11일경 당시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였던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이옥렬, 황윤태, 강상기, 채규구, 엄택수와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으로 근무하던 조성용 등 9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5년 전의 대화내용이 문제되어 구속된 조성용 씨


재판이 시작된 지 5개월이 지나 10회의 공판을 거친 뒤 검찰은 피고인들에게 3년에서 12년의 징역형과 자격정지를 구형하였다. 그 중 3명에게만 실형이 그리고 조성용 씨를 포함한 6명에게는 선고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1심 판결에 대해 검찰과 피고인들은 모두 항소했다. 검찰은 양형이 지나치게 낮은 점을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다시금 주장하게 되었다.
“2심 판결은 찌는 듯한 7월의 더위 속에 내려졌습니다. 긴장된 순간이었죠. 그러나 결과는 우리 9명 모두에게 1년에서 7년까지의 실형이었습니다. 법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죠. 판사들은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고 가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재판을 지켜보던 문정현, 문규현 두 신부님은 성직자의 품위도 망각한 채 의자 위에 올라서서 울부짖었습니다.”
1988년 6월 군산제일고등학교에 복직된 채규구(51, 군산 진포중학교 교사) 씨는 현직 교사들을 1개월 가까이 불법 감금했기 때문에 경찰이 자신들을 무혐의 처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독재정권은 민주세력을 철저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정법상 좌경용공 분자로 몰아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교직사회가 상대적으로 순응적이고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을 악용하여 교직사회를 철저히 장악, 저항세력의 성장을 제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오송회라는 사건을 날조했다고 짐작됩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는 상관없이 필요하면 만들어냈습니다.”

적당히 엮어서 엄벌에 처한다

사건 이후 복직되기까지 6년여 세월 동안 채규구 씨는 교사이기를 포기하거나 고향을 떠나야 할 유혹과 상황에 여러 번 처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군산에서 복직하여 교단에 다시 서기를 고집한 이유를 그는 참다운 선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오송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끊임없는 고난이 뒤따랐지만 한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찬과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건 당시 나는 참교육이 무엇인지, 교사다운 교사는 어떤 모습인지, 우리 앞에 어떤 민족적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 했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옥중에서야 비로소 한민족 지상과제인 통일, 조국 민주화, 참다운 인간해방 등에 관하여 확연하게 깨달았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짐했습니다. 내가 교단에 돌아가기를 고집했던 두 번째 이유는 군산제일고 졸업생들에 대한 사죄를 위해서였습니다. 악랄한 검찰은 사제지간의 윤리까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스승을 고발하기 위한 증인으로 제자들을 법정에 세웠고, 심지어 당시 재학 중인 어린 학생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스승을 고발하기 위한 증인으로 불려나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떠는 한 제자의 모습을 보며 통한과 분노를 삼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감 뒤에 본격적으로 운동권으로 살아왔다는 조성용 씨는 할 수 있는 일이 민주화운동밖에 없었다고 한다.
 

“내가 왜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힐 뿐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였죠. 운동시간에 이 사건으로 들어온 교사들을 만나서 오송회라는 조직이 정말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오송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지독하고 무서운 법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인간의 기회와 안전과 행복을 끝장내는 국가보안법은 간첩을 잡는 법이 아니라 간첩을 만드는 무시무시한 법입니다.”


목숨을 걸고

분단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분단을 뛰어넘는 한 편의 시를 쓰고 싶어 했던 이광웅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금강 하구 쪽 돌멩이 하나로 우뚝 서있는 시비에 그는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하라고 이야기한다.

이 땅에서/ 참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글 / 서 성 란>

1967년 익산 출생.
1996년 중편소설 `할머니의 평화`로 실천문학 신인상 수상.
장편소설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과 소설집으로 `방에 관한 기억`등이 있다.

<사진 / 노 순 택>
다큐멘터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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