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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품, 원주 원동성당

 



전국에 걸쳐 비가 오리라는 일기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원주에도 어김없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원주에 도착하여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원주자활후견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입주해 있는 건물은 원래 천주교 원주교구의 교육관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입구 오른쪽의 단층 건물에는 원주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이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마당을 가로지르면 낡은 2층 건물의 현관에 닿는다. 한눈에도 퍽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원주자활후견기관의 간사로 활동하는 정인재(62) 선생은 이 건물의 변천사를 일러 주었다.
“원래 1967년 이 건물은 기숙사로 지어졌어요. 시골에서 올라 온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곳이었죠. 저 앞에 생활협동조합이 들어선 단층 건물은 강의실이었지요. 그 뒤 1973년부터 원주교구에서 이 건물을 교육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교육관이라고 해서 단지 교리를 교육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원주지역의 노동자, 농민, 광부 등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이뤄졌다.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의 중심을 이루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이뤄진 것이다. 또한 이 건물은 원주지역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딱히 사무실을 얻을 형편이 못 되는 단체들이 입주하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숱한 민주화인사들이 소식을 주고받는 장소로, 혹은 은밀한 모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원주교구의 교육관

그러다 지난 2001년 원주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운영하는 원주자활후견기관이 보건복지부로부터 공식지정 되어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자, 지난해에 이 건물로 입주한 것이다. 원주자활후견기관은 저소득층 주민들의 자활, 자립, 재활을 위한 각종 사업을 펼치는데, 간병인, 제과제빵, 도배, 영유아보육, 청소, 영농, 집수리, 폐자원 재활용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건물 1층에는 어린이 놀이방이 있고, 건물 왼편 컨테이너 박스에는 도배, 집수리 센터가 들어서 있다.

비가 내리는 탓인지 컨테이너 박스에는 집수리 일꾼으로 보이는 사람 서넛이 둘러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 내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무연한 눈빛이 원주자활후견기관의 앞마당을 훑고 있었다. 비에 젖어들며 질퍽해 가는 마당처럼 그들의 마음 한구석도 그렇게 질퍽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주는 다른 도시에 비해 행복하다면 행복하달 수 있는 곳이다. 지학순 주교가 있던 곳이니 만큼 도시 분위기도 남다른 점이 있다. 특히 가톨릭 인구가 많은 데다 지학순 주교가 오래 전부터 민주화운동과 교회내부개혁에 주력해왔
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시내 곳곳에는 자활후견기관과 비슷한 단체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관념이 아닌 습관으로 몸에 배어 있어서일까. 다른 도시보다 원주는 자원봉사자들도 많고 사회복지제도도 썩 잘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인심은 변하는 법인지, 원주자활후견기관 역시 사무실을 옮겨야할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이 기관이 자리 잡은 개운동 일대가 재개발 붐이 일면서 아파트 단지 건설을 추진하는 주민들이 원주교구청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진 도시에까지 개발의 관념이 깊숙이 파고든 걸 보면, 여전히 근대화란 화두는 우리 시대의 족쇄인지도 모른다.
지학순 주교는 1965년 천주교 원주교구가 창설됨과 동시에 주교로 서품 받고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1993년 선종할 때까지 지학순 주교와 원주의 인연은 참으로 질기고도 깊었다. 또한 그 인연의 중심에는 원동성당이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원래 사회민주화보다는 사회복지, 교회내부개혁에 더 관심이 많았다. 원주교구장으로 취임한 이후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진광중고등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그 뒤 원주지역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된 가톨릭센터도 그 즈음에 건립하였다.
그런데 1970년 방송을 통해 더욱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하고자 했던 지학순 주교는 원주문화방송국 설립에 참여하면서 사회 부정의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방송국의 부정이 드러나자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는 수차례 방송국의 운영을 맡고 있던 5·16장학회에 시정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군사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조직들이 으레 그렇듯이 5·16장학회도 완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학순 주교는 이 문제의 해결을 요청하는 진정을 청와대까지 올렸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1971년 9월 20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 대표가 함께 하는 연석회의를 열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제도화된 불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여 이러한 풍토를 개선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사회민주화투쟁에 나선 지학순 주교


드디어 그해 10월 5일 오후 7시 30분. 원동성당에서는 원주 교구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1,500여 명이 모여 역사적인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가 거행된다. 미사를 마친 이들은 곧이어 부정부패 규탄 궐기대회를 열어 국회, 정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선언문, 부정부패 규탄문,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대회를 마친 뒤 지학순 주교를 선두로 1,500여 명의 원주 시민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그야말로 지학순 주교가 본격적으로 사회정의 실천을 위한 행동에 뛰어드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이후 지학순 주교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선종할 때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톨릭인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당시 원동성당 청년회장을 맡고 있던 이경국(67)씨는 지학순 주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학순 주교님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 삶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근엄하게만 여겨졌던 사제들이 1,500여 신도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나선 모습이란,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경찰의 제지를 받은 시위대는 원동성당으로 돌아가 이틀 동안 철야기도를 하며 자리를 지켰다. 이 대회는 7일 오후 5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결성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즉 사흘 동안의 집회로 끝나지 않고 이후 끊임없이 사회민주화를 위해 투쟁할 기구의 결성이라는 뜻 깊은 성과를 얻은 것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원동성당은 원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원주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

원동성당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원동성당 맞은편에는 원주교구가 들어서 있는 가톨릭회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당과 회관이 마주보고 있는 꼴이다. 회관 앞 이차선 도로를 건너면 성당 입구다. 입구에 들어서면 천사장 가브리엘로 여겨지는 자가 악마를 짓누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왼쪽에 서 있다. 마치 산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사천왕상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동상 앞에는 원동성당의 역사를 말해주듯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 뒤로 낡은 벽돌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6·25 때 파괴된 성당의 잔해에서 성한 벽돌을 골라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내부에 들어가 보니 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작은 방들이 여럿이며 칠판과 책상이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이는 마룻바닥이 그러하고 마치 장마를 지나고 있는 듯 축축한 공기가 그러하고 그 공기에 실려 있는 곰팡이 내음이 그러하고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발길을 돌려 원동성당의 옆문을 통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를 일별하자 마치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순수의 결정체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지난 번 답사했던 인천의 답동성당과 비교하자면, 그곳이 장엄하고 화려한 분위기 속에 뭇 사람을 끌어들이는 온화함을 품고 있다 하면, 원동성당은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품에 들어온 사람이 만약 어떤 격정적인 감정에 젖어있다 하더라도 금세 평온을 되찾을 수 있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을 지녔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한마디로 원동성당은 서민들의 옷차림을 닮아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의 본당인 이곳 원동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지학순 주교는 1973년 김대중 납치와 관련하여 그해 11월 YMCA에서 ‘인권수호긴급성명’에 참여했다. 그러자 다음 해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해외여행에서 귀국하던 지학순 주교를 7월 6일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연행한다. 다음날 밤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다 풀려나온 지학순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연금되었다.
 



다시 검찰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7월 23일 아침,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는 없다는 내용으로 양심선언을 하는 바람에 다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된다.
당시 지학순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자신의 결백을 이렇게 주장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행동으로 학생단체들을 도와줄 목적으로 가톨릭 시인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공산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가 학생들을 도와준 행동은 공산주의와는 추호도 관계가 없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천주교인들의 자기각성을 촉구하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 이후 맨 처음으로 전주교구에서 기도회가 개최되었고 다음으로 명동성당에서 ‘국가와 교회와 목자를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인천교구, 원주교구에서도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희구하는 기도회가 잇따라 개최되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한 가지 사건을 분수령으로 지속적인 투쟁으로 수렴되어 간다. 그해 9월 24일 원동성당에 모인 3백여 명의 신부들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한 것이다. 사제단은 결성과 동시에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바로 이곳 원동성당에서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고 엄숙하게 기도회가 치러졌다. 기도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성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했다. 이로부터 이틀 뒤, 사제단은 명동성당에 모여 순교자 찬미 기도회를 개최하고 제1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바야흐로 천주교 사제들의 민주화를 향한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물줄기가 원동성당으로부터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

그러나 5·18민중항쟁을 거치면서 종교계 역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최기식 신부의 구속은 교회 안팎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82년 3월 18일에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문부식과 김은숙은 당시 자신들의 거취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를 찾아 원주로 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바로 원주교구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해외출장 중이었고 이들을 대신 맞이한 사람이 바로 최기식 신부였다. 최기식 신부는 그때 이미 5·18민중항쟁으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을 보호하고 있었으며, 원주교구 사무국장 겸 교육원 원장을 지내고 있었다.최기식 신부는 함세웅 신부와 의논한 뒤 자신을 찾아 온 두 사람을 설득하여 자수를 시켰고, 이어 사건 관련자 11명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공안당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최기식 신부를 비롯한 5명을 범인은닉 혐의로 연행하여 4월 8일에는 모두 구속시켰다. 전두환 정권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천주교를 손 볼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이에 언론도 교회 역시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다, 원주교구 교육원은 용공분자들의 소굴이다, 라는 식으로 동조하였다.
위기는 때로 기회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광주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더라면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곧 전두환 정권으로서도 이 문제를 계속 들쑤실 경우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이 폭로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오히려 광주민중항쟁 이후 침체되었던 종교계가 다시 연대의 깃발을 올리며 부도덕한 정권에 대항하는 계기를 맞은 셈이다. 원동성당을 비롯해 전국의 성당에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결국 최기식 신부는 징역 3년, 자격정지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83년 광복절에 이르러서야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최기식 신부 석방 환영 미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곳 원동성당이었다. 원동성당은 그 뒤에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한걸음도 비켜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5·18 민중항쟁 추모 미사를 비롯해 박종철 추모 미사, 인권회복 고문반대 미사 등 단지 안녕과 평온을 희구하는 미사가 아닌 사회의 각성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미사가 이어졌다. 또한 원동성당은 경찰의 폭력에 쫓겨 다닌 시위대의 최후의 은신처가 되어 주었다.

 
시위대의 최후의 은신처

성당을 나오니 여전히 비는 줄기차다. 성당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세상이련만, 어쩐지 성당 밖으로 나오는 순간, 든든한 가슴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그건 곧 성당 밖 세상의 팍팍함을 절감한 탓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민주화운동의 성역인 원동성당과 같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를 고스란히 ‘추억’만 해도 되는 세상은 언제나 오려나. 전국적으로 내리는 비를 그렇게 원동성당 앞에서 하릴없이 맞고 있었다.


글 손 홍 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수상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바람 속에 눕다>, <사람의 신화>, <폭우로 걸어 들어가다>
<아이는 가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다> 등 발표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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