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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동아시아 모델을 향한 아시아의 연대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사회·경제적 파장



지난 1997년 7월 태국 통화인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던 동아시아 경제체제를 일거에 뒤흔들어 놓았다. ‘기러기떼 모형’의 성장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잃어버린 90년대’라는 말이 나오던 터였다. 사실상 동아시아 경제 파국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세계은행은 이미 1993년에 발간한 『동아시아의 기적』에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과 같은 동남아 신흥공업국들이 동북아 신흥공업국들보다 더 좋은 발전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극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경제위기가 동아시아에서 발발하고 이 위기가 확산일로의 경향을 보이게 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돌연 동아시아 위기의 원인을 정실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동아시아 모델’에서 찾았다. 고성장에도 불구하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동아시아 모델’이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이야말로 정실자본주의의 전형이며 이를 동아시아에 수출하여 위기를 초래하게 한 음주 운전자에 다름 아니라는 비아냥 섞인 말까지 나왔다.
무엇보다 경제위기는 재벌기업 혹은 은행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不死)’, ‘은행불사(銀行不死)’의 신화를 일거에 깼다. 태국의 경우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재벌기업 짜런폭판(CP)이 여러 자회사를 매각해야 했다.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방콕은행의 경우도 외국인 소유지분이 25%에서 49%로 늘어났다. 물론 적지 않은 기업들과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태국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인 인도네시아에서도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조건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은행들과 기업들이 파산하였다.
특히 32년 동안 장기독재를 하면서 인도네시아 국민경제의 상당 부분을 사유화하고 있던 수하르토 일가의 부정부패가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1997년 금융 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깡드쉬 IMF 총재로부터 “고성장이 수반하는 폐해를 조정하면서 건전한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말레이시아 역시 위기에 빠졌다. 당시 부수상 겸 재무장관이었던 안와르 이브라힘은 위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성장목표 하향 조정, 연방정부 예산 삭감, 급격한 자본유출을 막기 위한 금리인상 등과 같은 IMF의 보수적 구조조정 요구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동아시아에서 다양한 반응을 낳았다. 이를테면 위기의 발원지가 되었던 태국에서는 서민들은 물론이고 자본가들까지 나서서 IMF의 요구에 순응하고 있던 민주당 정부를 비판하였다. 푸미폰 국왕은 ‘자족경제’의 필요성까지 제시하였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배경 하에서 애국주의와 민중주의로 포장한 타이 최고의 통신재벌 탁신이 이끄는 타이사랑당이 창당 3년도 안 돼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제 우리도 경제전쟁 시대에 재계와 경제를 아는 수상이 필요하다.”라고 하면서 짜런폭판(CP), 방콕은행 등과 같은 대표적인 재벌기업들이 탁신을 지지하고 나섰다.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개발독재자로 지목되고 있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도 경제위기의 책임이 동아시아의 정실자본주의에 있다는 서방을 반박하기 위해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공개 석상에서 “소로스 등 외환 거래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 넣으면서 엄청난 부를 쌓고 있다”며 투기자본 집단과 이를 비호하는 서방을 비난하였다. 경제위기 해법을 두고 마하티르와 대립하였던 안와르 이브라힘 부수상은 부패와 동성애 혐의로 구속되었다.

‘아세안(ASEAN)+3’과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가능성

경제위기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은 단기성 투자자본의 대량 이탈과 그것이 야기하는 경제적 대혼돈에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었던 무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IMF에 의해 취해진 부적절한 진단과 조처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마침내 아세안 회원국들과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아세안+3’ 회의에서 외환위기 발생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달러 공급에 대한 긴급 지원을 핵심으로 하는 ‘치앙마이 발의’(CMI)에 합의하였다. 동아시아가 “국제금융이라는 성전으로부터 고리대금업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주목할 것은 동북아 3국의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가 충돌하면서 지역협력이 지체되고 있는 반면 아세안은 안보와 개발뿐만 아니라 인권문제도 지역협력 의제로 삼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992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 4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는 아동, 여성, 마약퇴치,  
환경보호 등을 중심으로 한 기능적 협력안이 제기되었고 이는 아세안 프로그램이 정치·경제 의제를 넘어 사회 등 기타 의제까지 포괄하도록 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1997년 6월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린 비공식 아세안 인권기구 대표자 모임에서는 지역인권 메카니즘 구축을 위한 시민사회와 아세안 정부 사이에 신뢰형성과 의견 일치를 위한 노력이 강조되었다. 마침내 2003년 방콕에서 열린 제 3차 아세안 지역인권 메카니즘에 관한 워크숍에서는 ‘아세안 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해 아세안 싱크탱크 ASEAN - ISIS를 비롯해 정부, 국가인권위원회, 시민사회의 대표자 등으로 구성된 공동 실행그룹을 조직하자는 의견이 제출되었다.
일찍이 아세안 국가들은 인권 개념에 대해 소극적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한 아세안 회원국들은 인권의 보편성보다는 국가주권, 내정불간섭, 정치·문화적 전통을 포괄하는 민족·지역적 특수성과,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의 권리 그리고 자유권보다는 개발권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국제사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인권상황 하에 놓여 있던 버마를 아세안에 가입시켰다. 이 당시 아세안이 버마를 가입시킨 명분은 ‘건설적 관여’였다. 이때의 ‘건설적 관여’란 버마 군사정부를 고립시키지 않고 이들과의 대화와 교류를 진전시키면서 일정한 ‘변화’를 유도한다는 비적대적 해결모색을 의미했다.
그러나 2004년 말부터 아세안 정부들은 전례 없이 버마 군사정부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버마 군사정부를 향한 미국,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과 지역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압력의 결과였다. ‘버마를 생각하는 아세안 의원 모임’도 아세안 정부들에게 기존의 ‘건설적 관여’를 수정하도록 압박하였다. 버마 군사정부의 아세안 의장직 포기 선언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1997년 위기체제’를 넘기 위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향해

요컨대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아세안에 두 가지 변화를 이끌어냈다. 우선 위기는 아세안 정부들로 하여금 동남아시아를 투기자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경제주권의식을 공유토록 하면서, 아세안은 물론 동북아시아까지 포괄하는 경제안보체제의 구축을 꾀하도록 하였다. 다른 하나는 민주화의 진전을 배경으로 성장한 시민사회가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던 아세안의 내정불간섭 원칙에 일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제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가 가야할 길은 아직 멀다. 특히 안정된 민주화 행보를 보여주고 있던 태국에서 지난 9월 19일 발생한 쿠데타는 동아시아와 국제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태국 민주화의 파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보다 태국에서 1997년과 1998년에 걸쳐 있었던 ‘국민헌법’으로까지 불리운 신헌법 제정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50년만의 평화적인 여야 정권교체, 인도네시아에서 32년 장기 군사독재의 붕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위기가 동아시아 지역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강화시킨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태국의 비극은 신생민주주의가 지역주의, 민족간 갈등, 빈곤, 실업, 사회경제적 불평등, 인플레이션, 외채, 저성장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언제든지 위기에 봉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확산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정치적 마케팅에 적극 반영한 대중 영합적인 ‘CEO형 통치’가 독단과 위선을 드러내면서 시민사회의 분노를 촉발하고 종국에는 국가 분열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건 군부의 헌정중단 사태까지 불러온, 다시 말해 ‘1997년 위기체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외에도 한국, 대만, 필리핀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위기 이후 동아시아 민주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가 보다 공세적 양상을 띠면서 민주주의라는 토끼보다는 성장이라는 토끼를 먼저 잡아야 한다는 개발독재의 논리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후 국면에 있는 여러 동아시아 사회 안까지 파고들고 있다. 여기에다가 미국 네오콘 주도의 군사주의적 일방주의가 1997년 경제위기 못지 않게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이념을 공유하고 국익 중심의 지역 협력을 넘어 대안적인 ‘동아시아 모델’을 제시해야 할 동아시아 시민사회 상호간 수평적 연대의 취약성도 동아시아 민주화의 미래를 낙관만은 할 수 없게 한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선두그룹에 속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역시 동아시아 지역협력 논의가 탄력을 받으면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편협한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사회 역시 ‘소용돌이 사회’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한국 시민사회는 우리의 폐쇄적인 이미지를 쇄신하고 우리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기 위한 여러 교훈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고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민주주의 수출론’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면서도 ‘기러기떼 모형’의 동아시아 민주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현실에 기반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조직화를 위해 동아시아 시민사회와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글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동대학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공저로 『한국, 아시아 시민사회를 말하다』,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과거청산』, 『동아시아 - 위기의 정치경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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