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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한 흐름이 된 민주화
아시아가 주목을 받고 있다.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그 이유다. 특히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은 호혜적인 경제유대를 뜻하는 ‘기러기떼 모형 성장’의 결과로 추앙받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러기떼 모형 성장’이란 비교적 앞선 동아시아 국가군의 산업과 기술이 사양화하면, 그 다음 단계의 국가군으로 이전되어 그곳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고, 이 곳에서도 사양화하면 다시 그 다음 단계 국가군으로 이전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동아시아 모든 국가의 산업능력이 향상되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아시아의 기러기떼 모형의 성장도 1997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전환 국면에 들어갔다. 위기는 동아시아 고유의 성장모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위기는 그늘만 드리우지는 않았다. 태국에서는 경제위기를 계기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오던 개혁성향의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경제위기의 해법을 두고 당시 수상 마하티르와 갈등을 빚던 안와르 부수상이 전격적으로 구속되면서 이에 분노한 시민사회의 활약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변화는 보다 급격하였다. 32년 동안 장기독재를 하던 수하르토 군부정권이 생존위기에 내몰린 국민들의 저항으로 무너진 것이다. 동아시아에도 정기적인 선거, 자유로운 정당과의 경쟁, 결사의 자유 등을 비롯해 여타 시민의 권리 등이 도입되거나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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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동아시아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무시한 그동안의 추격성장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민주화가 한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는 크게 두 부류의 국가군으로 나뉘어 진다. 한 부류는 중국과 베트남처럼 오랜 기간 반제국주의 투쟁을 거쳐 정치적으로는 비자유주의적인 길을,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의 길을 걸은 나라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정치적으로 비자유주의적 길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길을 걸은 이른바 개발독재를 경험한 나라들을 들 수 있다.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이 이에 해당한다. |
동아시아에서의 민주화란 바로 동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개방화 과정과 후자 국가군들의 탈권위주의화를 일컫는다.
추격성장의 신화를 만들어낸 동아시아 개발독재
동아시아에서 개발독재는 박정희 체제가 그러하듯이 경제개발 성과로 주목을 받아왔다. 동아시아에서 개발독재형 군부정권은 태국에서 앞서 등장하였다. 1958년 쿠데타로 집권한 싸릿 군부세력은 ‘반공’과 ‘개발’을 자신들의 권력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군사정부 주도의 개발 캠페인은 그 다음 군사정부로도 이어져 연평균 10%가 넘는 성장을 가져왔다. 쿠데타 직후 초대 내각을 ‘개발내각’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개발’에 주의를 기울였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군부체제 역시 집권과 함께 1천%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안정화하고 경제성장을 이끌어냈다.
전형적인 민간개발 독재자라고 할 수 있는 리콴유 전 수상도 1960년대에 당-국가체제를 완비, 독립 당시의 빈곤과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고 싱가포르를 세계적 수준의 도시국가로 변모시켰다.또 다른 민간독재자인 마하티르 역시 1980년대 초 수상직에 오르면서 ‘동방정책’을 기치로 일본과 한국, 대만 등을 모방한 말레이시아 경제의 근대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물론 마하티르의 개발정책 역시 시민사회에 대한 철저한 통제 속에서 진행되었다. 대만의 경제성장은 더욱 뚜렷해 1953년 이래 연평균 8%의 성장을 보였다. 대만의 ‘경제우선정책’ 역시 40년 동안 지속된 장제스·장징궈 국민당 정권의 철권통치 하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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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동아시아의 민주화는 완벽한 수준의 당-국가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대만의 변화에서 그 파고의 불가역성을 예감할 수 있었다. 변화는 1949년 이래 38년 동안 계속된 계엄령이 철폐된 1987년부터 시작되었다. 복수정당제가 도입된 입법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연거푸 약진을 하면서 국민당 일당독재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에 들어와 마침내 50년 국민당 장기독재가 종식되고 민진당 정권이 들어섰다. 그렇지만 도시국가 싱가포르에서의 정치적 민주화는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내보안법, 마약남용법, 불건전 출판물법 등을 통해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성장을 여전히 억제하고 있다. 모든 언론은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자기검열 문화가 내면화되어 있다. 1997년 1월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싱가포르의 고척동 수상은 공개적으로 “싱가포르인들은 서구형 민주주의와 자유를 거부한다.”고 선언하였다. 아시아적 가치는 이러한 배경에서 제창되었다. 리콴유 등이 옹호하는 아시아적 가치의 논리적 핵심은 아시아는 서구와 다른 아시아 나름대로의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 고유의 영역에 개입하는 정부를 가진 서구의 정치체계는 가족 중심적인 동아시아의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시아적 가치론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 정의할 수 있다. 1996년 마하티르도 유럽 정상들에게 “아시아적 가치는 보편의 가치이며 유럽의 가치는 유럽의 가치다.”라고 선언하였다. 마하티르 역시 서구를 가족의 의미가 사라지고 타인에 대한 경멸과 탐닉만이 난무하는 사회로 폄하하였다.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논리는 반제국주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 주권의 가치를 인권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중국 등 동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들의 시선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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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둥실험’에 대한 국내적 도전
일찍이 반제국주의 투쟁을 기치로 한 주권 제일주의의 관점은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와 아프리카 회의에서 극명하게 표현되었다. 이 자리에서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이제 더 이상 강대국의 도구나 장난감이 아니다.”라고 공표하였다. 당시의 선언인 ‘반둥 10원칙’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평화공존, 비동맹 원칙 등의 이념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반제국주의 전선은 이에 가담한 신생 독립국들이 제국주의가 취했던 분할지배의 후유증으로 정치적 분열이 고조되자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 경기침체, 부패, 지역반란 등의 위기에 봉착한 수카르노의 경우 자유로운 정당,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교도민주주의’를 제창하고 나섰다. 이때 수카르노가 제안한 교도민주주의는 지도자의 교도에 의한 질서 있는 토론과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전통에 따른 민주주의로서 정치적 분열을 심각한 수준으로 이끄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안되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를 교묘한 ‘가부장적’ 독재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영국 식민주의에 대항한 해방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던 버마에서도 의회민주주의는 정치적 불안과 분열이 심각해지면서 파국을 맞았다. 농민과 노동자의 사회민주주의 국가 건설, 생산자본 국유화, 사회주의 경제제도 확립 등을 골자로 한 ‘버마식 사회주의 길’의 출범은 동아시아에서 자력갱생 모델의 또 다른 도전적 실험이었다. 하지만 버마식 사회주의는 군사정부의 폭정과 비효율적인 경제운영이 결합되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파국을 맞았다. 이렇듯 탈식민화 이후 반제국주의 운동에 앞장서거나 가담하였던 동아시아 국가들이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데 실패하면서 주권과 인권을 동일시하였던 동아시아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은 내부 문제로 눈을 돌려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트남의 ‘도이머이’로 표현된 개혁, 개방노선의 시작은 반제국주의 전통을 갖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 물론 동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를 대표하는 중국은 이미 1970년대 말부터 개혁, 개방의 시대를 열었다.
‘기러기떼 모형’의 동아시아 민주화의 가능성 반면 과거 ‘반공’과 ‘개발’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아시아 국가들도 산업화, 민주화의 심화와 함께 사회주의권과의 보다 유연한 결합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냉전 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전초기지 역할을 자임하던 태국에서조차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전장에서 시장으로’라는 정치적 구호가 나왔다. 반공 쿠데타와 함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던 수하르토 치하의 인도네시아도 1990년대에 들어와 대(對)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베트남을 비롯해 인도차이나 사회주의 국가들과 긴장관계에 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시장을 매개로 평화공존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때의 평화공존이 때로는 이웃 나라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억압을 눈감아주는 불간섭주의의 구실이 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를테면 서방의 완강한 반대에도 버마를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가입시킨 동남아 국가들의 처사는 서방, 특히 유럽의 불신을 샀다. 물론 민주화의 도정에 있는 일부 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들은 ‘버마문제’를 두고 동료 회원국들의 내정에 대해서도 동료애 차원에서 간섭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국면에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부분이 정치적 위기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우선 대만 민주주의의 경우 천수이벤 총통의 친인척 비리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면서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필리핀의 아로요 정권 역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급격히 늘고 있는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납치와 살해를 방조하고 있는데다가 비리와 부정까지 겹쳐 ‘피플파워’의 도전을 받고 있다. 태국 탁신 정권의 몰락은 정치적 인기몰이에 성공한 금권정치가 고공행진을 하다가 추락한 예이다. 특히 탁신은 농촌지역에 확고한 지지기반을 다지고, 인맥을 통해 장악한 군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한 국가 만들기’를 하다가 군부의 반란을 자초하였다. 한때 동아시아 민주화의 파고가 필리핀에서 시작되어 한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로 전이되는 모습을 보이자 이제 동아시아도 인권을 무시한 경제성장 모형을 뛰어넘어 민주화를 향해 기러기떼 모형의 역내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동아시아는 탈군부화, 신생민주주의의 공고화, 평화공존과 인권외교의 조화, 시민사회간 연대 등과 같은 중차대한 과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전환의 시대와 대면하고 있다.
글 박은홍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동대학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공저로 『한국, 아시아 시민사회를 말하다』,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과거청산』, 『동아시아 - 위기의 정치경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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