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도전
시민운동의 분수령
일본의 시민운동이 일본의 정치를 얼마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일당(자민당) 우위체제의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 시민운동이 중앙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대부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활동가들조차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대신 시민활동가들은 국가 혹은 중앙의 변화보다는 자신들의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실험을 통해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변방 곧 지역에서 변화를 도모하여 중앙을 에워싸는 변화의 방식에 기대를 걸고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시민운동이 중앙정치에 대하여 이토록 무력해진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전후 일본의 시민운동사에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 두 가지 사건을 살펴보자. 하나는 1960년대 격렬했던 안보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1995년의 참혹했던 고베 대지진이다. 전자는 학생과 노조, 지식인 등 진보세력이 총궐기하여 국가권력과 맞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채 ‘시민운동의 패배와 국가권력의 승리’라는 결과를 각인시켰던 사건이다. 후자는 자연재해라 할 수 있는 고베 대지진에 정부의 대처능력이 매우 무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대신에 함께 생활하는 이웃이 적극적으로 재난에 대처함으로써 위기를 관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시민의 활약과 정부의 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사건이다.
안보 투쟁 : 상처와 패배로서의 기억
안보투쟁은 1960년 미국과 신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 개입 가능성, 대미 의존성, 의회의 비민주성 등에 대한 강한 반발로 출발하였다. 자민당의 독단에 항의하는 민주화운동이자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평화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고도 경제성장과 더불어 발생한 반공해 환경운동을 포괄하는 운동이었다. 전후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격과 방향에 관한 근본적인 도전을 시도한 운동이었으나 1969년 동경대 투쟁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보투쟁은 그 이후 일본의 시민운동 성격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다. 첫째, 1987년 체제를 만들어냄으로써 승리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던 한국과 달리 일본의 시민운동은 1969년 동경대학의 야스다 강당 내부를 불태우며 벌인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진압 당함으로써 1960년대 안보투쟁 전체를 실패의 경험으로 기억해야 했다. 둘째, 1987년 이후 한국의 시민운동은 중앙무대로 더 깊숙이 들어간 반면 일본은 각기 자신들의 생활터전인 지역에서 운동의 구심점을 추려내야 했다. 셋째, 한국의 경우 1987년 이후에도 일부는 직업적인 활동가 혹은 정치가로 변신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본의 경우는 생계를 위한 자신들의 직업은 별도로 가지고 운동은 볼런티어로 참여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이에 반하여 고베 대지진을 통해서는 그동안 강력한 국가권력의 리더쉽 하에 진행되어왔던 일본 사회가 재난방지와 구조 사업에서 정부의 무력함을 체험한 반면 매우 적극적이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자원봉사자들의 활약에 커다란 도움을 얻게 되었다. 정부는 시민들과 새로운 파트너쉽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고 제도적 지원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시민활동이 단순한 자원봉사가 아니라 지역사회 안전망의 근간을 이룰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새로운 공적영역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3년 뒤인 1998년 NPO법(특정비영리활동촉진법)을 제정하면서 제도적 지원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 후 2000년 개호보험제도가 개선되어 NPO가 개호서비스를 실시하고 자치단체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됨에 따라 NPO를 중심으로 한 시민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일본 시민운동의 최근 흐름
‘중앙에서의 패배와 지역에서의 실험’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시민운동은 최근에 몇 가지 뚜렷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크게 보아 세 가지 흐름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전통적인 애드보커시 운동이다. 막대한 예산이 들지만 필요성이 별로 없는 대규모 공공사업과 미군기지 문제 그리고 원자력발전소 문제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공항과 댐 건설, 핵 발전소와 핵 폐기장 등의 문제는 주민들이 스스로 공론을 조직하여 주민투표를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82년 코치 현의 쿠보카와 정에서 실시된 원자력발전소 설치에 관한 주민투표를 비롯하여 최근의 토쿠시마에서 실시된 제방건설계획에 대한 주민투표(2000년) 등에 이르기까지 주민투표가 주민의 직접참여 형태로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미군기지 문제와 헌법 9조(평화조항)를 지키는 운동은 전국 단위에서 집회를 열기도 하고 주변국의 시민단체들과 연대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둘째, NPO법과 개호법에 힘입어 ‘지역시민사회’를 만들어가는 대안운동이 빠른 속도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최근에 급속히 확장하고 있는 운동은 NPO가 개호와 복지사업을 전개하는 이른바 시민사업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사회적 자본 혹은 시민자본을 구성해가는 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아 개호 서비스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혀 보조금 없이 시민들의 출자에 의해 운영이 되는 경우도 많다.
‘워커즈 코렉티브(workers’ collective)’의 경우, 대부분은 ‘지역사회의 필요’가 무엇인가에 귀 기울이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들은 보육원, 도시락 만들기, 요리교실, 문화교실, 이동수단 제공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얏테미(やってみ)’정신에 입각해 있다. 일단 해보는 것이다. 자신들의 힘으로 먼저 실천해보고 이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싶으면 자치단체에 지원을 요구하기도 하고 사업을 확산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지적해야할 또 하나는 ‘unpaid work’에 대한 관심이다.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하지만 지불되지 않는 노동, 곧 가사노동이라든지 아이 돌보기, 치매노인 돌보기 등은 가정 안에 갇혀진 노동이지만 쉽지 않은 일들이다. 이를 사회적 노동, 곧 지역사회의 공적 서비스로 전환시키는 것 또한 워커즈 코렉티브의 일감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
워커즈 코렉티브 이외에도 지역운동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한 ‘도쿄슈레(Tokyo Shure)’는 자신의 아이가 학교가기를 거부하자 비슷한 자녀를 둔 부모들을 모아 학교에 가려고 하지 않고 남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대안학교이다. 당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는 것이 창피한 일임에도 오쿠치라는 아이의 엄마는 상당수의 아이들이 비슷한 처지에 있음을 공감, 22년 동안의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도쿄슈레를 시작하였다.
세타가야구에서 시작한 플레이파크는 아이들의 자유스러운 놀이공원을 덴마크에서 목격한 부부가 시작한 것으로 현재 일본 전역에 100여 개나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장작으로 불을 지필 수도 있고 나무와 나무사이에 줄을 연결하여 타잔놀이도 할 수 있다.
셋째,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운동이다. 대표적으로 주부들이 중심이 된 도쿄생활자 네트워크라든지 가나가와 네트워크 등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이들 운동은 안보투쟁 이후 지역의 생활자들이 정치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생활클럽 생협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줄여서 ‘네토’라고 불리는 이 지역정당은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현재 동경과 가나가와 현은 물론 사이타마, 치바, 큐우슈우, 홋카이도 등 지역에서 자신들의 특색에 맞게 활동하고 있다.
그 공통점은 임기를 두 차례만 허용하고 당선된 의원들의 급여는 네토에 후원금으로 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자신의 의정활동비는 적은 돈이지만 여기서 지불되고 나머지 돈은 다른 예산과 더불어 네토의 일상 활동비와 선거 시기에 후보자의 선거비용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누구라도 돈을 들이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선거와 생활 정치운동을 실현하고 있다. 한편 임기가 끝난 의원들은 자신들의 의정경험을 살려 워커즈 코렉티브와 같은 새로운 시민사업으로 그 리더쉽을 순환시키곤 한다.
네토와 달리 특정지역에 집중되어 있기보다는 전국적으로 연대를 해서 지역에 도전하는 그룹들도 있다. ‘미도리 테이블(Green Table)’이라든지 ‘니지또 미도리(Rainbow and Greens)’가 그러한 경우이다. 미도리 테이블은 20~30대의 젊은 후보들이 2004년 참의원 선거에 약 10명의 후보를 내고 새로운 정치바람을 일으키려고 했던 운동이다. 전원 낙선했으나 이들은 지역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반면에 ‘니지또 미도리’는 지방의회에 진출하고 있으며 그 수는 많지 않으나 전국적인 연대를 강조하고 국정에도 영향력을 미치려고 한다. 이들은 네토처럼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의원을 당선시키고 있지는 못하는 대신 자신들이 지지하는 이를 자치단체장의 후보로 내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동아시아로 다가오는 지역사회, 멀어져가는 중앙정부
언론에 보도되는 일본 사회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역사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등이 부각되면서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듯 보이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많은 시민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보수화 경향에 반대하고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한번 도전하자는 부흥 혹은 재건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다. 안보투쟁 이후 경제발전으로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왔던 일본은 1990년대 장기 불황을 경험하면서 경제적 위기감이 증폭되었고, 북한 문제와 미국의 방위분담 등에 대한 요구를 기회로 자위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왔다. 최근 헌법개정도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다. 곧 ‘강한 일본’ 프로젝트가 21세기 버전으로 재구성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럴수록 동아시아로 귀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면에 지역사회는 정부를 통하지 않고 바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지역간(local to local)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시마네 현의 독도 문제는 예외적이지만 큐슈, 니가타, 오키나와 등 일본의 다른 많은 지역은 동아시아 연대와 호흡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본의 시민운동은 국가단위만이 아니라 지역(local)단위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region)이라고 하는 새로운 생활공동체를 그릴 수 있는 비전을 공유해가려고 하고 있다. 다만 일본이라는 ‘국가’가 동아시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어 이러한 ‘지역시민사회’의 노력이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글·사진 제공 이기호
1964년생, 연세대 정치학과 석·박사 졸업, 1991~99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연구위원 및 기획실차장 역임, 성결대학교, 숙명여대, 연세대, 서울대 교육대학원, 아주대 국제대학원 등에서 강의. 현재 평화포럼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