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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서서히 내딛는 민주화의 걸음


지난 4월 말 베트남에서는 제 10차 공산당대회가 열렸다. 당 대회는 공산당이 국가 전체를 지도하기 위한 지침을 채택하고 지도자들을 뽑기 위해 매 5년마다 여는 것이다. 이번 당 대회에서는 ‘도이머이’(Doi Moi, 쇄신) 20주년을 맞아 지난 성과를 총결산하고 향후 5년 동안의 발전전략을 수립하며 베트남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선출하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전보다 당 내외 민주화의 목소리가 커 격렬한 토론이 전개되었고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많은 변화들, 즉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 허용, 당 총비서 선출시 복수후보 추천 등이 시도되었다. 이번 제 10차 당 대회는 가히 정치개혁의 대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더 진전된 ‘민주화’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베트남이 1986년 제 6차 당 대회에서 전면적 개혁정책인 ‘도이머이’정책을 채택한 이래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률을 나타내 경제개혁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부문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시아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점진적 개혁 방식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정치부문은 더 점진적이었다. 공산당이 국가를 지도하는 1당 지배를 계속하고 있고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력 구조가 옛 것 그대로다. 그러나 이번 제 10차 당 대회의 분위기는 앞으로 적지 않은 정치변동을 예고하는 듯하다. 사실 베트남에서는 그동안 작은 정치적 변화들이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정치과정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지 살펴보자.

사회변화의 압력

베트남에서 정치적 변화의 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베트남에서는 노동운동도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학생운동도 지리멸렬하다. 조직화된 민주화운동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 사회변혁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단지 계몽적 지식인들의 역할을 주목할 수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체제 자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체제의 건전성 회복을 요구하는 체제 내 비판자들이다. 사회적 저항으로 파급효과가 가장 큰 것은 농민들의 시위다. 199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지방 관료들의 전횡에 도전하여 시위를 벌였고, 이의 정치적 영향력은 적지 않게 나타났다. 몇 가지 예를 보자.


1997년 4월 말부터 수도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홍하델타의 타이빈(Thai Binh) 성 7개 현 중 6개 현에서 농민들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농민들은 당초 공공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였으나 지방정부에서 시위자들을 해산하기 위해 경찰을 투입하면서 시위가 확대되었다. 시위자 규모는 3천 명에 이르렀고 시위대가 경찰관 20명 정도를 5일 동안이나 인질로 잡아두기도 하였다고 한다. 퇴역 군인 또는 퇴직 관료에 의해 조직된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기부금, 기반시설의 건설에 필요하다며 징수한 세금을 지방 관료들이 착복한 것에 분노하여 지방 관료들을 구타하고 그 재산을 강탈하며 집을 불태우는가 하면 인민위원회 청사를 파괴하였다.
1998년 5월 북부 홍하델타의 남딘(Nam Dinh) 성에서도 농민들이 부패한 지방 관료의 임의적이고 과도한 세금 부과와 공공자금의 유용, 토지분규에 관한 불평을 성 당국에 제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남부에서는 1997년 11월 동나이(Dong Nai) 성에서 가톨릭 신자들 1만 명이 지방정부의 교회 토지 몰수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고 부패한 지방 관료의 처벌을 요구하며 그들의 집을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

만연한 부패에 대한 염증

이러한 농민 저항의 주요 원인은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전횡에 있다. 베트남에서 부패는 도처에 만연해 있다. 제 10차 당 대회 때 공산당 총비서 농 득 마인(Nong Duc Manh)이 지난 5년 동안 부패로 4만 명에 가까운 당원을 기율 처분한 것은 긍정적 측면이라고 평가하였지만, 베트남에서 부패는 여전히 만연해 당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9년 11월에는 부수상 한 명이 하노이 서호(Ho Tay)에 건설하는 놀이공원과 관련한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임하였고, 2004년에는 농업부장관이 부패와 관련하여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 2002년 6월에는 공안부 차관과 국영라디오방송 사장이 폭력조직 남깜(Nam Cam)사건과 관련하여 해임되었다. 남깜사건으로 약 80명의 관료를 포함하여 최소한 109명이 체포되었고 200명 이상이 조사를 받았다.


  

 

지난 4월의 제 10차 당 대회 직전에도 교통부 산하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t, 공적개발원조) 담당자들이 일본이 제공한 ODA 자금을 횡령하여 축구 도박에 걸거나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여 고위층에 상납한 사건이 발표되었다. 이로 인해 차관과 담당자가 체포되고 장관이 사임하였다. 이에 연루된 당 고위인사들이 있어 당 대회 개최 직전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차기 지도자 후보 명단을 새로 짤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제 10차 당 대회에서 베트남 사회의 그늘진 면이 부각되면서 개혁의 속도를 가속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이러한 부패의 만연은 사회주의 이상을 포기하고 개인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당 간부와 국가 관료들의 도덕성 상실에 주요 원인이 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민주집중제’의 논리에 따라 수직적으로 구조화된 체제 속에서 ‘민주’보다는 권력의 ‘집중’으로 생긴 폐단이다.
이에 대해 과거 당이나 정부의 고위직에서 활동했던 일부 인사들은 비판적 논설을 발표하여 공산당의 신뢰 회복과 민주화의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예로 퇴역 장군 쩐 도(Tran Do)가 1997년 12월 자유선거와 사상과 표현의 자유 보장 등을 포함하는 급진적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편지를 공산당, 국회, 정부에 보내고 이를 외부에 공개하는 사건이 생겼다. 당시 74세였던 그는 농촌 소요사태가 발생한 타이빈 성 출신으로 이데올로기, 문화, 문학, 예술 등을 담당하는 당의 고위 간부를 역임하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현재의 경제개혁은 급진적 정치개혁을 필요로 한다고 전제하고 당으로의 권력집중이 당 자체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조직과 당의 핵심부에서 솔직하고 건설적인 의견 교환이 이루어져야 하며 민주화가 문제해결의 방법이라고 촉구하였다.
2005년 3월, 라디오 프리 아시아는 수상 자문역, 계획투자부 산하 중앙경제관리연구원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계획투자부 자문역을 맡고 있는 레 당 조아인(Le Dang Doanh)이 2004년 11월 공산당 정치국의 비공개 회의에서 주변국가보다 베트남의 경제실적이 부진한 이유를 정부의 정책 과오 때문이라고 비판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그는 공산당이 권력에만 집착하고 당원들은 부패하고 낭비적이며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부정이 도처에 만연하며, 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체제라고 비판하였다.
지난 제 10차 당 대회를 앞두고도 체제 내 비판은 가열되었다. 당 대회 직전인 2006년 1월 말 이래 베트남 내에서 공산당의 무능력과 리더십의 부재를 비판하는 논의가 전개되었고,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원화, 자유화 주장들이 제기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지식인, 저널리스트, 경제학자, 법률가, 공무원까지 참여하였는데 전임 수상 보 반 끼엣(Vo Van Kiet)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전직 외교관이며 수상 자문역인 응웬 쭝(Nguyen Trung)이 2006년 1월부터 인터넷 신문 베트남넷(vietnamnet.vn)과 뚜오이쩨(Tuoi Tre, 젊은이) 신문에 게재한 논설에서 “당내 민주주의가 결여되었고, 당이 방향을 잃었다”고 비판하여 국민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체제 내 비판자들의 논설이 신문에 실리고 인터넷으로 유포되면서 사회의 다원화와 당내 민주화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여론은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하며 자유화를 확대하도록 변화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트남 정치의 ‘민주화’

다양한 사회의 저항이 곧 자동적으로 정치체제의 개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나 점진적 변화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공산당과 국회의 변화는 베트남에서 민주화의 전망을 밝게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 10차 공산당대회에서는 공산당의 권력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종래에는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여 정치국과 비서국 위원을 선출하고 정치국 위원 가운데 단일 후보에 대하여 신임을 묻는 형식으로 총비서를 선출하는 메커니즘이었는데, 이번에는 당 대회에서 총비서 후보를 복수로 추천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하는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160명의 중앙위원회가 아닌 1,200명의 당 대회에서 총비서 후보를 추천하였다는 점, 총비서 후보가 복수였다는 점은 당내 민주화 확대의 중요한 징표가 된다. 또한 제 9차 당 대회에서는 당 총비서의 임기를 2회까지로 제한하는 규정을 신설하여 권력의 장기 독점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한 바 있다.

국회의 변화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베트남에서는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제도상 후보자는 베트남조국전선이 주도하는 ‘협상’과정을 통하여 선발하도록 되어 있다. 베트남조국전선은 전 사회단체의 상위조직으로 공산당의 지도하에 있으므로 공산당의 영향력이 입후보과정에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후보자 선발과정에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후보자에 대하여 입후보 자체를 사전에 제한하고 있어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음은 명백하다. 




선거과정의 미시적 변화는 아직 미약하지만 개혁과정에서 점차 확대되어 왔다. 이러한 변화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조금씩 확보해 가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2년 제 9기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선거구별로 후보자가 의원 정수보다 많아야 한다는 선거법 규정을 적용하여 의원 정수가 3명인 선거구는 후보자를 5명, 의원 정수가 2명인 선거구는 후보자를 4명으로 하였고, 후보자가 정치·사회단체의 추천을 받지 않고 자기추천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92년 제 9기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명 입후보, 1997년 제 10기 선거에서는 11명 입후보에 3명 당선, 2002년 제 11기 선거에서는 14명 입후보에 6명 당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에는 소수민족과 여성 후보자를 일정 부분 확보해야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였고 비공식적으로 공산당 외 인사들을 일정 부분 포함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1998년부터 국회 회의를 생방송하여 국회에서 장관이 답변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방영함으로써 국민들에 대한 국회의 책무를 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국회에서 행정부의 예산안과 법률안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 행해지기도 한다.
베트남이 추구하는 개혁이 경제부문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하듯정치부문에서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결합하고자 한다. 양자의 장점을 어떻게 잘 결합할 것인가? 자유주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이제는 탈색해버린 원대한 사회주의의 이상을 회복하여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천해가는 게 과제일 것이다.


글·사진 제공 이한우
베트남 개혁정책에 관한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대우 교수로 있다. 베트남의 정치와 경제를 주요 연구 분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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