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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1일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15년 망명생활을 마치고 테헤란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이란국민들이 호메이니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혁명의 기가 당신 손에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종교적,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지도자입니다’라고 쓴 깃발들이 물결을 이루었다. 호메이니는 이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지지자들에게 말했다. “이 나라에서 모든 외국인을 다 몰아내면 우리들의 마지막 승리는 올 것입니다. 나는 신에게 모든 사악한 외국인과 그들을 원조하는 자들의 손을 잘라버릴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공항연설 이후 그는 곧바로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테헤란 남쪽의 베헤쉬테 자흐라(Behesht-e Zahra) 공동묘지를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현 바흐티야르 행정부를 팔레비 정권의 나약한 헐떡거림이라고 비방하면서 “바흐티야르 정부의 입을 주먹으로 칠” 정부를 즉각적으로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 연설을 시작으로 이란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전개되었고 곳곳에서 군대와 대치국면이 발생했다. 2월 10일 오후 4시 바흐티야르 수상은 통행금지를 실시했지만 호메이니는 군대가 국민들에 대한 살상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이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마침내 2월 11일 혁명은 승리했다.
이란의 민주화운동 수많은 학자들이 이슬람혁명이라는 특이한 혁명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과 해석을 시도했다. 이러한 분석은 한편으로는 친미적인 팔레비 왕정체제에 대한 반독재운동을 강조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사회에서 시아파 성직자의 영향력 확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슬람혁명의 원인에 대해서 다양하게 분석할 수 있지만 그 혁명의 본질은 바로 이란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란의 민주화 운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는 1953년 군사쿠데타 이후로 이란 민주화 운동의 태동기이다. 이 시기에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 2기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로 팔레비 정부의 폭정에 대항하여 전국적인 시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저항조직이 결성되었다. 제 3기는 1978년부터 이란 민주화운동의 전환기로 혁명운동으로 급격히 변화되었다. 이란의 민주화 운동은 1953년 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란에서는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고양되었으며, 1941년 소련의 지원으로 결성된 투데당이 테헤란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주의세력의 결집체인 국민전선이 창설되어 이란의 정치에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였다. 당시 영국·이란 석유회사는 이란의 석유뿐만 아니라 이란의 정책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이란국민들의 불만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이란에서는 외세의 개입에 반대하여 석유의 자주적 관리를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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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9일 국민전선의 지도자 무함마드 모사데크(Muhammad Mosadeq)가 수상으로 선출되어 5월 1일 석유의 국유화정책에 대한 법안을 승인했다. 영국은 자국의 기술자를 철수시키고 미국과 함께 이란석유수출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게 된 모사데크 수상은 좌파계열인 투데당과 연합했다. 미국은 이란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직접 개입을 시도했다. 1953년 미국 CIA(미국 중앙정보국)의 지원(아작스 작전, Operation Ajax)을 받은 자헤디 장군의 군부쿠데타가 일어났고 모사데크 민족주의정부는 전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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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비의 공포 정치 모사데크 축출 이후 팔레비 국왕은 주요 정당을 해산하고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비밀경찰(사바크, SAVAK)을 창설하여 정적 제거와 반대파 탄압을 시도했다. 1957년 팔레비는 CIA의 도움으로 사바크라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사바크는 5,300여 명이 넘는 요원과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수의 시간제 정보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팔레비는 한편으로 이란사회의 근대화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1963년 1월 그는 토지 개혁, 문명 퇴치, 여성 참정권 부여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백색혁명을 실시하며 주요 정당을 해산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다. 호메이니는 반왕정 투쟁을 주장하면서 3월 21일 이란 설날에 상복을 입을 것을 호소했다. 호메이니의 호소에 따라 점차 심각한 국면이 나타나자 팔레비는 낙하산 부대를 콤 신학교에 보내 폭력적인 진압작전을 감행했다. 또한 팔레비는 이 소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호메이니를 곧바로 체포하였다. 팔레비는 호메이니를 석방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너는 무슨 설교를 해도 상관없지만 다만 세 가지 자유, 독립과 이란에서 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후에 절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호메이니는 “그것이 안 된다면 내가 할 얘기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답변했다. 1964년 10월 팔레비는 미군에 대한 외교면책특권법안과 군비강화를 위한 2억 달러 차관 신청 법안을 통과시켰고 호메이니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서 미국에 종속된 친미정권이라고 규정했다. 11월 4일 새벽 4시경 특공대원들은 콤에 있는 호메이니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고 곧바로 해외로 추방시켰다. 팔레비는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점차 국정운영에 자신감을 갖고 강력한 왕정체제를 구축하였다. 1967년 10월에는 그동안 미루었던 왕위 대관식을 거행하였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제국 건국 2,500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 반왕정투쟁에서 약 12만명의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팔레비 자신이 시인한 수감 중인 정치범의 수는 3,200명이라고 밝혔지만 해외기관에서는 25,000명에서 30,000명 정도로 추정했다. 1975년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은 “세계에서 어떠한 나라도 이란보다 더 나쁜 인권유린 행위를 저지른 기록이 없다”고 지적했다.
학생 중심의 반정부 조직활동 이란의 민주화 운동은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해 2월 8일 무장한 13명의 젊은이들이 카스피해 부근 시아칼 마을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했다. ‘시아칼 사건’ 이후 팔레비 정권에 대항한 게릴라운동이 확산되었고 1977년 10월까지 341명의 무장 게릴라 요원이 목숨을 잃었다. 341명 중 306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는데, 지식인 280명, 노동자 22명, 상점주인 3명, 성직자 1명이었고 296명이 35세 이하로써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다. 이 시기에 두개의 게릴라 조직이 결성되었다. 한 조직은 이란의 마르크스운동을 주창한 페다야네 할크 (Fedayan-e Khalq)이고 또 다른 조직은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를 결합시킨 무자헤디네 할크(Mujahedin-e Khalq)였다. 사실 두 조직은 1960년대 중반 비밀조직으로 결성되었으나 1971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게릴라투쟁을 실시했다. 무자헤디네 할크는 테헤란대학교 이공학 계열 학생들이 중심이었고 페다야네 할크는 테헤란대학교 인문사회과학 계열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두 조직의 지도세력은 지식인과 대학생이었고 1971년에서 77년 사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1975년 6월 콤 신학교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고 이에 찬성하는 많은 군중들이 그 주위에서 대규모 집회를 진행했다.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서 팔레비는 특공대원과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공격했고 3일 동안 지속된 시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호메이니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이 임박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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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에는 2건의 의문사 사건이 발생했다. 6월 19일 알리 샤리아티가 런던의 아파트에서 의문사를 당했다. 알리 샤리아티는 이슬람과 마르크스이론을 결합시킨 대표적인 이슬람사상가로 이란의 대학생들과 신학생들 사이에서 열렬한 추종세력을 가진 인물이다. 1974년 구속되어 18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이후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1977년 런던으로 와 3주 만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해 11월 29일에는 이라크의 나자프에서 호메이니의 장남 무스타파가 의문사 당했다. 이란당국은 사망원인을 협심증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호메이니와 그의 측근들은 사바크에 의한 독살이라고 주장했다.
혁명운동의 출발 1978년에 들어와서 이란의 상황은 반정부 시위에서 혁명운동으로 발전했다. 계기는 팔레비 정부가 망명중인 호메이니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 1월 7일 팔레비 정부는 호메이니가 영국의 간첩이며 동성애자라는 음해기사를 언론에 게재했다. 이에 대해 콤 신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로 항의했지만 군대에 의해서 무력 진압 당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나타났다. 이 사건은 점차 이란 전역으로 확산되어 거대한 민주화 운동의 불꽃이 되었다. 이란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상가는 항의의 뜻으로 문을 닫았다. 타브리즈에서는 군대의 무력진압으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타브리즈 사건 이후 40일째 되는 3월 29일에는 약 55개 이란 도시에서 시위가 나타났다. 이 시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은 야즈드였는데, 사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군대는 무차별 발포를 했다. 8월 17일 팔레비 정부는 에스파한에서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도시에 군대를 투입하여 수 백 명의 비무장 시위자들을 살해했다. 이틀 후에는 아바단의 시위 군중들이 경찰을 피해 극장으로 들어간 후 화재가 발생해 약 400여 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광신도에 의한 방화라고 밝혀졌지만 이란국민들은 이러한 내용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반정부 감정만 격화되었다. |
9월 4일 이드 알 피트르(Id al-Fitr, 무슬림희생제)에는 모든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와 행진이 진행되었고 약 4백 만 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호메이니는 이 종교행사에 대해서 “압제를 와해시키고 이슬람의 목표를 전진시키는 시위는 예배의 한 형태입니다. 그 목적이 국민을 구하고 이슬람의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에 기초한 신성한 정부의 형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팔레비는 반정부 시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민주화 투쟁은 점차 거세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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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해방을 염원하는 이란 국민들 9월 8일에는 검은 금요일이라고 알려진 대학살극이 발생했다. 9월 7일 계엄령 선포에 항의하기 위해 곳곳에서 항의집회가 개최되었다. 테헤란에 있는 잘레 광장(Zhaleh, 이슬람혁명 이후 순교자 광장으로 개칭됨)에 집결한 군중들이 나가는 모든 출구를 봉쇄한 가운데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시위를 벌이는 테헤란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살상했고 약 2,000여 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팔레비 투쟁은 점차 확산되었다. 10월과 11월에는 테헤란 석유 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노동자 총파업이 나타났다. 이 파업은 초기에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이었으나 점차 정치투쟁으로 발전했고 투쟁구호도 ‘팔레비에게 죽음을’, ‘사바크에게 죽음을’로 변화되었다. 12월초에는 이란전역에서 종교지도자, 야당,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12월 10일 시아파 최대 종교행사를 맞이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순교를 하겠다는 증표로 하얀 수의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다음날 11일 아슈라(시아파 3대 이맘 후세인의 순교일)에는 2백만 명의 시민들이 반팔레비 투쟁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벌였고 18일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1979년 1월 16일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다. 이슬람혁명은 이란 민주화운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란국민들의 저항운동은 반독재투쟁으로 나타났다. 자유와 해방을 염원하는 이란국민들의 소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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