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2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 …… 땅이 좁을수록 주거의 크기는 엄격히 제한되어야만 약자의 몫이 있게 된다. 요약하면 나의 몫을 누리는 것이 정의요, 그의 몫을 두는 것이 연대의식이다. 그러므로 나의 몫과 함께 그의 몫이 동시에 있는 것이 평화다.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 제정구, 1988)
사람의 자리
제정구에게 집이란 삶의 총체적인 자리요,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누려야 할 ‘몫’이었다. 주거가 ‘있는 자’들의 사치와 향락과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삶의 유린이요, 나무를 뿌리째 뽑아 던지듯 강제철거를 자행하는 것은 삶의 말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단 이주는 뿌리 뽑힌 나무들이 한데 모여 살아갈 터전(숲)을 만드는 노동과 건설의 과정이자, 철거민 스스로 패배의식과 열패감을 씻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과정이요, 이웃간에 정과 생활을 나누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양평동 판자촌에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면서, ‘복음자리’ 사랑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 공동체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제정구와 주민들의 선택은 역시 ‘집단 이주’였다. 정일우 신부를 비롯한 다른 공동체 식구들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나’의 몫’과 ‘그’의 몫이 공존하는 ‘평화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순탄할 리 없었다. 주민들의 악착 같은 이기심과 싸우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언제든지 장부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제정구 형제와 정일우 신부의 생활비가 건축비에서 충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등을 조목조목 설명해도, 주민들의 의심은 끝이 없었다. 하루도 싸움 없이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모진 세파를 거치면서 불신을 먼저 배워버린 사람들은 ‘나의 몫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의 몫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수긍하려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도 공동 작업에 일당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고, 심지어 정일우 신부와 제정구가 ‘집장사를 한다.’느니, ‘부동산 투기를 한다.’느니, ‘주민들이 낸 돈을 마구 쓰고 다닌다.’는 말을 마구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
“왜, 술 마시면 ‘꼬장’ 부리는 사람 있잖아요? 밤에 가지도 않고 방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개별적으로 시비 붙어 오고 그러면, 마냥 받아주지 않아요. 그냥 치고받을 때는 불 같아요. 주민들이 뭔가 술수를 쓰고 거짓말하고 그런 거 절대 못 보죠. 피하는 법이 없어요. 늘 정면 돌파지. 그런데 특별히 제 선생한테 더 많이 깨진 사람들이 그때의 정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우리 기념사업회에서 제일 열성적인 회원이죠.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는 거야.” (박재천) |
공동체를 꿈꾸며 만든 복음자리 1977년 말, 마침내 복음자리 마을의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다. 신천리 황량하던 벌판에 늘어선 집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자부심은 굉장한 것이었다. 8개월 만에 170세대가 살아갈 터전을 지었다는 긍지는 가난한 이들의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을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웃을 얻었다는 점이었다. 공사 과정은 집을 짓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사람다운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람다운 삶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복음자리 마을은 겉모습부터가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시골 마을을 닮았다. |
작은 집에는 담도 대문도 없으니, 방문만 열면 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알 수 있다. 공동 화장실과 우물, 마을회관 등 대부분의 시설을 공용으로 지어놓은 탓에, 주민들은 눈만 뜨면 이웃들과 부대끼고 정을 나누며 살게 된다. 제정구가 꿈꾸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제정구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뿌리 깊은 열망 같은 것이 있었다고 정일우 신부는 회고했다. 그는 제정구가 복음자리 마을을 짓게 된 정서적·철학적인 배경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시골 공동체에 대한 향수, 둘째는 자연에 대한 사랑, 셋째는 빈자의 자유. “정구는 고성의 시골마을에서 자라난 어린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자연 안에서 자라난 사람은 그걸 버릴 수가 없어요. 죽기 2년 전이었던가. 내가 괴산 청천면에서 농사 짓고 있을 땐데, 정구가 놀러 온 적이 있었어요. 하루는 차를 타고 나하고 정구하고 아름이 엄마(신명자)하고 산길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야겠다는 거예요. 산길 양쪽에 숲이 있는데 정구는 그 나무숲 사이를 계속 걸어가고 있었죠. 그걸 보면서 정구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가, 그 생각을 했죠. 잊혀지지 않는,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죠.” |
제정구는 복음자리 마을을 진정한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생계대책이 없는 가난한 주민들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공동체를 구상하던 끝에 1979년에 복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고, 아름농장, 한우협동조합 등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철거 걱정 없는 내 집, 내 땅에서 산다는 안정감 속에서 주민들도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때마침 마을 근처에 공장이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취직하는 행운도 있었다. 주민들은 불과 2년 만에, 신천리 땅을 매입하기 위해 독일에서 빌린 돈을 전액 갚게 되었다.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0년에는 제2차 정착촌 한독마을과 목화마을이 잇달아 들어서게 되었다. 흩어지는 공동체 복음자리 마을의 성공에는 또 다른 작은 공동체의 힘이 숨어 있다. 정일우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과 수녀들, 제정구 부부, 동생 제정원, 박재천 부부, 신명호, 김영준 등 성직자와 평신도, 비신도가 어우러진 작은 공동체가 서로 이웃한 집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공동체의 취지는 ‘그냥 함께 살아보자’는 것. 이들은 하나의 부엌에서 한솥밥을 먹었으며, 번 돈을 모두 모았다가 각자 필요한 만큼 덜어다 썼다. 타인과 한 집에서 완전히 열어놓고 산다는 것은 아픔과 불편과, 속상함과 어려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제정구는 이 공동체 생활을 ‘참 인간이 되기 위한 용광로’라고 표현했다. ‘열어놓기 위해서, 수용하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마을 주민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자치 능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1980년 중반에 이르자, 마을을 건설할 무렵 중·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아이들도 의젓하게 자라, 신협과 생산공동체, 작은자리 회관 등 마을의 각종 실무를 담당할 만한 유능한 일꾼이 되었다. 작은 공동체 성원들은 자연스럽게 더 낮은 자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흩어지는 공동체’. 시흥 3개 마을에서 자신들이 한 역할을 마감해도 좋은 시기가 된 것이다. 정일우 신부는 상계동 철거 현장으로, 박재천과 김영준은 각각 행당동과 무악동 빈민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제정구의 또 다른 자리는 어디였을까. |
그가 6·10항쟁을 거친 뒤 정계에 입문하는 과정을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만, 7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격변의 현대사와 함께 한 그의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능히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 식구들이나 그의 지인들 중에서 그의 정계 입문에 찬성하고 나선 이는 거의 드물었다. 그의 평생 도반이었던 정일우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격상 정치할 사람이 못 돼요. 타협할 줄을 몰라요. 정치는 타협하는 거 아니예요? 그리고 거짓을 도저히 참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났어요. 복음자리 마을 지을 때 그렇게 큰 돈을 만졌는데 십 원도 일 원도 옆으로 돌아간 것이 없어요. 공과 사가 너무 구별돼 있어요. 도대체 무슨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이렇게 깨끗한가. 진리 앞에서는, ‘이것이다, 끝!’ 이런 성격인데, 정계에 들어가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구가 나한테 말하더군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독물을 마시고 가셨다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었었죠.” (정일우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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