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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경제론 쓰러지다 뇌졸중 환자들은 별다른 계기 없이도 괜히 웃거나 우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감정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긴 탓이다. 박현채는 우는 쪽이었다. 그가 쓰러진 1993년 여름부터 세상을 떠난 1995년까지 약 2년 동안 그가 흘린 눈물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흘리기에도 벅찬 분량이었다. 울음은 그의 말이었고 실천이었으며, 박현채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간절한 신호였다. 그는 쓰러지기 얼마 전부터, 오래전 산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들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떨궜다. 이미 언어 장애가 오고 있을 때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차린 뒤에도 박현채는 종전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다. 대학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고,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입 밖에도 잘 내지 않던 빨치산 시절을 회고록에 담기 시작했다. 상당한 집중력과 뇌세포의 긴장을 필요로 하는 독서나 글쓰기는 뇌졸중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이때쯤 그는 벌써 죽음을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그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살아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따금씩 입에 털어 넣는 한 움큼의 약도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일 뿐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박현채는 말문을 닫은 채 오래도록 병상에 누워 지냈다. 그는 문병 온 사람을 알아보기라도 하듯 간간히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제대로 분간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는 그저 울 뿐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울음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읽어 내곤 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마음이 한없이 쓸쓸하고 가난해진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눈물을 대신 흘리고 있다고 느꼈다.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사건 당시 한 오랏줄에 묶였던 연분으로 막역지우가 된 박중기(민족민주열사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는 박현채를 깊은 울음의 징역에 가둔 그것을 ‘좌절이라는 이름의 질환’이라 불렀다.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990년 들어 동구가 무너지면서 그 좌절이라카는 거는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던 사람이라면 다 앓는 질환이었죠. 박 교수가 병을 얻게 되는 동기도 그 충격이 크지 않겠어요? 소년 빨치산에서부터 평생을 그렇게 뼈를 깎고 살았는데…….” 긴 울음의 끝은 죽음이었다. 1995년 8월 17일, 박현채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그를 잊었다. 더 이상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의 이론 틀로 세상을 보지 않았다. 박현채, 그는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역시, 그 주인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후배 경제학자들은 그의 낡은 정치경제학으로는 요동치는 21세기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해석할 수 없으며, 외국 자본과 국내 자본의 구분조차 모호해진 오늘의 지구화 시대에 자급자족형의 재생산기반을 강조하는 민족경제론적 관점은 이미 이론적, 실천적 의미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박순성(동국대 교수)과 김균(고려대 교수)은 「정치경제학자 박현채 : 한국경제학사의 관점에서」라는 논문에서 박현채는 여전히 ‘진행중인 현재’ 라고 말했다. 나는 이 글이 박현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진보적 사회과학자치고 그의 여전한 영향, 어떤 정신의 뿌리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현채는 진행 중인 현재이다. 이 현재성의 근거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도덕성일 것이다. 박현채가 살다간 한국현대사는 험난했고, 그 속에서 그는 ‘혼신의 힘으로 쓰고 혼신의 힘으로 살았’(『민족경제론』 머리말)다. 그 시대의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이런 힘은 그의 실천적 이론과 신념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자기 사회와 시대에 대한 지식인의 애정과 책무의 분출이라 해야 할 것이다. …… 그는 단순한, 실천적 이론의 노예가 아니었다. 제 민족과 가난한 자에 대한 충만한 사랑에 복종하는 도덕성. 이론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지적 도덕성. 이러한 도덕성을 삶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견지하는 보다 큰 도덕성. 우리는 이것이 박현채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이만한 크기의 도덕성을 사회과학자 중에서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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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빨치산 『태백산맥』 9권 첫 머리에 나오는 ‘위대한 전사 조원제’는 조정래가 쓴 박현채 평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6년, 막 출간된 『태백산백』 1부를 읽고 깜짝 놀란 박현채는 “내 체험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한번 들어보겠냐.”고 조정래에게 제안했다. 빨치산 투쟁을 했던 사람들을 찾아내느라 발품깨나 팔고 있던 조정래로서는 실로 고마운 제안이었다. ‘전라도 천재가 다 모인다는 광주 서중에서 세포 책 총책’을 맡았고, ‘입산 후 능력을 인정받아 문화부 중대장까지 올라가면서 빨치산 투쟁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까지 갔던 빨치산 출신 젊은 학자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해 준다니 조정래는 보물을 건진 기분이었다. 조정래는 그와 함께 백아산을 오르내리며 소년 박현채가 빨치산 시절에 만난 사람들, 죽어가는 동료들이 흘린 눈물, 손발을 얼어 터지게 한 세찬 눈발, 18세 소년의 가슴을 두드리던 밤 하늘 별들에 대해 듣고 또 들었다. 박현채의 이야기는 가공할 필요조차 없는 생생한 드라마였고, 그대로 조정래의 붓 끝을 타고 『태백산맥』 7~10권에 스며들었다. 박현채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좌익 활동에 뛰어든 것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아버지와 친척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외삼촌을 비롯한 양가의 친척 중에는 좌익 진영에 몸담은 이가 많았다. 그들에게서 체계적인 학습을 받은 박현채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튀는 학생이었다. 독서회 활동을 했고, 동맹휴학을 주도했으며,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나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같은 책들을 탐독하기도 했다. 이러한 책들은 박현채에게 ‘역사적 격동기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향후 진로를 선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그가 끼고 살다시피 한 『자본론』과 『사회과학사전』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는 파업에 나선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광주와 화탄(화순 탄광) 간의 거리는 약 30리 거리였지만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화탄 노동자들은 도보로 광주 행사에 참여하였다. 우익 측인 독립촉성회 노인들의 참여에 비할 때, 그들의 강건한 현실참여는 모든 사람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민족의 운명을 나약한 늙은이들에게 내맡기기보다는 젊은 생산계급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던 주먹밥은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결국 민족의 새로운 내일을 걸머쥘 힘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박현채의 회고록에서) ‘생산적 활동만이 민족의 장래에 기여하리라’는 극좌적 사고(회고록)를 가졌던 그는 공업학교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광주공업학교에 응시한 그는 신체검사 결과 적녹 색맹으로 판명되어 낙방하고 만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희망대로 광주 서중에 들어갔고, 순식간에 동기생들의 리더로 떠올랐다. 박현채와 같은 시기에 입산했던 광주 서중 동기 이춘형(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은 서중 시절의 박현채를 이렇게 회고했다. “현채는 공부를 참 잘했어. 놀다가도 서울 상대에 들어갔으니까. 그때 시골에서 서중에 합격했다 하면 일단 요주의 인물이 되는 거야. 둘 다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멤버였으니 경찰 끄나풀 노릇을 하던 야간부 학생들의 감시가 대단했지. 그런데 현채는 조직력이 아주 뛰어나서 사람들을 자기의 영향력 밑으로 다 끌어넣어. 즉, 적들도 감탄하고 자기를 좋아하게끔 다 만들었어. 워낙 활동이 두드러지니까 조직에서 현채를 리더로 지명했어. 6·25 나고 입산하기 전까지 현채는 청년동맹 활성화를 주도하면서 학교 재건에 앞장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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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박현채는 입산하여 무등산과 백아산에서 연락병 노릇을 했다. 그의 별명은 대꼬챙이.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높이 산 당에서 18세의 그를 입당시키려 하자, 20세가 되어야 입당할 수 있다는 당규를 들먹이며 거부할 정도로 그는 원칙주의자였다. 허나 때로는 자기보다 어린 빨치산들의 주린 배를 달래려 규칙을 깨고 소를 잡았다가 견책을 받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원칙주의자였다. 1952년 8월 박현채는 경찰에 체포되어 2년 동안의 빨치산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그를 살린 것은 쌀가마니였다. 세무공무원이자, 해마다 소작인들이 갖다 바치는 멍석이 수백 장씩 쌓일 정도로 부유했던 그의 아버지는 쌀가마니로 경찰들의 입을 막았다. 온 집안이 광주 상류층 인맥을 총동원하여 박현채 구명 운동을 한 덕분에 그는 광주를 떠나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전주로 삶의 터를 옮긴다. 훗날 박현채는 이때의 쓰라린 경험과 좌절이 “이후의 삶에서 일종의 원형적 모티프가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박현채, 『민족경제와 민중운동』) |
‘현실의 몽둥이’에 얻어맞지 않는다
전주로 간 박현채가 1954년 뒤늦게 전주고 3학년에 편입할 때까지 무엇을 고민했고, 어떤 일을 하였는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춘형의 증언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무렵 그는 좌충우돌하는 고민 속에서, 산에서 만난 여성 동지와 짧은 연애를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을 두 남녀의 사랑은 저절로 쉽게 타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머니의 심한 반대와 불안정한 미래는 두 사람을 이별하게 만들었다. “1950년대에 현채하고 만나서 영화도 보고 술도 한 잔 하고 그랬거든. <내가 마지막 본 파리>라는 블란서 영화였는데, 현채가 그걸 보고는 많이 울어. 주인공이 애인하고 헤어지는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울더라고. 나중에 물어 보니까 그런 사연이 있었더라고…….”(이춘형) 전주고에서 보낸 1년 동안 그는 광범위한 독서와 사색을 통해 경제사를 전공하기로 마음먹는다. 경제사는 약자의 편에서 설 수 있고 역사 발전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1955년 서울 상대에 입학하여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당시의 약자인 농민의 입장에서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1959년에 발족한 한국농업문제연구회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연구회가 단순히 농업 문제만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입장에서 새로운 이론을 키우는 곳으로 거듭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실천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전투적인 이론가였다. 그는 이론가로 현실의 뒷전에 남아 있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다져진 해박한 사회과학적 지식은 상대 교수들마저 쩔쩔매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독설가였고, 다혈질에 욕쟁이였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주장 앞에서는 선배도, 은사도 없었다.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축은 뒤에서 ‘박현채한테 욕 빼면 뭐가 남느냐.’고 투덜대곤 했다. 상대 내 학회인 농업경제연구반 시절에 박현채와 인연을 맺은 후 1970년대 내내 그의 저술 작업을 도왔던 임동규(민족무예 경당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똑똑한 학생 정도가 아니었죠. 서울 상대 교수들로부터도 외경의 대상이었던 거예요. 지적 능력이나 무슨 문제의식에 있어서나 조순 선생이나 이현재 선생 같은 양반도 박 선생 앞에서는 한풀 깔아 줘야 하는 거요. 변형윤 선생하고도 교수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함께 토론하고 연구하는 동지적 관계였죠.” |
*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 사진제공 / 경향신문, 박현채 전집·추모문집 발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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