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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참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

우리 민족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크게 두 번 역사의 실패를 경험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도 모자라 민족이 분단되었다. 20세기 내내 억압과 갈등구조가 재생산되었던 우리 사회가 이제 분단 60년을 지나 21세기의 문턱을 넘은지 여러 해.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고 정치·경제·문화의 완전한 민주주의를 확보하지 못했다. 미군기지 이전문제로 촉발된 평택 대추리 농민들의 아픔과, 민의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끝내 사회적 약자 계층의 피눈물을 강요하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독주 그늘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절대 다수 경제적 빈곤층의 신음이 계속되는 오늘. 우리 민족은 다름없이 그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희망세상』은 2007년 새해를 맞아 분단시대의 극복을 위해 쉼 없이 연구하고 실천해 온 역사학자이자, 현재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인 강만길 교수를 찾았다.

2006년 12월, 서울

2006년 12월 14일, 시청 앞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은 전날의 FTA반대집회 흔적이 말끔히 치워지고 성탄절과 연말연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주변을 장식과 조명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인공 청계천이 시작되는 부근, 청계빌딩에 위치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에서 강만길 교수를 만났다. 밝고 온화한 얼굴, 맑고 깊은 눈빛이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강만길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소년시절에 태평양전쟁과 민족해방을,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말기에 처참한 6·25 동족상잔을 겪은 뒤 많은 동년배가 전장에서 죽었는데도 요행히 살아남아 그 죄책감과 책무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 한평생을 역사학자로 살면서 이승만 독재와 4·19혁명, 5·16쿠데타와 유신독재 그리고 피로 물든 5·18민중항쟁과 6·10민주항쟁을 체험한 그. 일기를 쓸 수 없었던 분단민족의 불행한 역사학 전공자. 그러나 분연히 일어나 그는 민중에게 이 시대의 역사인식에 변화를 요구했다. 식민사론 극복뿐 아니라, 민족분단의 원인을 단순히 일제 식민통치와 미·소의 분할점령에 무게를 두는 것보다 민족 스스로가 실패한 역사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지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먼저 우리 민족이 걸어온 현대사, 역사실패에 관하여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뼈아픈 회한이고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전과 같은 불안한 발걸음의 연장선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 우리 민족은 선생님 말씀처럼 20세기에 여러 번의 역사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민족분단의 현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어느 정도의 발전은 이루었으나 우리 사회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민주주의를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21세기를 맞은 지금 과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있는지요?
 

“지난 20세기에 우리 민족은 불행했습니다. 전반기는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그 뒤에는 분단이 되어 전쟁을 하고 서로 대립했습니다. 이승만 독재를 거쳐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폭압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엽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군사독재시대를 청산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이고, 그것이 곧 21세기 우리 역사를 열어가는 전주곡이 될 것입니다.”

답변은 예상치 않게 너무도 명쾌하고 희망적이었다.

“오늘 21세기 시대의 절대가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에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사회적 민주주의 그리고 문화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이 성공함으로써 상당히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드문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역류 없이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문제는 경제적 민주주의에 있습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해방된 국가 중에 아마 우리나라가 경제규모 순위로는 맨 윗자리에 있을 겁니다. 국가 경제 규모가 세계 11위라 하지 않던가요? 어떤 이는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제적 민주주의는 산업화에서 오는 열매를, 국가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루 가질 때 오는 것입니다. 성장도 중요하지만 성과를 얻은 만큼 함께 나누어 모두가 나은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만 더 부자가 되는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경제적 민주주의의 발전 여하에 따라서 결국 정치·사회·문화적 민주주의의 성장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모든 부분의 민주화는 거꾸로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문화적 민주주의란 사상의 자유인데, 우리 사회는 많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30년 군사문화 부분이 잔재해 있습니다. 언론을 비롯해서 개인 사상의 자유 발전을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진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반드시 직선으로 가지는 않지만, 그런 역사의식이 높아져야 인간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는 우리민족의 분단청산 즉, 통일의 역사적 전망에 관하여 여쭈었다.

분단시대를 넘어 통일로 가는 길
 
- 선생님은 2000년 남북정상이 만나 6·15공동선언을 발표하는 현장에 계셨습니다. 역사학자로서 감회가 깊으셨을 텐데,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6월 14일 밤, 평양의 백화원초대소 연회장이었습니다. 남북의 정상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고 ‘우리 공동선언 합의했습니다!’ 외치고 기뻐했습니다. 감격이었지요. 남북의 관계자가 약 5~60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엄청난 역사현장에 남북을 통틀어 역사학자는 저 혼자뿐이었어요. 그곳에서 저는 우리 민족이 통일할 수 있는 방법은 ‘협상통일’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통일의 형식은 대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쪽을 무력으로 침범하여 얻는 전쟁통일이 있고 체제를 흡수해서 이루는 흡수통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통일은 그런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전쟁과 갈등을 통해서 불가능을 경험했습니다. 위의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승전국이 패전국을 집어삼키고 흡수한 쪽이 흡수당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평화통일론’입니다. 거기에 구체적 실천 의지를 더해 만든 것이 저의 ‘협상통일론’입니다. 베트남식 전쟁통일이나 독일식 흡수통일이 아닌, 협상통일은 시일이 많이 걸리는 통일방법입니다.

우선 앞 단계에 반드시 서로 ‘평화공존’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뒤에 협상을 통해 통일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북이 합의한 6·15공동선언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6·15공동선언으로 이미 ‘협상통일’은 시작된 겁니다. 전쟁통일과 흡수통일 방법만이 있었던 20세기적 통일인식, 분단시대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통일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21세기적 통일방안을 창조하고 실천해야만 비로소 우리 민족의 새로운 역사가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 6·15공동선언은 통일운동 역사 위의 큰 분수령인 동시에 선생의 ‘협상통일론’의 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만나 민족의 문화유산을 발굴·보존하고 기록하는, 통일 이후의 역사기술 문제를 논의해 가는 일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다. 지난 2002년 구성된 ‘남북역사학자협의회(남측공동위원장 강만길·북측공동위원장 허종호)’가 그것이다. 벌써 여러 차례 만나서 합의를 이끌어 내었는데, 남북합의서(2002.9.11)에 의하면, 북일 수교 조약 시 일본 소재 약탈된 우리 문화재의 반환부터 개성을 유네스코 기념도시로 지정하는 일 그리고 통일국가의 국호(영문표기)와 북쪽의 고려 궁궐터와 고구려 벽화 등의 여러 문화재를 발굴 보존하는 일까지 남북 역사학자들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었다.

허락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선생이 위원장으로 있는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의 활동에 관하여 질문을 했다.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일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지 일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간의 성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슨 친일파 민족문제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실정법으로 누군가를 벌주려는 게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려 는 것입니다. 문화 수준이 높은 민족 일수록 자기 역사 속에서 부끄러운 점도 드러내어 가르쳐 다음에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합니다. 반면에 그러지 못한 민족은 자기 역사 속에서 자랑스러운 부분만 드러내어 과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도 그래왔어요. 해방 후 60년 동안 우리는 독립운동사 이야기하는 데 급급했고 아무도 친일 반민족 문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박은식과 신채호 외에는 역사학 쪽에서 지금까지 반민족에 관한 논문 한 편이 없어요. 오로지 문학 쪽의 친일문학론(임종국)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식민지근대화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역사청산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우리 위원회는 그러한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끄집어내어 청산하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누가 친일을 했는가 만을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어떻게 어떤 논리를 가지고 어떤 성분의 사람들이 왜 친일을 했는가를 근본적으로 밝히려고 합니다. 그것을 가르쳐 앞으로는 이 땅에서 반민족행위를 하는 무리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록 위원회가 4년의 한시적 기구이지만, 일단 이렇게 문을 열어놓으면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더 깊이 있는 연구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선생은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빠져있는 독립운동사의 한 축인 좌익운동의 복원에 대해서도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제까지 일제시대 독립운동은 우익운동이 전부였고 좌익운동은 따로 떼어내 공산주의운동이라고 해왔는데, 이것을 하나로 합치는 ‘통일지향 우리민족해방운동사’를 저술해 우리 역사에 편입시켜야 할 것이라고 했다.

겨울의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안을 비추었다. 나는 끝으로 아주 일상적이고 편한 질문을 드렸다.

-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희망세상』 독자에게 선생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끝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루어낸 민주화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입니다. 우리 역사 전체를 통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 역사를 우리 스스로 열어간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유물을 보존하고 기념관을 만들어 후손에게 오래도록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전쟁기념관과 같은 역사의 불행한 자국을 기리는 경우도 있는데. 하하하.”

취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 아주 환했다. 보기 드물게 나는 그날,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 머리 위로 높이 뜬 해를 보았다.


글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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