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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운동사 정점의 현장, 조계사

 


한국 불교운동사 정점의 현장,
조계사

 

올해는 1987년으로부터 꼭 20년이 되는 해이다. 20년 전, 한 젊은이의 죽음은 민주화를 바라던 민중의 열망에 불을 지폈고 군부독재정권은 잠시나마 백기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깨뜨린 보도블록 조각을 들고 싸웠으며, 최루탄 자욱한 시위 현장의 높은 빌딩 유리창에서 쏟아진 두루마리 휴지들은 마치 살풀이춤의 하얀 수건인양 너울너울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해 2월부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산발적이면서 격렬한 시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6월 10일 범국민대회를 시작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5백여 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동인이 된 6월민주항쟁. 바야흐로 2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난 올해에는 그해의 민주항쟁을 기리기 위한 행사들이 많이 치러진다.
이달 3일(토)에는 불교계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연다. 그날은 박종철 열사의 49재가 20주년을 맞는 날로 서울 조계사 앞에서 천도재와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린다.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일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며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기도하는 불교의식인 49재는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넋을 달래는 상징의식으로 행해져 왔다. 이것은 바로 20년 전 3월 3일,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아타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산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서도 안 된다. 난폭한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이것은 ‘고 박종철 영가 49재 천도식’을 알리는 유인물에도 적혀 있는 글귀이다. 그랬다. 스님들은 부처님 말씀을 따라 살생을 묵인할 수 없어 선방에서 나왔다. 더구나 악랄한 정권의 손에 스러진 넋이었으니, 권력 유지를 위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잔악무도한 폭력 앞에서 마침내 불교계가 나선 것이다.

 




 

49재 천도식 봉행 발표와 번복

 

요 몇 년 사이에 조계사의 외관이 많이 변했다. 도로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앞이 트이고 일주문이 서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조계사와 도로 사이에는 불교용품을 파는 상가들이 들어서 있었고, 상가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로 꺾어 들어야 비로소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발걸음을 하게 된 그곳에서 잠시 어리둥절하게 도로와 일주문과 대웅전을 번갈아 바라보다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 아래에서 이용성(47세, 풍경소리 사무총장) 씨를 만났다. 당시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의 집행위원장 대리를 맡고 있던 그는 20년 전 3월 3일, 조계사 앞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상세히 들려주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다른 의문사 사건과는 달리 사건 발생 2~3일 만에 세상에 알려졌고, 사회적 반향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각 종교·사회단체가 연대하여 ‘고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불교계에서는 지선과 진관 스님이 공동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2월 7일에 1차 범국민 추도대회가 열렸고, 2월 7일부터 살해당한 지 49일째가 되는 3월 3일까지 전국적으로 농성과 항의집회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2월 25일부터 3월 3일을 ‘고문 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불교 기도주간’으로 정해 정권의 부도덕성에 항변했다.

되는 3월 3일까지 전국적으로 농성과 항의집회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2월 25일부터 3월 3일을 ‘고문 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불교 기도주간’으로 정해 정권의 부도덕성에 항변했다.
이렇듯 모든 일정이 3월 3일에 맞춰진 것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서의현이 조계사에서 49재 천도식을 봉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이 1월 20일이었으니, 고문치사가 일어난 지 불과 6일 만의 발표였다. 박종철 군의 부모님이 독실한 불자여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의 영혼을 불교의식으로 위무하겠다는 뜻이긴 했어도 이례적이면서 의아스러울 만큼 신속한 결정이었음은 분명했다.
49재를 불과 일주일 앞둔 2월 23일, 서의현은 조계사에서의 49재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박 군의 부모님이 다니던 부산 사리암에서 봉행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름하여 ‘불순분자’들이 섞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젊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조계사에서 천도재를 강행키로 했다.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와 민중불교운동연합,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중앙승가대학 학생회, 동국대학교 석림회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의 발표와 번복이었다. 박종철 군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반향이 크긴 했어도 불교계의 사회 참여가 지선, 진관, 청화 등 몇몇 뜻있는 스님들 개인적으로 이뤄졌을 뿐, 종단 단위에서 행한 적이 없었던 데다 단 6일 만에 그러한 결정을 내리고 발표를 했으니, 종교계의 결단이 고맙고 반가우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또한 그 결정과 취소를 주도했던 서의현 총무원장은 이후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대해 지지 성명을 냈고, 결국 1994년 종단개혁운동 때 자격을 박탈당한 인물이었던 만큼 49재를 봉행하겠다고 했을 때 여러 불자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하루가 다르게 격앙되어 가는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전두환 정권이 조계사에 49재를 무마책으로 제시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정권의 예상과는 달리 살인정권에 대한 분노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조계사의 종교적·지리적 입지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급기야 취소케 만들었을 것이다. 이용성 씨 또한 그러한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여하간 정권의 개입이 있었든 없었든, 중요한 것은 조계사에서 49재를 꼭 치르겠다는 스님들과 재가들의 의지였다. 그날 조계종단의 공식적인 49재는 부산 사리암에서 오전 10시부터 치러졌다. 물론 그곳에서도 ‘불순분자’들의 출입은 철저히 차단되었고, 가족과 스님, 신도들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계사는 전면 봉쇄되었다.

 


 

거리로 나선 스님들

 

“불가에서는 49재를 보통 사시(巳時)에 봉행합니다. 그래서 오전 11시에 조계사에서 모이기로 했어요. 하지만 그 일대가 전경들로 봉쇄되었기 때문에 2백 명 정도만 조계사 앞까지 올 수 있었어요.”
50여 명의 스님, 150여 명의 대학생과 청년 불자들이 조계사 앞 도로에서 대오를 형성했다. 박종철의 영정과 위패를 든 스님들이 맨 앞에 서서 염불을 외며 조계사 정문을 향해 행진했다. 그러나 좁은 골목은 전경들로 완전 차단되었고 얼마간의 대치와 몸싸움 끝에 그 자리에서 약 5분 동안 약식 천도재를 진행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최루탄이 날아들었다. 맨 앞쪽에 집중적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지선, 명진 스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결국 골목에서 밀려나온 나머지 대오는 종로에서 규탄집회를 열고 있던 시위대에 합류했다. 조계사 앞에서는 지선 스님과 불자 7~8명이 연행되었다가 훈방 조치되었다.

 

 

이용성 씨는 그날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3월 3일은 한국 불교 역사상 가장 많은 스님들이 거리로 나선 날입니다. 또한 스님들이 맨 앞에 서서 전경들과 직접 부딪쳐 싸운 유일무이한 날이지요. 10·27법난 이후 사회 민주화와 불교 자주화를 위한 불교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박종철 열사의 49재를 통해서 비로소 불교 내적인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겁니다.”
승복을 입고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 선 승려. 화염병도 쇠파이프도 없이 맨손으로 전경들 앞에 선 승려. 상상만으로도 그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고 또한 위력적이다. 당시 전경들 역시 스님과 대면하는 것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어느 스님이 백골단에 둘러싸였다. 무술경관으로 구성된 백골단의 손아귀를 무사히 빠져나가기란 어렵다. 그러나 스님은 공중으로 떠올라 360도 돌려차기를 한다.

 

백골단은 순식간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 같지만, 3월 3일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용성 씨가 들려준 목격담인 것이다. 어딜 가도 꼭 한두 명씩은 소림무술을 연마한 스님이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비폭력 저항이지만, 폭압적인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무기가 필요했고, 거리로 나선 젊은 스님들은 스스로의 몸을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1979년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한 뒤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 49재에 참여했던 법안 스님(49세, 북한산 금선사 주지) 또한 그날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민중의 고통을 아파하고 그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날은 그러한 현실에 대해 반성하고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고자 하던 스님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날이었습니다.”
비록 전경들에 가로막혀 노상에서 천도재를 치러야 했고, 최루탄과 백골단의 위력에 밀려 3~40분 만에 해산되었지만, 49재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광주, 대전, 부천 등 전국적으로 봉행되었고, 범국민추도위의 주도로 ‘범국민 민주화 평화대행진’ 또한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개최되었다. 그야말로 49재가 불교의례를 넘어 민중의례로 치러졌던 것이다. 불교운동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스님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등 각 지역마다 적은 수 나마 스님들의 참여가 있었다.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모색

 

오는 3일 있을 49재 20주년을 기념하는 천도재는 ‘6월민주항쟁 20년 사업 불교추진위원회’가 주관한다. 6월민주항쟁과 1994년 종단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결성된 추진위는 지나간 20년에 대한 참회와 반성과 불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진정한 민주사회를 위해 힘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추진위의 운영위원장직도 겸하고 있는 이용성 씨는 무엇이든 ‘기념’하는 것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며 말을 떼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고,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특히 기념행사가 잇달아 열리는 올해에는 그러한 생각이 더욱 클 것이다. 그는 추진위를 불교계의 양심적이고 민주적인 모든 세력을 결집시키는 상설기구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나는 인터뷰 내내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전용철, 홍덕표 그리고 하중근 열사의 죽음이 무엇이 다른가 생각했다. 산 것을 죽여서도, 남을 시켜 죽여서도,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서도 안 된다는 부처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사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범상하고도 범상한 것이다. ‘6월항쟁에 나선 수많은 양심세력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라는 말은 이제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대보다 더 암울한 시대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걷어내는 희망 한 줄기를 신성하고 숭고한 종교를 통해 만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20년 전 그날과 더불어 2007년 3월 3일도 역사에 남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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