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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을 향한 한평생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민족의 길, 예술의 길

 

언젠가 시인 김지하는 예술이란 ‘기록이라는 이름의 기억행위’라고 말했다. 우리가 삶을 돌아볼 때 제일 큰 게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잊음’이며, 또 예술에 있어서는 긴장이 흐트러질 때가 잊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늘 왜 살고 있는 것인가. 때때로 우리는 삶의 이상, 삶의 뜻을 망각하고 살지 않는가. 삶 속에서 지혜를 잊고 예술에서 긴장과 창조적 상상력을 잃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메마르겠는가.
설을 앞둔 지난달 15일(목), 『희망세상』 취재진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오랜 세월 제도권 밖에서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운동과 문화운동 그리고 후학을 가르쳐온 김윤수 선생이 이제 일흔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그곳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작품과 자료를 수집·보존과 전시, 조사·연구와 국제교류 그리고 미술활동의 보급과 교육을 도맡은 기관의 수장이 되었다. 김윤수 관장을 만났다.
그는 한때 혁명적 로맨티스트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걸어온 길,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삶과 민족미술운동에서 보여준 실천적인 활동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건 미술 문외한인 내게 너무도 고마운 축복이어서 벌써 가슴 가득히 감동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 선생님은 1973년 장준하, 백기완 선생이 주도한 ‘개헌청원 30인 선언’에 동참하신 이후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과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 그리고 구속학생 석방운동에 열심이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도피 중인 학생을 피신시킨 이유로 구속되고 그 뒤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족미술인협의회와 민족예술인총연합회 등에서 문화운동을 이끄셨습니다. 그러한 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가 있으신지요.

 “특별하게 동기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렇듯이 그 무렵 제게도 어떤 부채감 같은 것이 있었죠. 학생들이 나서서 싸우고 끌려가고 하는데 지식인이랍시고 책만 보고 앉아 있을 수 없었지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말도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자란 환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거예요. 아버님이 일제 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 선생님은 재야에서 활동하시다가 제도권의 예술행정을 맡으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미술에 관하여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먼저 우스갯소리 하나 하지요. 제가 이곳 관장이 되고난 얼마 뒤였어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인 교수를 만났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한국은 참 재미있는 나라다. 김 교수 같은 반체제 인사가 어떻게 제도권 중심에 들어가 국립미술관 관장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역동적 현상이라는 거지요.(웃음) 그렇지요. 그런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이고 희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식민시대를 지나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있다 해도 아직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문화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독창적 문화유산을 민족주의적 예술관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세계화시대라는 이름 아래에서 민족주의는 곧잘 편협주의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갇히거나 닫힌 생각이 아닙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을 사는 데 더욱 필요한 삶의 방식이자 예술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 미술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딘가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작가들의 예술적 성과나 경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리에게 훌륭한 작가와 작품은 많이 있습니다. 모두 소중하지요. 그러나 한편으론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켜 꽃피워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끊임없는 자기갱신을 통해 이루어내야 할 가치들을 찾아 상상력을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삶의 방식이 변화하더라도 작가는 현실에 밀착하려는 노력도 함께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문화적·사회적 모순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 해, 미군기지 이전문제로 고통 받는 대추리 주민에게 달려간 미술인들의 용기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식민지배의 폭압을 민중 스스로의 정화를 통해 벗어나야 한다는 흑인해방운동가 프란츠 파농이 주장한 이론에 저는 아직도 동의합니다. 인류 문명사의 흐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질서라는 것이 결국 그 형태만 바뀔 뿐, 속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사회적 모순에 다가가 밀착해야……. 


  - 우리의 민중미술은 한국미술사를 크게 전환시켰습니다. 일제와 독재의 그늘에서 밀납처럼 굳어버린 한국 미술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주의 이념과 미학이 자리 잡은 미술의 사회화이기도 하며 또한 미술의 민주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계신 오늘의 자리가 더 막중하게 느껴집니다. 임기가 2009년까지인데,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힘써서 이루려는 일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외국인들이 <한국근·현대사>라는 작품을 보고는 한눈에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를 이해하겠다며 재미있어 했어요. 이렇듯 민중적이고 독창적인 예술은 세계 어디에서든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미학자 고유섭(1905~44) 선생은 그때가 일제시대인데도 우리는 민족적인 줏대를 가지고 미술(예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어서 결코 생활과 종교와 예술이 떨어져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오늘에야 어떻겠습니까. 그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해야 하지요. 거기에 답이 있지요.”


- 미술이론가로서 선생님의 모습이 읽혀지는 부분입니다. 선생님은 오래전 박정희의 독재가 제 모습을 드러낼 무렵인 1969년에 젊은 미술인들과 함께 ‘현실동인’전을 기획하시고, ‘현실을 미술로 발언하겠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줄곧 멈추지 않고 민중·민족미술이 발전하는 데에 이론적·정신적인 지주이셨습니다. 오늘 다시 그 명제를 실천한다면 어떤 형식의 미술이 되어야 하는지요.

“저는 이곳에 와서 국내 뿐 아니라 외국의 여러 미술작품을 만나 비교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의 작품이 외국에서 전시되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2005년과 지난해 프랑크푸르트와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신학철 선생의 작품전시는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가끔 이곳이 과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임해왔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즐기는 삶을 살지 못했어요. 제겐 젊은 시절부터 지녀온 좌우명이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학자의 말인데, ‘모름지기 지식인은 먼저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은 맨 나중에 즐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신조로 살아왔습니다. 또 그것이 양심적인 지식인이 사회를 위해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제가 임기 중에 역점을 두고 하려는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미술을 세계 속에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 사람을 국내로 불러 모으는 것으론 모자랍니다. 작품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지요. 우리가 가진 문화의 힘을 세계에 떨쳐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미술관을 대중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민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서 우리 미술을 알리고 보급하며 교육하는 것입니다. 보다 많은 대중에게 문화의 향수를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술은 그렇게 마침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진보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마침내 인간의 삶을 기름지게 하는 것

우리는 자리를 옮겨 미술관 바깥으로 나가 조각공원 뜰을 걸었다. 햇살이 좋았다. 설치미술 작품을 일일이 안내하며 설명을 해주시는 선생은 영락없이 온화하고 품이 넓은 우리들의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선생은 또 내가 인천에서 왔다고 하니까 인천문화재단의 최원식 교수의 안부를 물으며 옛 시절을 떠올리셨다. 국문과 학생인 최원식이 자신의 미학과 예술학 강의를 들을 때를 기억하며 즐거워 하셨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시작된 고유섭 선생에 대한 연구와 학술제를 칭찬했다.  

취재를 마쳐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일종의 기대 같은 것이기도 하고 편안한 응석 같기도 한 마음으로 선생의 건강을 기원했다. 작고 낮은 목소리 그리고 어딘가 여윈 듯한 모습에서 왠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판화가 홍선웅(민미협 조직국장과 사무국장 역임)의 말처럼 기우일 것이다. 선생은 겉으론 부드럽고 온화하나 그 속은 곧고 강한, 깊은 강물 같은 덕을 지녀 오래도록 우리 곁을 지키실 것이라고 했다.
선생의 교수정년 기념집 『민족의 길, 예술의 길』(2001, 창비)을 보면, 그는 우리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980년대 리얼리즘 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그 운동에서 사실상 이론적·도덕적 무게를 가지고 힘을 실은 분이라고 적혀 있다(유홍준). 한국 미술사에서 선생은 그 만큼 상징적 자리에 있는 것이다.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작가회의 회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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