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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권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은 [남영동 대공분실]

 
 

“머릿속은 텅 비고 몸만 발악했습니다. 욕조의 물이 입으로 코로 눈으로 내 몸 안으로 액체덩어리처럼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 덩어리들이 내 몸 안의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쑤셔댔습니다……. 나는 쿨럭쿨럭 토악질을 해대다가 멱이 따져 숨이 꺼져가는 돼지새끼처럼 컥컥 숨만 헐떡거렸습니다. 뱃속이 요동을 치고 목울대를 치면서 쓰디 쓴 물이 밀려나왔고, 다시 그 입 속으로 물이 흘러들어와 청산가리처럼 속을 태웠습니다. 그 역겨움으로 코가 막히고 입이 막혀, 빠져나갈 수 없는 숨결이 몸속을 불길처럼 벌겋게 달궜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디까지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을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일. 육체만 살아남아 발악하며 이성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감마저 말살된 채 한 마리 짐승으로 만드는 일. 그리하여 마침내 강제로 자백하게 만드는 일. 그것을 고문이라고 한다. 누대에 걸쳐 민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 포악한 국가권력은 고문을 즐겼고, 정권이 붕괴하기 전까지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보며 고문을 권력 유지를 위한 필수 장치로 생각했다.  


그리고 대개 자충수가 되어 돌아오는 고문 때문에 정권은 내리막길을 치닫다가 결국 막을 내리게 마련이었다.
위의 인용 글은 이인휘의 장편소설 『내 생의 적들』에서 다뤄진 물고문 장면의 일부이다. 고문을 당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심리상태를 통해 198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야만과 고문 피해자들이 겪었던 처참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없는 사실을 자백받기 위해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능력을 지닌 자를 고문기술자라고 부를 만큼 고문은 숙련된 기술과 치밀한 계산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의 말도 뭣도 아닌 기가 찬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사태가 닥친다.

 

갈월동 88번지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지난달 14일(일), 물고문을 당하다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박종철 열사의 2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 짙은 밤색 벽돌의 7층 건물 전면에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여전히 스물세 살의 순수하고 앳된 모습이지만, 세월은 그를 온전히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빠르게 흘러와 버렸다. 올해 여든을 바라보는 아버지 박정기 씨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다가 사회운동가가 되어 아들이 못다 산 세월을 대신 보냈지만, 인권은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고 있으며 당시의 고문 은폐 기도가 청와대까지 결합한 권력기관의 합작품이라는 진상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주소지는 갈월동이지만 국철 남영역 가까이 있기 때문에 통상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불리는 그 건물이 악명 높았던 고문실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남영역 오른쪽 골목 안, 호텔 두어 채와 모 회사 사옥 사이에 끼여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데다 역무원들도, 주변 상가 사람들도 아는 바가 없어 그 일대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왔다는 노점상 아주머니를 소개받고서야 위치를 알 수 있었다.
 


1976년 대간첩 수사업무를 목적으로 세워진 남영동 대공분실은 작년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전 2000년에는 경찰청에서 달갑지 않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박종철 열사가 고문 치사한 509호실을 제외한 16개 조사실의 욕조를 없애고 집기를 들어내는 등 개조작업을 했다. 인권보호센터로 개명은 했지만 욕된 역사를 이름 하나로 걷어낼 수는 없는 법이니, 외벽의 칙칙하고 음울한 느낌과 건물 형태의 위압적인 느낌은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을 성 싶었다. 그리고 보통의 건물과는 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것이 그 건물의 정체를 스스로 폭로하는, 가리려야 가릴 수 없는 증거물인 셈이었다. 바로 창이었다. 다른 층에는 모두 일반적인 너비의 널찍한 창이 달려 있었으나, 16개 고문실이 있던 5층에만 유독 좁은 창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너비 15cm를 넘지 않을 것 같은 그 창들은 고문실 내부에서나 밖에서나 몹시 인상적인 풍경으로 각인되었다.

 

그곳에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해 간첩으로 조작된 함주명 씨, 수학자 안재구 박사 등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특히 김근태 씨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직을 맡고 있던 1985년에 이곳으로 끌려와 23일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그는 빛과 어둠으로 날짜를 가늠해가며 고문자의 인상과 이름을 거듭 외웠고, 법정에서 대공분실의 지옥도를 생생하게 증언하며 제시했던 발뒤꿈치 상처의 피 묻은 딱지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문을 입증하는 증거물이 되었다. ‘이름 모를 전기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던 대공수사관 이근안은 10년 10개월의 도피 끝에 자수해 7년형을 살다가 지난해 11월에 만기 출소했다.

일상화된 고문이 결국 죽음을 부른 것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김근태 고문사건은 모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관련자 26명을 고문·구속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이었던 민추위는 1985년 삼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을 주도했다. 그리고 <깃발>이라는 정치적 신문을 발행했는데, 그래서 이 사건은 일명 ‘깃발사건’으로 불렸다.  

 

 


당시 민추위 위원장이었던 문용식(49세·나우콤 대표이사) 씨는 같은 해 8월에 3개월의 수배 끝에 남영동에 잡혀왔다. 눈을 가린 채 끌려와 10여 명의 수사관들에게 떠밀려 뛰다시피 올라간 곳은 515호실. 그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기다린 수사관들은 고문실에 들어서자마자 30분 이상 집단구타를 했다. 그리고는 바로 온몸을 발가벗기고 칠성판에 묶었다. 망자를 보내기 위해 관 속에 까는 널조각을 일컫는 칠성판을 고문 기구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 김근태 씨에게는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각오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사관들 역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넓은 회의용 탁자 크기의 칠성판에 옴짝달싹 못하게 발목, 허벅지, 배, 가슴을 묶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주전자로 물을 계속 부었다. 물에 젖은 수건이 달라붙으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입 속으로 끊임없이 물이 들어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의사표현은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예’라고만 대답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이었다. 그들이 퍼붓는 질문은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북한에 언제 갔다 왔느냐, 노동당에 언제 입당했느냐, 입당 번호는 몇 번이냐 같은 것들이었다. 이처럼 터무니없는 질문을 던지며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불가항력의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수사관들도 그런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캐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완전히 제압을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지요.”
육체적인 고통은 극에 달했다가 10분 정도 지나면 일시적으로 해소가 되었다. 더 무서웠던 것은 ‘다시 고문당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럴 때마다 심리적 파탄과 공황 상태가 왔다. 수사관들은 터무니없는 질문으로 고문을 하며 이러한 엄청난 공포감을 심어놓은 뒤 실제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민추위를 자생적 사회주의 조직으로 보고 이적단체로 규정한 공안당국은 수배 중인 학생운동 조직의 지도부를 잡아들이고 눈엣가시였던 민청련을 와해시키기 위해 문용식 씨로 하여금 허위자백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는 대공분실에 감금된 20일 중에 초기 3~4일 동안 집중적으로 칠성판 고문과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을 번갈아 당하며 결국 허위자백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끌려와 전기고문을 당했는데, 수사관들은 당연히 맞을 수가 없는 두 사람의 말을 꿰맞추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다시 문용식 씨에게 고문을 가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 앞에서 누군들 버틸 수 있을까마는, 김근태 씨의 비명소리를 바로 앞방에서 들어야 했던 그는 허위자백으로 인한 죄책감과 정신적 고통을 떨쳐내는 데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수사관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고문실을 벗어나 집에 돌아가면 남편이고 아버지고 신도이기도 한 평범한 사람으로 천연덕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들은 자식의 진학을 걱정하며 문용식 씨에게 어떻게 하면 서울대에 들어가느냐, 특별한 공부 방법이 있느냐, 라고 물었다고 한다. 물론 그 중에는 시키는 대로 자백하고 하루라도 빨리 나가라며 그나마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며 회유한 사람도 있었으나, 야만과 이성이라는 양면성을 가졌던 그들 역시 권력유지를 위해 극단으로 치닫던 군부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인성 파탄에 이른 또 다른 피해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고문을 통해 목적한 바를 달성해나가던 공안당국은 고문의 위험성을 곧잘 망각하기에 이른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한 마디로 고문에 맛을 들인 것이다. 그렇게 고문이 일상화·상투화되어 갔으니, 박종철의 죽음은 그 전부터 준비되었던 것이다. 민추위 조직원이었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잡아들였던 것인데, 박종철 v 열사가 그 당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그 무렵 그와 같은 죽음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일이었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고문 피해자들

 

문용식 씨와 함께 초기에 고문을 받았던 515호실과 김근태 씨가 잡혀온 이후에 옮긴 514호실을 둘러보았다. 두 방은 칠성판을 놓을 수 있도록 다른 방보다 두 배 정도 넓었다. 피고문자들이 반항하거나 자해할 수 없도록 모든 집기들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개조 이후 집기들은 다 들어내고 고정 나사만 바닥에 흉물스럽게 박혀 있었다. 낮에도 항상 전등을 켜야 할 만큼 어두운 방에는 폭이 좁고 아래위로 기다란 이중 창이 두어 개 달려 있었다. 탈출은커녕 바깥을 내다볼 수도 없을 만큼 좁은 창을 통해 들려오던 것은 남영역을 통과하는 전철 소리뿐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알고 봤더니 515호실이 VIP방이었더라며 그는 22년 만에 그곳에 처음 와 보았다고 했다. 감회가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고문당하던 기억은 생생하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일은 여전히 유쾌하지 않다고 전했다. 잊고 싶어도 일 년에 한 두 번은 이런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 의식적으로라도 당시의 일을 끄집어내고 되새겨야 하니, 그가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역사적 책임감 또한 만만치 않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독한 고초를 겪었고, 그 후유증으로 거의 3년 동안 입에서 역겨운 물 냄새가 가시질 않아 고생을 했지만, 그는 그래도 다행스러운 축에 속했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씨는 고문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아직도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다. 또한 민추위 사건과 관련하여 수배 중에 있다가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우종원 씨의 경우는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들 가족의 상처와 고통은 또 오죽하겠는가. 박정기 씨의 바람대로 그곳에 박종철기념관이 들어서 청소년들이 인권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소로 탈바꿈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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