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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빛 [청화 스님]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 12·12쿠데타 군부는 전국 주요 사찰에 계엄군을 투입해 스님과 재가 신도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군부는 그날 이후 며칠에 걸쳐 전국 3천여 곳의 사찰에 진입했는데, 그때 낙산사 원철 스님이 사망하고 송월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 이하 승려와 관련 민간인 55명을 연행, 98명의 참고인을 불러 모두 153명을 조사하여 그 가운데 승려 10명, 민간인 8명을 구속하고 32명은 불교정화중흥회의에 회부시켜 승적박탈, 또는 종직사퇴토록 위임했다. 이른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그들의 권력장악에 호의를 보내지 않던 불교계를 향해 ‘범법자 색출과 불교정화’라는 우스꽝스런 명분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군홧발로 짓밟은 1980년 10·27법난이다. 당시 계엄군에 끌려간 스님들은 이유 없이 무차별 폭력과 고문을 당했고, 그 수모는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10·27법난은 1,600년이 넘는 한국 불교의 존엄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일부 권력야욕에 빠진 군인들이‘길들이기’ 하려 했던 수모였고 절망이었다. 그것은 일제가 조선 불교를 황민정책의 도구로 삼으려 했던 탄압과도 비슷한 것이어서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10·27법난은 한국 불교사에서 사회 민주화와 불교 자주화를 이루고자 하는 불교운동의 토양이 되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의 서슬 퍼런 공안정국을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뚫고 불교를 아끼고 민중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던 스님들과 불자들이 한국 불교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사회현실에 대한 성찰을 통해 다시 중생구제의 대서원의 횃불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되자, 불교계는 출·재가자 연합조직인 민중운동불교연합을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사회민주화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조계종 승려 152명이 ‘민주화는 정토구현이다’라는 제하의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이어 승려 221명이 발기하여 한국불교의 반역사적·반민중적 보수성을 반성하고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에 대한 사명과 임무를 천명하며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정토구현승가회)를 창립했다. 정토구현승가회는 곧바로 5·3인천시위와 관련하여 구속된 성연 스님과 재가자들의 석방운동과 더불어 정권의 부도덕성과 반인륜성에 대항하여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해나갔다.(『불교운동사』)

조계사의 겨울 

10·27법난으로부터 26년이 지난 오늘, 『희망세상』은 17세에 출가하여 정토구현승가회의 초대 의장을 지내고 1986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과 1997년 민주개혁국민연합 공동의장 그리고 현재 6월민주항쟁20년사업추진위원회 상임공동대표인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64)을 서울 조계사에서 만났다.

 

 이른 시간임에도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를 빠져나와 조계사로 오는 동안 바람은 차지 않았다. 계절이 계절답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거나 불편해 할 처지가 아님에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러나 살펴보면 어디 한 군데 편하고 평화로운 곳이 없다. 지하도 콘크리트 계단에 웅크리고 있는 허기진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하고, 조카나 이웃의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허둥대는 것이 그렇고,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그렇다.

조계사에 들어서자 대웅전과 마당에 불자들이 넘쳤다. 부처를 향해 복을 기원하는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이 대웅전 뜰과 마당에 넓은 강처럼 그득했다.
청화 스님의 얼굴은 참으로 맑고 온화했다. 투명한 햇빛이 그의 몸을 통과해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조금은 가벼운 질문으로 취재를 시작했다.

 - 스님은 1977년 불교신문과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조 시인이시기도 합니다. 혹시 출가하신 동기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나요?
“허허허, 사실 저는 어릴 적부터 몽상가적 기질이 있었어요. 그게 아마 사랑방에서 본 김삿갓이나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책 탓이 아니었을까 해요. 봄·가을이면 무수히 상념에 젖곤 했어요. 결정적으론 춘원이 쓴 산사에 관한 산문이었지요. 그걸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때부터 사찰을 동경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출가했어요. 스님을 운수납자(雲水衲子)라 하지 않나요? 하하하…….”
그러나 청화 스님은 불교에 실망하기도 했다. 스님이 되면 글을 잘 써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입문한 것이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불문에선 문학책이 외서(外書)로 정해져 읽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실상 수행과정에 다른 생각을 품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문학으로의 꿈이 하도 강해 절망 또한 컸다. 여관에서 수면제 57알을 삼키고 누웠다가 검문 나온 경찰의 눈에 띄어 병원으로 실려가 깨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열망은 식지 않았고 몸에 병이 찾아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맞기도 했다.

대서원(大誓願)의 횃불을 들다 

 - 만해 한용운 스님이 떠오릅니다. 일제에 맞서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불교이론을 사회적으로 실천하신 투사이셨습니다.

“감히 저와 비교가 되나요. 수행자로서 지향했던 삶을 볼 때, 만해 스님은 보통 수행자가 아닙니다. 당대의 시대적 사명감과 세계를 보는 높은 안목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런 식견이 없으면 고집불통 문제승이라고 비쳐지기도 했겠지만, 그 분은 불교 뿐 아니라 유교경전까지 두루두루 섭렵한 높은 식견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피하려는 것까지 과감히 수용하고 실천하신 계몽가이자 철학자이고 시인이었습니다.”

 - 청화 스님께서도 어둡고 참담했던 군사독재에 항거하시고 지금도 평택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한미자유무역협정 등 시국현안에 대해 앞장서 저항하고 계십니다. 스님께서 사회민주화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사실 저는 10·27법난 이전까지는 오로지 내 길만, 수행자의 삶만 고집했었습니다. 감히 누구를 흉내 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10·27법난은 한마디로 종단의 승려를 유랑 잡승으로 매도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욕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몇몇 스님들과 뜻을 같이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처음엔 무슨 논리를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습니다. 떠밀려서 갔다고 보아야지요. 하하하…….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어요. 전두환 독재정권의 반인륜적 폭력에 만인이 치를 떨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민주화의 물꼬를 터 6·10항쟁으로 이어졌잖아요? 박종철 군 49재를 조계사에서 치르려 했는데, 사흘 전부터 형사 7명이 저를 연금시켰습니다. 그때 비로소 제 가슴에 가깝게 화살처럼 와서 박힌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논리의 당위보다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저항의식으로 다가왔습니다. 1980년대는 군사독재로 인한 공포의 시대, 민중의 절망시대였습니다. 독재가 가진 권력은 그 사회에서 가장 강한 힘입니다. 그러나 그건 결국 한 사람의 횡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심은 다릅니다. 천심이지요. ‘대나무 밭에 대나무가 아무리 빽빽이 있어도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고, 아무리 산이 높다 해도 흘러가는 구름을 막을 수 없다’는 옛 선사님의 글이 있습니다.

 


  

 

끝내 우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수준은 어떤가요?

“도처에 암울했던 기운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봅니다. 20년 동안 우리는 어느 정도 민주화의 제도적 틀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삶에까지 닿아 영양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부분이 아직 모자라고 부족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중생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민주화를 이루고 맞는 네 번째 대통령 선거입니다. 민주주의는 이제 착근단계입니다. 식물도 착근 이후가 중요합니다. 비로소 그때부터 뿌리를 내려 성장하고 튼튼해지는 겁니다.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의 정세를 보면 그 뿌리가 아직 튼튼하지 않은데 혹여 뽑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늪으로 빠지지 않아야겠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얻은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런 민심의 흐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

- 벌써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끝으로 여쭙겠습니다. 위대한 지혜와 자비의 실천자인 석가모니 석존께서는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 진보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가난은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므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이 증진되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제에 관련한 말씀 그리고 더하여 희망에 관하여 한 마디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은 남의 불행(고통)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삶에 필요한 경제는 올바른 방법으로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주의에 빠져 본위를 잃었습니다. 경제활동에 도덕성이 없습니다. 많이 차지하고 나만 잘살고자 합니다. 바르게 살려 하는 것이 빠져 있습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목적만 이루려고 합니다. 내 이익을 얻기 위해 남의 고통 위에 행복의 집을 지으려 합니다. 이 얼마나 부도덕한 모습입니까. 많이 가지고 능력 있는 자들의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산업사회의 병폐이고 큰 위기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인간 본위를 자각해야 할 때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본질은 사람의 문제입니다. 시대도 사람이 이끄는 것이므로 모두 사람 탓입니다. 나와 남을 동일시해야 합니다. 가난도 상대적인 것이지요. 탐욕을 버리면 넉넉하지 못해도 나보다 가난한 자를 껴안을 수 있습니다.
만공(1871~1946) 선사님의 게송 중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한 때를 만나면,
거기서 다시 한 발을 더 내 딛어야 좋은 것이다.
자기 욕심과 자기 견해를 죄다 털어버려야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스님은 오찬 약속이 있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무언가 풀지 못한 갈증 같은 것이 아직 넘치게 남아 아쉬웠으나, 스님을 놓아드렸다. 조계사를 나와 다시 도심을 걸으며 나는 발걸음이 무거워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깥 공기가 전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홍인기
1960년 출생. 19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현재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작가회의 회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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