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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얼룩진 태백 광산

 

 

강원도는 흰 눈과 검은 석탄이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폐광 후 14년이 지났어도 그 강렬한 대비는 여전히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다. 1993년 폐광이 되기 전까지 강원도 일대는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탄광도시의 명맥을 이어갔으니, 그러한 고정관념이 사라지려면 두 세대는 더 지나야 하지 않을까. 강원도는 일명 ‘검은 노다지’로 불리던 석탄으로 여러 차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광부의 삶이 석탄산업의 활황을 맞는 것과 비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 인생을 흔히 ‘막장 인생’으로 비유하듯 캄캄한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일은 고되기 그지없었고 처우가 열악했으며, 갱도가 무너져 목숨을 잃는 일도 잦았다.
1987년 탄광 대투쟁으로 쟁취한 민주화의 결실들은 불과 6, 7년 만에 탄광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따라서 자연 소멸 될 수밖에 없었지만,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역사에 남았다. 그 정점에 성완희 열사가 있었고 대파업 한 해 전부터 사북, 태백, 도계 등지에서 광산지역의 민주화를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들을 포착한 국군보안사령부가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리려고 분주히 각본을 쓰고 있었다. 1986년 11월 7일, 보안사는 자신들의 각본을 결국 현실화시키기에 이른다.  


산세가 험한 미인폭포 계곡

 

당시 태백광산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박인균(48세, 한진조경 이사) 씨가 보안사 프락치로부터 살해당할 뻔했고 간첩 사건에 휘말릴 뻔한 사건이 그것이다. 같은 해 12월호 『말』지에 ‘광산노동운동가 살해기도’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고, 3년 뒤 소설가 이인휘의 장편소설 『활화산』으로 세상에 알려지긴 했지만, 이 사건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박인균 씨는 강원대 재학 시절 성조기를 불태우는 등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고, 영등포 동일제강에 입사해 노조 결성을 주도하다가 첫 위장취업 구속자로 징역을 살아야 했다. 1986년에 그는 노동운동이 미미하던 광산지역으로 눈을 돌려 태백 삼덕광업소에 취업해 채탄광부로 일했다. 그러면서 교회를 통해 만난 광부들과 소모임을 조직해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중에 테러를 당한 것이다.
현재 고향인 강릉에서 조경업을 하고 있는 박인균 씨를 먼저 만난 뒤 같이 태백으로 향했다. 당시 소모임을 함께했고, 또 함께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역시 같은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강순구(45세) 씨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류태호(45세), 정문호(45세), 홍병윤(52세) 씨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태백이 고향이고 폐광 이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었다. 박인균 씨가 1992년에 태백을 떠난 뒤 십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도 있어 식사 시간은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테러 사건이 일어난 미인폭포 계곡으로 향했다. 이들이 활동하던 태백광산 지역은 삼척 도계광산과 맞붙은 곳이었다. 지척에 있는 미인폭포도 도계에 속했는데, 산 이름으로 불리기보다는 그 일대 계곡 전체가 그저 미인폭포로 통했다. 산세가 매우 험했고,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당시의 사건 현장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미인폭포와는 얼마간 떨어진 가파른 계곡 어디쯤, 박인균 씨는 낙엽송이 우거진 숲을 헤치고 들어가며 20년 전의 위태로웠던 순간들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소모임 구성원 중에 장익수라는 광부가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그 이름은 가명으로 밝혀졌고, 본명은 장창국이었다. 장은 석탄공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그를 연화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러나 다방에는 장 혼자 앉아 있었고, 그 친구들이 미인폭포에서 개구리를 잡고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는데, 그곳 역시 아무도 없었다. 장은 보여줄 게 있다며 낙엽송 숲으로 박인균 씨를 데리고 가 숨겨 놓은 가방을 가져오게 했다. 장이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철제 사제 폭탄과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이었다.

 


장은 김포공항처럼 영월군 상동에 있는 미군부대를 폭파해야 한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폭탄을 어서 폐기하라고 장을 설득했다. 장은 순순히 그러겠다며 앞으로 나아갔다. 장과 함께 계곡 끝에 선 그는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장이 폭탄을 폐기하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장은 철제 폭탄으로 그의 뒷머리를 내리쳤고 그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시간이 오후 5시 30분쯤, 11월의 첩첩산중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싶었지요.”
30미터 가량 사정없이 긁히고 부딪히며 떨어지다 바위에 다리가 걸렸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땅을 딛기도 힘들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필사적으로 숲을 헤치고 가까운 마을로 달려가 언젠가 일면식이 있던 도계성당의 김창수 신부와 강릉에 계신 부모님 그리고 소모임 후배인 류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김 신부의 차를 타고 도계성당으로 가서 류태호와 부모님을 만난 뒤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동리검문소에서 완전무장한 군·경 수색조에 체포되어 류태호와 함께 태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비슷한 시각, 채탄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홍병윤, 정문호, 권오규 씨 등 소모임 사람들 10여 명도 태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몰아치는 조작사건

다음날 새벽,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끌려온 박인균 씨는 심문을 받다 실신 직전에 이르러서야 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처치만 받은 채 강릉보안대로 옮겨졌고, 소모임 사람들 중 7명도 그곳으로 실려 왔다. 그리고 각기 다른 방에 감금된 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잠을 재우지 않은 채 팬티까지 발가벗겨 놓고 각목과 주먹, 발길질로 온몸을 구타했으며, 짬뽕국물과 고춧가루 물을 콧구멍 속으로 들이부었다. 수사관들은 미리 작성해 놓은 조직도표와 100페이지에 달하는 문건을 들이대며 폭탄테러 조직과 폭탄 제조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그와 장창국 사이에 일어난 일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철제 폭탄을 만든 것은 장이 아니라 그로 바뀌어 있었고, 그 전부터 사람들이 의심스럽게 여긴 장의 말이 전부 그가 한 말로 되어 있었다.
보안대원들은 홍병윤 씨를 연행하기 전에 그의 집부터 수색했다. 불온 문건과 화약을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관리가 허술해 광산에서 사용하는 화약을 광부들이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때때로 광부들이 그렇게 숨겨가지고 나온 화약으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내가 그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으니까 웬만하면 화약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때 화약이 조금이라도 나왔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말려들었어요.”
보안사는 그의 집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누구도 자신들의 각본대로 굴복하지 않자 고문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폭탄사건을 자진 철회했다. 이때부터 수사는 방향을 바꿔 박인균 씨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면서 소모임 사람들을 세뇌시켜 간첩 조직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간첩 사건을 조작하면서 내세운 증거는 고작 그의 자취방에서 가져온, FM방송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고물 라디오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이 마비되어가던 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없는 사실들을 인정했다.
“나는 다른 거는 다 버티겠던데, 잠을 못 자게 하니까 그거 미치겠더라고.”
그때 당했던 고문에 대해 저마다 한 마디씩 꺼내는 자리에서 정문호 씨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당시 스물네 살의 청년이었던 그는 지금도 키가 훤칠해 당시의 맷집과 혈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야기 도중 이 사건에 얽힌 또 다른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적잖이 놀랐다.  

 

 

군의문사한 정문호 씨의 동생 그에게는 정경호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강원대를 다니던 정경호는 박인균 씨와 원래 아는 사이였는데, 박인균 씨를 형에게 소개시켜 주는 등 소모임을 꾸리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군복무 중에 이 사건이 터지면서 보안대로 불려와 심문을 받았고 큰 탈 없이 복귀했으나 1988년 4월 2일,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지금도 군의문사 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으니, 그 당시에 동생의 사인을 밝혀내는 일은 더더구나 불가능했다. 형 정문호 씨는 지금이라도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사건 접수를 할 계획이지만, 그것에 거는 기대는 그리 크지 않다.
광산지역에 노동운동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노학연대를 통한 민주화운동에까지 제동을 걸고자 꾸민 이 사건은 그렇게 또 하나의 간첩 사건으로 기록될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광부들이 연행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수사관들은 장창국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진술서를 쓰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장창국을 대면시켜 주었는데, 그의 몸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보안사는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장을 폭력 행위자로 재판에 회부했다. 장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은 뒤 그 지역에서 사라졌고, 지금까지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은 보안사의 자진 철회로 일단락되었는데, 사건 피해자들은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안기부와의 알력 다툼에서 보안사가 밀린 결과로 보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 사건은 다른 간첩 조작 사건에 비해 각본이 허술했다. 그러나 두 정보기관의 세력 다툼 때문에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고, 평범한 광부로 살아가다 프락치로 포섭이 된 장창국 역시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 만약 박인균 씨가 계곡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면 이것은 성공한 간첩 조작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는 강릉보안대에서 풀려난 후 두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치료를 해야 했고, 지금까지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불과 5, 6년 전까지 베개 옆에 칼을 두고 자야 할 만큼 감시나 체포에 대한 공포가 심했어요. 지금도 물체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숨이 멎는 것 같고, 군복을 보면 불안해요.”
그는 민주화운동 상이자, 즉 기타 등급으로 분류되어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심의 범위가 좁아 그와 같은 피해자들의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그는 사건이 재조사되어 진실이 밝혀지기를 희망하면서 한번쯤은 장창국을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전했다.
취재를 간 날은 2006년 12월 7일,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20년 하고 1개월째 되는 날이었다. 날짜를 되짚어 보던 그들은 금세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들었다.
오늘날의 강원도는 과거의 검은 그늘을 걷어내려는 듯 눈을 상품화하기 위해 눈꽃축제를 열고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총력전을 벌이며, 탄광 자리에 카지노를 세워 도박의 도시로 변모했다. 광산도, 광부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들의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속도전으로 전락한 삶에 떠밀려가고 있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에서 활동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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