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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침체를 뚫고 솟아오른 빛기둥_ 부평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인천 지역에 지하철이 생긴 줄 몰랐다. 계양에서 동막까지 가는 노선인데 그 중간에 갈산역이 있었다. 갈산역 3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부평 대우자동차 건물이 보인다. 그 크기만 30만 평이나 된다. 프레스, 차체, 조립 공장 등에서 8천 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마티즈, 라세티, 토스카를 생산하고 있다. 회사 건물 벽에는 제법 멋있는 타일로 된 아이들의 그림이 수십 개 붙어 있다.
1985년 4월 16일, 이곳이 해방 후 처음으로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두환도 뒷골이 당기는 충격을 받았다 한다. 총 8명의 노동자들이 구속된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한 분기점을 이루었다. 1970년대 주로 섬유산업 등 여성중심의 노동운동을 남성중심으로, 그것도 대규모 중공업분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비롯한 향후 노동운동의 미래상을 보여준 파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운동 출신인 지식인들이 노동자가 되어 현장에 있던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을 하며 투쟁을 했다는 점이다. 서로 대등한 동료 입장에서 함께 싸운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으로 물밀듯 들어갔고 노동자들도 그들을 동료로 받아들였다.

꿈을 꾸고 올라온
가난한 청년들과 군대식 회사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표면적으로는 임금을 18.7% 인상하라는 것이었으나 그 내면은 노동자에 대한 많은 부당한 일들이 쌓여서 일어난 것이다. 부평은 그 당시 주안공업단지와 더불어 대규모 수출산업공업단지였고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수많은 가난한 청년들이 올라왔다. 청년들은 정비공장, 금속회사, 조그만 마찌꼬바(소규모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 중에 한 청년이 이은구 씨(47세)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올라와 생활하고 있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기계공업학교를 어렵게 합격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학교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그때 막노동하는 아버지가 나를 학교 보내려고 머슴을 살겠다고 하셨어요. 머슴 살면 선불을 받으니까 학교에 보낼 수 있잖아요. 하지만 나 학교 다니자고 아버지를 그런 곳에 보낼 수 없었어요. 제가 일해서 돈 벌면서 학교 다니겠다고 했어요.” 그는 16살 겨울부터 정비공장에 다녔다. 스패이너 종류가 많아 헷갈려서 선배들이 달라는 연장을 잘못 주면 그대로 연장이 날아와 머리에 구멍이 나기도 했다. 점심을 먹을 돈이 없어서 라면 두 개를 신문지에 말아서 가져갔다. 밤 10시가 되어야 일이 끝났기 때문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트레일러 운전면허증을 따기도 했다. 트럭 운전사 월급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큰 공장에 들어가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결혼할 때 더 유리할 것 같아 대우자동차에 다니게 되었다. 많은 청년들이 이은구 씨처럼 대기업은 뭔가 작은 회사보다 더 나을거라는 꿈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청년들은 정비공장이나 대기업이나 일은 힘들고 고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잔업으로 밤 10시까지 일을 했다. 일이 끝나면 완전 파김치가 되어 맥주 한잔하고 나면 하루가 끝나고 또 일어나자마자 일하고. 그때는 지금처럼 잔업이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하라고 한마디만 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휴일도 특근하느라 거의 쉬지를 못했다. 청년노동자들은 기숙사도 없어서 닭장 같은 자그마한 쪽방에서 5~6명이 함께 생활했다. 직업훈련생들은 다른 회사보다 나은 편이었는데도 월급이 한 달에 2~3만원 밖에 안 되었다. 훈련소를 마치면 기본급이 10~12만원정도 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소원이 뭐냐고 하면요, 월급 20만원을 넘겨보는 것이었어요. 잔업, 특근을 그렇게 열심히 해도 이상하게 20만 원이 넘지가 않는 거예요. 월급 받고 안타까워했던 생각이 나요.” 기본급이 낮으니까 잔업, 특근까지 다 해도 20만 원을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이 마치 감옥 또는 군대 같았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그때는 노동자들에게 두발검사도 하고 복장 검사도 했다. 머리를 스포츠로 안 깎거나 이름표를 안 달면 큰일이 났다. 심지어는 손톱검사도 했다. 노동자들은 회사에서의 일상생활이 숨이 막혔다.
“야간작업을 하고 낮 12시에 선을 보러 가느라고 잔업을 하지 않았는데 다음날 부서에서 나를 제일 힘든 곳으로 보내버렸어요.” 그들에게는 사생활도 없었다.
가장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은 회사 다니다가 군대에 갔다 온 노동자들이었다. 회사에서 그들이 군대에 갔다 왔는데도 경력으로 인정을 안 해준 것이다. 이들이 호봉상승과 상여금 문제로 싸우면서 일상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던 현장노동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데도 어용노조는 싸우지도 않고 노동자들과 회사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노동자가 자본가처럼
평등하다는 것을 알린 첫 사건


1985년 투쟁 당시 노동자들은 이런 현장의 아주 기본도 안 되는 조건 개선에 대한 인간적인 요구가 많았다. 청년노동자들 주거문제 해결로 기숙사를 지어 달라, 밥 먹는 식사의 질을 높여 달라.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워낙 저임금을 받아서 임금인상 요구가 시급했다. 임금인상안은 최저생계비 부족분과 생계비 상승률 보상, 생산성 향상분에 대한 공정한 분배를 합해 최종적으로 27%인상이었으나 어용노조가 18.7%로 받아들여 결연한 자세로 싸울 것을 약속 받고 타협을 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4월 15일 1천여 명의 노조원들이 연좌농성하고 있는데도 임금 5.7% 인상만을 고집했다. 이에 격분한 노조원들이 어용노조에 파업을 촉구해서 다음날 16일 오전 8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완전히 계엄 상태였다.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홍보관 3층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밥도 못 먹고 있으니까 주먹밥을 만들어 옥상으로 던져주기도 했다. 19일에는 상황이 더 험악해졌다.
“20일이 토요일이었는데 위장 취업했다가 해고 되었던 송경평이가 담을 타고 들어와서 경찰들이 칠 거 같다고 알려줬어요. 그래서 350여 명의 열성 노조원들이 기술연구소에 들어가 바리케이트를 쌓고 철야농성을 벌였습니다.”
학생운동 출신으로 당시 싸움을 이끌었던 홍영표 씨(50세)가 말했다. 이들은 경찰이 강제로 해산할 경우 기술연구소에 있는 설계 도면 등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면서 18.7% 임금인상안을 회사 측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농성 이틀째인 4월 21일 새벽 1시, 홍영표가 피곤해서 쉬고 있는데 김우중 회장이 그를 불러냈다. 재벌 회장과 노동자가 직접 맞대면한 첫 번째 사건이었고 대등한 관계로 언론에 등장하면서 노동자가 자본가에 종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거의 일주일 동안 잠을 안자면서 협상을 했어요. 나중에는 서로 이야기 하면서 졸기도 했어요.” 김우중과 협상단은 몇 번에 걸친 협상 끝에 16.4%라는 인상안에 합의했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이 임금동결정책을 써서 임금 가이드라인을 정해, 회사에서 임금을 올려주고 싶어도 올려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도 5.2%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파격적인 타결이었다.
협의안에는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일개 재벌이 책임질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군사정권은 기본적인 노동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노동정책을 폈으며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을 동원하여 탄압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은 대부분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되곤 했다. 김우중 차 트렁크에 타고 회사 밖으로 빠져나갔던 홍영표는 수배령이 내려졌고 대정부 투쟁을 벌이기 위해 프레스 공장 지하에 잠입했다가 경찰에 잡혔다.


9일 동안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조업 중단과 철야 농성을 별여 온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사진제공 경향신문

 

지식인과 노동자의 운명적인 만남


“나는 일이 힘들고 회사에 불만이 많아도 시키면 시킨대로 일하며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고 순종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 만나고부터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노동자로서 기본 생존권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듣게 된 거죠.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었어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난 거죠.” 이은구 씨는 당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던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처음에 그들이 학생출신인줄 몰랐다고 했다. “회사에서, 정부에서 그들은 간첩이다, 해도 믿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들을 믿었어요. 신뢰하고 있었어요.” 대우자동차에는 송경평, 전희식, 이용선, 홍영표 등 여러 명이 일하고 있었다.
“내가 트럭 차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손이 산도둑처럼 생긴 놈이 같은 현장 라인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유심히 일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인상이 좀 이상한게 현장노동자 출신이 아닌 것 같았어요. 공장 옆에 개울이 있었는데 그 뚝으로 불러내서 물어보니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눈짓으로 불러내 다방에서 만났을 때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어요. 그 사람이 바로 서울공대 출신 송경평이었죠.” 홍영표 씨는 송경평 씨를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송경평의 부인도 구로공단에서 공장에 다녔는데 게시판에 위장취업 빨갱이라면서 신분이 발각되는 공고가 붙었다. 그곳에 남편은 대우자동차 다닌다고 써 있어 그의 신분이 들어나게 되었다. 1984년 하반기에 식당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되어 가톨릭 출신 이용선과 함께 출근투쟁을 하기도 했다.
홍영표는 평생 노동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현대중공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가려 했는데 4백 명 모집하는데 3천 명이나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은 대우자동차에 들어왔다. 그는 판금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포함해서 12개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판금 용접할 때 3번이나 떨어졌는데 그때 굉장히 회의를 했다고 한다. ‘나는 주둥아리 용접사일 뿐인가. 나 같은 사람이 노동운동을 하겠나.’ 직업훈련소 선생님이 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기특히 여겨 개인교사를 붙여줘서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 들어가서 일할 때 직업훈련원에 있던 후배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들을 중심으로 축구도 하면서 조직화 사업을 했다. 목숨을 걸고 그들과 함께 일을 했다.

 

아직도 한국의 노동자는 불행하다


대우자동차 파업이 일어난 지 20년이 넘었는데 현재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대우자동차 안에는 피부색이 하얗고 키가 큰 외국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IMF 여파로 김우중은 7조 원의 부도를 내고 무너졌다. 정부는 노동자들을 경영에 참여시켜 회사를 회복하는 대신 외국인에게 팔아 넘겼다. 대우자동차를 산 회사는 1992년까지 대우와 함께 지분을 나눈 적이 있는 GM회사였다. 그 당시 GM은 대우가 자동차 독자 모델을 만들려고 하면 어떤 방법을 써서 막으려고 했고 핵심 기술 중 하나인 품질개선을 위해 제품공정 설계를 변경하려하면 어떻게든 방해했던 그런 회사였다.
현장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군 소중한 공장을 그들에게 ‘거져줬다’고 분통해 했다.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폭력적으로 진압되고 2천여 명이 해고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금은 1,750여 명이 다 복직된 상태이고 자동차 생산이 많아 호황을 이루고 있다. 쪽방에서 살던 사람들도 다 근처의 아파트를 한 채씩 마련하여 살고 있고 기본급도 21년 다녔던 노동자를 기준으로 180만원 정도 받고 있다. 야근·특근까지 하면 연봉 4~5천만 원씩은 받는다.

 

 



1985년에는 `DAEWOO`였지만 2007년 오늘`GM DAEWOO`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의 손으로 일군 소중한 공장의 현재 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삶이 불안하다고 했다. “우리나라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 철수할지 몰라 사람들이 불안해 하죠. 그런 위기 상황이 오면 큰일 나죠.” 그들은 언제 또 정리해고가 될지, 회사가 철수할지 몰라서 돈 벌 수 있을 때 벌자며 엄청나게 일을 한다. 밤 10시까지 잔업하고 토·일요일도 없이 특근을 한다. 게다가 작업공정 속도가 현대자동차보다 빨라 노동 강도가 매우 세다. 이렇게 일을 하니 노동자들이 과로사, 심장마비로 숨지기도 했다. 대우자동차 판매부에 있는 최동규 씨(38세)는 작년 9월 샤워를 하다가 쓰러졌다. 사망원인은 ‘뇌지주막하출혈(뇌출혈)’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남편을 죽였다.”고 부인이 말했다. 10여 년 동안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가 그를 쓰러지게 했던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 2차 하청까지 합하면 2천 5백여 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전에는 비정규직이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늘었다
“냉·난방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얇은 가운 하나 가지고 사시사철 지내야만 합니다. 어쩌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가운 위에 스웨터라도 입었다 하면 관리자들이 와서 생난리를 칩니다.”그들은 일하다 다쳐도 산재처리도 안되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간다. 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시계가 멈춰 지금이 1985년 싸움 시기 그대로인 것이다.
20년이 흐른 지금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일할 노동건강권’과 인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가 과연 노동현장에서 지켜졌는가?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마음속에 있는 사랑하는 것들,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밤늦게까지 공장에 가둬놓고 또 다른 부당한 노동의 조건에서 일하고 있다. 사회가 노동자들에게는 반성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런 노동 상황에 대해서는 한국의 어느 기업가도, 정부도, 시민들도 반성적인 고백을 한 적이 없다. 그런 정부, 기업가, 시민 하나 갖지 못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불행하다.

 

글 김순천
르포문학, 청계천 사람들 삶의 기록 『마지막 공간』과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의 이야기 『부서진 미래』 의 책임 저자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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