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장애인이 없는 나라’다. 거리에서 장애인 만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버스나 전철, 기차역이나 공항처럼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도 장애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은 정녕 장애인이 없는 나라인가? 한국의 장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인구의 10%에 달하는 400만 장애인이 가긴 어디로 갔겠는가. 한국의 거리에서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디론가 ‘갔기’ 때문이 아니라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만한 곳이 아니다. 휠체어를 타고 문 밖을 나서면 육교와 지하도가 길을 막아선다. 전철역사에 설치된 휠체어 리프트는 툭하면 고장이요 걸핏하면 사고라 ‘살인기계’라는 오명을 안은 지 오래다. 몇 킬로미터 안 되는 길을 가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니, 집이나 시설에 ‘갇혀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 중증장애인 중에는 수십 년 동안 바깥구경을 해 보지 못한 경우도 수두룩하다. 단순한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모든 사회적 권리에서 배제되고 소외되고 단절되면서 한 인간이 ‘진짜 장애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첫 단계다.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고 세상에 나온 장애인들에게는 사회의 차별과 냉대가 기다리고 있다. 이웃, 학교, 직장, 결혼이라는 인생의 관문을 통과하기는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김정열 사무총장(47세)은 두터운 차별의 벽에 부딪쳤을 때 장애인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무기력감을 ‘막막함’이란 말로 대신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가 결정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일할 수 없다, 함께 할 수 없다. 이렇게 사회가 결정해 놓으면 장애인들이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구조적으로. 거기에 그냥 편입되는 거지요. 나는 비교적 경증인데도, 결혼하고 나서 내 사촌을 처음 만났어요. 서로 있는지도 모른 거예요. 어릴 때부터 친척 대소사에 간 적이 없어요. 내가 잔칫집에 안 가고 싶어 안 갔겠어요?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안 데리고 가고 싶었겠어요? 중증장애인들은 어떻겠어요. 단절이죠. 학교를 갈 수가 있나, 일을 할 수가 있나, 문화 환경이 갖춰져 있나, 심지어 결혼하는 비율도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지난 2002년 서울 밀알학교 건립반대 때 현장에서. 왼쪽 맨 끝이 김정열 총장 사진제공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국가가 돈 써서 장애인을 사육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그는 장애인치고는 ‘비교적 평탄한’(그의 표현에 의하면) 성장기를 보냈다. 어릴 때 더러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늘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있었고 최소한 싸워도 그 안에서 싸웠다. 그가 장애인에 대한 유형무형의 ‘차별’을 경험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였다. “대학 때 학점도 괜찮은 편이었고, 학과장 추천도 있어서 취업은 어렵지 않았어요. 직장에서도 이렇다 할 큰 갈등은 없었지요. 그러나 장애인이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어려움들이 있지 않겠어요? 우연한 기회에 나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만나게 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다 보니 ‘아, 이게 특별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삼마회’라는 장애인 모임을 만들어 이런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고, 그러다가 1987년에 한 선배로부터 ‘아예 이쪽으로 전업해 보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활동의 시작이지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등장은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 몰아닥친 민주화 바람과 맞물려 있다. 김정열 역시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사회 각 계층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던 그 당시를, ‘시설 비리 터지면 같이 싸우러 가고, 장애인 분신사건 터지면 그 문제 해결하러 다니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장애인 운동가로 ‘전업’한 그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만 19년을 일했다. 19년이라면 막 태어난 아기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고, 초·중·고교를 거쳐 성년이 되는 긴 세월이니, 하기 쉬운 말로 청춘을 바친 셈이다. 그 세월은 ‘대자보 세대’의 평균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청년을 경륜 있는 한 사람의 운동가로 만들어놓았다. 장애인 운동에 주력했던 그의 활동 영역도 크게 확장되어, 작년 초까지 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운동단체들이 이념적 몸살을 치렀던 1990년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도 이념적 갈등과 변화의 진통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이념 스펙트럼이 ‘우측’으로 대거 이동해 갔고, 법인 단체이면서도 이념상으로 ‘좌측’에 치우쳐 있었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도 그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됐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대별로 뚜렷이 부각되는 이슈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생존권, 1980년대 중반에는 노동권, 1990년대에는 교육권, 1990년대 중반에는 접근권이라고 해서 편의증진법을 통해서 사회적·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그 모든 이슈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다. “과거의 굵직한 주제들이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문화·이동·연금 소득·서비스·활동 보조 등 장애인들의 다양한 욕구를 담은 이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어요. 그게 다 전체적 문제라기보다는 부분적인 문제들이죠. 물론 당사자들한테는 절대적인 문제지만. 이런 상황이 온 데는 (국민)소득의 문제가 절대적이죠. 복지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1천 불은 돼야 하고, 권리 얘기 하려면 1만 불은 돼야 하고, 사회권 확보하려면 2~3만 불은 돼야 하잖아요. 사회권이라는 건 그 계층, 그 분야, 그 부문의 문제를 통째로 해결해 주는 거 아닙니까. 한두 푼 가지고 되는 게 아니죠. 지금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조건을 볼 때 사회적 권리에 대한 이슈들이 먹혀들어갈 만한 시점이 왔다고 봐야죠.”
사진제공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사회통합 속에 희망이 있다
많은 장애인들이 지난 4월 국회에서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장차법)을 장애인 운동의 가장 큰 결실로 꼽는다. 장애인 운동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1980년대의 황무지에서 운동을 시작한 그는 장차법 제정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는 1990년대 중반에 이미 장애인종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장차법을 입법청원했었어요. 그 모델이 됐던 게 장애인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미국의 장애인종합법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장애인복지법, 고용촉진법, 특수교육진흥법, 편의증진법 등 장애인관련법은 다 있거든요. 문제는 이 법들이 각기 독자적으로 있을 뿐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는 종합적인 입법체계의 필요성 때문에 장애인종합법을 상정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2002년 열린네트워크 등 모든 장애인 단체와 연대하여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장추련)을 만들고 장차법 제정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죠. 장애인 전체가 ‘같이 간다’는 원칙을 세우고 일치단결한 결과 5년 만에 장차법 제정이라는 결실을 보게 됐어요. 국제적으로 상당히 앞선 편이고, 내용적으로도 괜찮은 수준이에요. 일본도 우리보다 운동을 먼저 시작했지만 아직 입법이 안됐거든요. 문제는 장차법의 실내용이 마지막까지 지금의 모양을 지켜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장차법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통해서인데, 행정부 입장에선 예산이나 기존에 있는 제도와의 충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지난해 3월, 그는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사무총장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이사진에 포함돼 있지만, 현장에서 뛰어다니던 시절과는 분명 다르다. 장애인 정책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매뉴얼을 개발하여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그 정책이 실제로 전달되도록 하는 역할이다. 그와 함께 장애인 운동을 했던 1세대 운동가들도 대부분 비슷한 시기에 현장을 떠났다. 더러는 정치 쪽으로 갔고, 더러는 그처럼 정부산하기관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건 1세대 운동가들과 지금 현장을 주도하는 후배 그룹들과의 인적 연결이 거의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후배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구조가 있다면 그는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을까. “연구소를 오픈할 당시 우리의 문제의식은 장애인 문제를 권리 차원에서 보자는 것이었거든요. 장애 가진 사람이 과연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는가. 남들에게도 그 권리를 인정받고 있는가.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장애인 문제를 무슨 서비스, 좀 줘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서비스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건 축적되는 게 아니잖아요. 국가가 그냥 돈 써서 장애인을 사육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좀 더디고 힘들더라도 장애대중들이 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토대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삶의 모습이 달라지고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 본질적인 질문은 지금도 해야 된다고 보고, 난 그게 동력이라고 봐요. 그게 없어지면 운동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의 말 속에는, 현재의 장애인 운동이 사회통합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지나치게 ‘서비스’에 매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사회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지 못하고, 평생 시혜의 대상으로서 ‘시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사회적 역할도 희망도 없이 주면 고맙다고 받는’ 존재가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들어 있다. “그건 사는 게 아니잖아요. 장애인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가족도 구성하고 자립해서 뭔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남기고 가야겠다는 희망은 이 사회에서 살아야 생기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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