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위후(魏侯)가 옳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신하들이 이를 막지 않고 오히려 화답하거나 눈 감아 외면하여 일신의 영달만을 쫓았다. 자사(子思)가 분연히 말하기를, “임금이 하는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갑니다. 임금이 그른 말을 해놓고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대부가 감히 그를 바로 잡지 못하고, 경대부들이 그른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 옳다고 하면 일반 백성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자사는 중용(中庸)의 저자이며 공자의 손자이다.
미네르바 박 아무개 씨를 ‘현대판 자사’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미네르바 소동으로 전국이 요동을 칠 때 언뜻 생각난 옛사람이었을 뿐이다. ‘허위사실유포죄’ 건, 곧 제정을 벼르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건 유독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법이라니, 우리의 곤혹스런 현실을 새삼 보여준다. 허위사실유포 처벌법은 이미 지난 1990년대부터 유엔인권위 등에서 인권에 반한다는 권고를 해왔다고 하니, 반쯤 죽어있던 이 법을 무덤에서 꺼내 사용하는 것을 두고 ‘구시대적 발상’이니, ‘희대의 코미디’라는 말들이 나올 만도 하다. 최종판단은 법복 입은 이들의 소관이겠지만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건 추이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수들은 지난해의 사자성어로, 충고를 듣지 않아 병을 키운다는 호질기의(護疾忌醫)를 꼽은 바 있다. 그들은 올해를 화이부동(和而不同)으로 택했다. 남과 화합하지만 입장을 바꿔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관용을 바탕으로 한 화합과 공존을 의미하는 말이겠다. 그 말의 어원은 논어다. 그에 따르면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소인배들은 이해가 같다면 의리를 굽혀서라도 같게 되기를 구하지만, 군자들의 사귐은 서로 진심으로 어울려 조화롭지만 의리를 굽혀서까지 모든 견해에 ‘같게 되기’를 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리라. 실망과 분노의 한해를 에둘러 표현하면서 한 해를 맞을 각오를 새롭게 했다고 할까. 어쨌든 하루아침에 지금 여기 우리들의 참람해진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루아침에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상을 도모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 이라는 어느 시인의 성찰은 옳다. 인간의 일을 무 자르듯 단칼에 절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끈이고, 결국은 무엇으로 관통할 것이냐는 사관의 문제로 귀착하는 것이다.
당대의 주인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역사의 서술은 달라진다. 절대 다수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아니면 극소수층을 위한 것이냐가 언제나 문제다. 1987년 일어났던 『한국민중사』 사건도 따지고 보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고픈 독재자와 그에 빌붙은 집단의 용렬한 만용에서 발단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여론을 통제하며,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가두고 말길(=언로)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게 독재 권력의 특성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국민적 정당성이 약하다보니 국민의 입과 눈과 귀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특성이 비판의 자유로운 소통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히틀러 당시 선전상 괴벨스, 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처럼 인류 사상의 자유로운 알갱이들을 불태움으로써 소통으로부터 불통과 단절을 시도한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날으는 교실』과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자의 『논어』가 독재의 광란에 화형을 당했다. 그런데 책을 태우는 행위보다 더한 게 출판을 금지하고 서점에 깔린 책을 회수하는 일로도 모자라 출판 관계자나 저자를 구속하는 일이다. 한국에선 그런 일이 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