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했고 조급했으며 욕심이 많았기에, 침묵으로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텅 빈 충만’을 누리기를 새해를 맞아 소망한다. 텅 빈 충만을 바라기엔 그러나, 지난 한해가 너무나 소란했다. ‘꽉 찬 공허’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빈 말들의 잔치로 어지러웠다. 철 지난 공화국 시절에서나 종종 보아왔던 장면들이 현재에 오버랩 되어, 흡사 한편의 옛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과거가 관에서 튀어나와 현재가 되었다. 다시는 떠올리거나 보고 싶지 않던 영화. 그것을 틀고 돌리는 자들의 구태와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모습들을 시시각각으로 보아야 했다. 흐르는 물에 눈과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판국에 어찌 새해를 맞았다고 희망을 말하겠는가. 칼릴 지브란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귀가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을 삼켜야 하는데, 어찌 그 귀로 들판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역사책을 고쳐서 역사를 바꿔보겠다고 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도 하니, 사필(史筆)의 매서움을 모르는 자들이 설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독재권력에 기생하며 영화를 누렸던 세력들이 쿠데타와 독재를 부추기고 대신 피로써 쌓아올린 4월혁명과 부마항쟁, 5·8민중항쟁, 6월항쟁을 지워버리겠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지난하고도 찬란한 역정을 역사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집단들의 파렴치한 정치선동에 맞서, 이 땅의 모든 양심들에겐 깨어 일어나 두 눈 부릅뜨고 거꾸로 가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아야 할 무거운 시대적 책무가 어깨를 누른다.
이 밑 모를 역사 역주행의 망령이 한반도를 배회하는 2009년 새해 벽두에 박종철을 떠올린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무람하기까지 하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마치 구약의 시편에서 말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열면, 창문도 없이 고문용 욕실만 뎅그러니 있는 509호에서 박종철은 죽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박종철이 죽음으로 지킨 것은 일차적으로는 선배의 소재였다. 우리 같이 범속한 이들에겐 그런 게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해 보이는 약속과 인간에 대한 작은 배려가 함께 모여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그가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그 자리에서 유월항쟁의 싹은 텄다. 그리고 박종철 열사를 역사의 제단에 바친 우리는 유월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찬란한 꽃을 피워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