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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매향리 평화마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전만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매향리 평화마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전만규

글·최현정 chhjungparan.com


전만규. 올해로 56세이다. 그의 고향은 매향리다. 11대 째 매향리에 살고 있는 전씨 사람이다. 88년도부터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에 앞장섰던 주민대책위원장으로 유명한 그다. 불타오르는 매서운 기질에 섬세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녔다. 이름 난 평화 운동가이지만 약자라면 불의 앞에서 낫과 곡괭이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1951년 8월, 미군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어촌 마을 매향리에 폭격 연습장을 만들었다. 그날부터 매향리의 하늘과 땅은 미군의 폭격연습으로 인한 전쟁 지옥 그 자체였다. 1967년 아기를 가진 33살 여성이 미군의 오폭으로 죽임을 당하자, 미군은 적반하장 주민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어장에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게 되었고, 대대로 일궈온 논밭에 발 디디지 못하기도 일쑤였다. 괴물 같은 전폭기는 내장을 뒤흔드는 굉음을 내며 배고프고 억압된 삶 위를 가로질렀다. 내 바다에 들어갈라 하면 군인들은 폭력을 휘둘렀고, 내 논밭에 벌러덩 드러누우면 경찰은 불도저로 사람을 뚝뚝 떠서 내던져버렸다.

"그 때는 미군기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고 빨갱이로 몰려서 패가망신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 엄혹한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목숨 줄인 토지까지 짓밟히니까 우리 아버님 어머님이 그 논밭에 가다가 붙잡히기도 하고. 내일모레 벼를 베어 쌀을 만들 때인데도 이놈들이 불도저로 막 짓밟아 버렸죠. 경찰이 투입되어 주민들을 개 패듯이 그리 했고." 오폭이나 불발탄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친 주민도 여럿. 시도 때도 없는 폭격 소음으로 인한 주민들의 스트레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 마음 안에는 분노가 쌓였다. 밥상 앞에서조차 폭력이 난무하기 비일비재였다. 이유 없이 목을 맨 사람도 많았다. 억압 속에서 불거지는 분노란 그렇다. 무고한 타인을 향해 폭발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거나. 전만규 위원장의 삶도 그랬다.

전만규 그리고 아버지

그가 식칼을 들고 미군들을 몰아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여긴다. 글을 배우지 못했던 아버지는 고기잡이 솜씨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훌륭한 어부였다. 매일 밤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앉아 어망을 손질하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허허허 하고 웃는다.

"나를 옆에 앉혀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신다고. 기억나는 말씀 중에 만규야 공부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해가지고 대통령 해라. 박정희 대통령 봐라. 키 작고 조그맣고 그런 사람이 귀박이(귓바퀴)가 크잖아. 너도 귀박이가 크니까 열심히 해라. 허허허."

"한국 전쟁 때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인민군 중대가 주둔했다 그래요. 이 사람들이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서 젊은 사람들을 잡아가니 우리 아버님은 밭에 굴을 파서 그 속에 숨어계셨대요. 그럼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밭에 김매러 가는 척 하다가 먹을 걸 드리고. 그러다 미군이 들어오면서 인민군이 철수한 자리에 남한의 군대가 와서 우리 아버님이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아마 내가 중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인데 아버님하고 같이 바다에 나가면 이놈들이 밤에 멋대로 통제를 해버려요. 비상이니 뭐니 해서 고기 건지러 못 가게하고. 고기를 건져 와야 가족들이 먹고 사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 비상도 아닌데 술하고 안주거리 해서 먹을 것을 가져오라 이거지요. 갖다 주면 고기 건지러 갈 수 있고. 우리 아버님은 나이가 많은데 이 새빨간 젊은 놈들이 반말지거리로 지시하고 이러니까 열이 받쳐가지고요. 그냥 저 새끼들 밤에 잘 때 몰래 수류탄 훔쳐서 내가 집어 던져서 죽여 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갖고 예행연습도 하고 그랬어요."

벗어나는 길은 그 적개심을 이해하는 길 뿐이었다. 그는 발버둥 쳤다. 총각 때는 애지중지 키우던 고양이 일곱 마리를 욱하는 마음에 자기 손으로 죽여 버렸다. 시원했다. 죄책감이 없어서가 아니다. 시원했다는 것은 억눌렸던 분노가 이미 도를 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향 매향리를 떠나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전쟁지옥 같은 이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서, 머나먼 쿠웨이트에서 그 뜨거운 모래에 몸을 묻고 싶을 정도로 고된 돈벌이를 해 본 적도 있다. 쿠웨이트에서 한 달에 630시간을 중노동하면서 목돈을 마련했었다. 그 돈으로 부모님 모시고 매향리를 뜰 참이었다. 글을 모르시는 아버지를 위해 녹음기에다가 편지를 녹음해 부쳐드리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스스로 목을 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쿠웨이트에서 돌아온 날 알게 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고양이 일곱 마리를 죽여 묻은 곳에서 몇 걸음 되지 않은 데에다가 아버지를 묻었다.

누구를 향해 칼을 들 것인가

결국 매향리를 떠나지 못했다. 남았으니 사랑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고, 몸부림 속에서 분노와 적개심이 타올랐다. 풍미 넘치는 그의 언어를 듣고 있다가, 어쩌면 그가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이 되어서 분노를 달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래해내기에는 몸속에 피맺힌 분노가 너무 우렁찼다. 시인이 되었다면 이미 목을 매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사격 시작을 알리는 미군기지의 붉은 깃발을 찢었다.

"아이들이 폭격 소리에 엄마 젖을 물고 있으면서도 울고 자지러지고 하니까 애는 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신물이 나는 거야. 진짜 안타깝더라고. 그 모습이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것인데. 사십년이 훨씬 더 된 나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갔다 와서 논 옆 오솔길을 가고 있었어요. 늘 보는 비행기인데도 저공으로 날라 오면 순식간에 시커멓게 괴물로 변해버리죠. 무서워서 바로 길 옆 소나무 밭으로 뛰어 들어 갔지요. 그랬더니 저만치서 알록달록한 가시독사가 그냥 오고 있는 거예요. 빨리 도망가야 되는데 괴물같이 시커먼 이 전폭기에 놀래가지고는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 거예요. 그런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공포감 두려움 이런 것을 바로 내가 낳은 새끼 그 예쁜 딸들이 겪는 모습에 그냥 치밀어 오르죠.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결국에는 이 화 덩어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침내 고향땅에 고요함을 몰고 온 것도 그 놈의 들끓는 적개심 덕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적개심은 식칼을 들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식칼을 다름 아닌 적개심의 기원을 향해 똑바로 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석함 덕이었다. 80년대 초반 우연히 집어들은 신문에서, 항공기 이착륙 지역 주민들의 성격이 포악하고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차 이거로구나. 이거 때문에 우리 주민들이 걸핏하면 자살을 하고 이웃 가족 간에 끔찍한 폭력 사고가 벌어지는구나. 또 87년도에 수원 버스 터미널 자판대에서 신문 하나를 집어 들었는데, 김포 광동 주민들이 집회를 하는 겁니다. 김포 공항 인근 주민들이 항공기 소음에 대한 민원 문제로 시위를 한다는 기사가 실렸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그래, 바로 지금이야 싶었죠. 이웃집에 김 양식 설치물 철거를 열심히 도와서 하루에 15,000원인가 품삯을 받고 15일 일해가지고 절반은 애기 엄마 주고 절반은 호주머니에 넣고는 물어물어 찾아갔어요. 슈퍼에서 음료수 박스 하나 사들고 들어가서 집단 민원 낸 것에 대해 여러모로 알고 싶어서 왔다고 했더니만 이런 저런 자료도 내주시더라고요. 자료 주신 것 챙겨가지고 여관에 가서 자면서 낮과 밤에 항공기가 이착륙할 때 소음 횟수와 정도를 체크를 하면서 자료를 다 모아가지고 가까운 우리 선후배들하고 얘기를 나누는데요. 아무리 민주화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미군기지 문제를 언급하기에는 시기상조인 때라 입을 떼기가 쉽지 않은데. 특히 시골 사람들은 수 십 년이나 세뇌 된 어떤 반공이념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 때는 술을 할 줄도 몰랐는데 술김에 얘기를 나누는 거죠."

청년들이 나서자 마을 이장은 대뜸 무슨 빨갱이 짓이냐고 거절을 했다. 답답하고 분통터지는 마음에 청년회 이름으로 주민에게 드리는 글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돌렸다. 이튿날 온 동네에 난리가 났다.

"사람들이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히 문제를 제기할 상상을 못했던 거니까. 사실 찍소리 못하는 처지였는데 늘 괴로움과 고통은 스스로 느꼈던 것이죠. 유인물을 돌리고 나니까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대신 누가 했다. 난리 났죠. 마을 방송을 통해서 총회 소집을 했는데 온 마을 주민들이 다 나와서 회관이 꽉 차서 넘쳤지요. 당시 일흔 넘으신 분이 70년 이 마을 살면서 이렇게 온 동네 사람 다 모인 것은 처음이다, 어린 너희에게 이런 큰 짐을 맡겨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이 마을 저 마을로 번져가면서 10개 마을이 모였다. 613개 세대주의 도장을 받아서 경기도청, 국방부, 청와대에 진정서를 냈다. 그게 88년이었다. 이간질도 갈등도 많았다. 미군이 떨어뜨린 탄피를 모아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도 있었으니 쉽지 않았다. 행정기관에서는 한우를 사보내면서 전만규를 막으라고 친지들을 구슬리기도 했다.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었다. 전위원장은 식칼을, 주민들은 낫과 곡괭이를 들고 대항했다. 그것이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마을은 이제 고요하다. 겉으로는. 2004년, 대법원은 국가가 매향리 주민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최종판결을 내렸고 2005년 폭격장은 폐쇄되었다. 그가 진작 매향리를 떠날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어디에서 가족과 함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떠나지 못한 그는 85세 노모와 함께 살면서 여전히 대책위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전만규 위원장 생각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마을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년 전에도 목숨을 끊으려던 사람이었는데 결국에는 떠나버렸다. 전만규 스스로도 칼로 자기 배를 찢었고 아내의 몸에 무지막지하게 칼을 대었다. 국가가 풀어내주었어야 할 그의 분노는 견디다 못해 망상으로 일그러졌다. 그것이 비수가 되어 아내에게 향했다. 폭격장이 폐쇄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뿌리 깊은 분노. 결국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졌다. 2000년 초반 미군기지 철폐투쟁이 한창이었을 때 함께 삭발식을 치러주었던 두 살배기 아들은 벌써 12살이 되었는데, 고것이 헤어져 살던 어느 날 눈이 먼 채로 꿈에 나왔다.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 반미투쟁과 평화운동을 외치던 사람들은 한 때 전만규 위원장을 지지했지만, 반백년 동안 한 고장 여러 세대를 장악했던 갈등이 폭격소리 사라지듯 동시에 잠잠해 질리는 없다. 사람들은 떠났다. 88년처럼 남은 짐은 다시 주민들의 몫이 되었다.

전만규 위원장은 자기 몫이라 여기는 듯 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열어 보고자 다시 일어서고 있다. 폭격장으로 고통 받기 이전의 마을 역사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작년부터 대책위 사무실에는 그를 생각해주는 마을 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여 김치도 해다주고 잔칫날 먹을거리도 장만해다 준다. 올 봄, 그 이름 매향리에 걸맞게 매화나무를 다시 심었다. 마을의 몇몇 사람들은 그가 심어놓은 매화나무를 뽑아 내버리기도 했다. 위원장 기질에 엄청 성질이 났을 테다. 그리고 그 기질 덕에 뽑힌 가지들을 다 거두어다가 기어이 새로 심었다. 언젠가는 꽃이 필 테다.

고기잡이가 제한되어 궁핍했던 시절, 영양실조로 몸을 못 가누던 꼬마 전만규를 업고 집에 까지 데려다 주던 꼬마 친구들의 기억이 그에게 있다. 쓰러져 있던 꼬마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해 먹이던 동네 아주머니의 기억이 그에게 있다. 그가 손에 쥔 식칼을 반듯하게 겨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억들 덕이다. 그가 반듯하게 겨냥하지 못했던 탓은 어디에 있을까. 안타까운 결말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전위원장이 몸을 추스르고 있다.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향리 앞에 가득 쌓인 폭탄 껍질

글 최현정 평화로운 공동체 만들기에 관심이 많은 임상심리학자. 역서에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피터 엘사스의 『고문 폭력 생존자 심리치료』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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