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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 시절,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를 이끌어낸 작은 거인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 시절,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를 이끌어낸 작은 거인

 - 강성구 국제투명성기구 사무총장

 

글·이경은 kaykleeempas.com

 

 

977년 10월 25일 연세대 시위는 긴급조치 9호 하에서 벌어진 가장 큰 시위였다. 시위가 5분을 넘기지 못하고 대개 해프닝으로 끝나던 것과 달리 장장 4시간이 넘는 동안 연세대는 물론 이화여대, 신촌로터리를 지나 서강대 구내에서 시위가 마무리되었다. 강성구와 이상훈이 주도한 이 시위는 주동자 두 사람이 검거된 이후에 일반 학생들에 의해 대규모 투석전과 가두시위로 발전했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학생운동은 침체기에 들어섰다. 1년 반이 넘도록 그 흔한 교내시위 한 번이 없었다. 1976년 12월 8일 기말고사를 끝낸 서울법대 4학년 3명(이범영, 박석운, 백계문)이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학생운동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때부터 학생운동에 발은 담근 사람들은 제 때에 졸업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법대 시위에 자극받은 연세대 학생운동 조직 내부에서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1976년 겨울방학 이후 반정부 시위의 필요성에 대해 공동인식을 하고 있던 연세대 76학번들은 학내 조직 확대가 우선이라는 75학번들의 준비론에 맞서 주전론을 주장했다.

1977년 1학기가 되었지만 어느 대학에서도 이렇다 할 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 연세대 학생운동조직들도 시위가 필요하다는 공통 인식은 있었지만, 역량이나 학내 분위기가 여의치 않았다. 해프닝에 불과한 4·19 백지선언문 배포작업이 김철기, 강성구, 김성만 등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정학 등의 학사징계만 받았을 뿐 학내 시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77년 10월 7일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이 농성으로 이어지는 사태로 발전했다. 서울대 심포지엄사건에 뒤이어 연세대에서도 10월 12일 경영학과 76학번인 노영민이 신학과의 김거성과 함께 시위를 벌였으나, 곧 체포되고 말았다. 노영민이 작성한 구국선언서는 학생운동이 그동안 학도호국단 폐지와 같은 지엽적 문제만을 제기한 것과 달리 군부독재의 핵심인 유신헌법의 철폐를 주장하는 내용으로 한 권력에 대한 최초의 정면 도전이었다.

노영민, 김거성의 시위가 짧은 해프닝에 그친 것에 아쉬움을 느낀 교육학과 75학번의 이대수, 76학번의 오성광이 교내에 반정부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였고, 정법대 건물 등의 화장실에는 반정부 구호가 적혀 있기도 했다.

1학기 때의 4·19백지선언문사건으로 이미 요주의인물로 낙인 찍혀 있던 경영학과 76학번의 강성구는 노영민, 김거성의 시위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결심하고 파트너를 구한다. 상대 응용통계학과 75학번 이상훈은 자신은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주변부 학생에 불과했지만 언젠가 자신에게 시위 주동의 순번이 올 것을 예감하고, 1학기에 이미 휴학한 상태였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이상훈은 강성구와 함께 시위를 주동해보라는 경제학과 이창규로부터 요청을 받고 결국 강성구를 만나 시위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냥 상황이 이렇고, 제가 결단을 했다, 혼자서는 못하겠으니 같이 합시다. 그리고 또 가정 얘기도 좀 했구요. 아버님이 공무원이고, 하여튼 그런 얘기도 좀 하고, 해서, 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상훈 씨가 잠깐 고민하고 곧바로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준비과정에 들어갔는데, 그 참 놀라운 것은 그 분은 뭐 사실 그런 시위에 연루되지 않을라고 휴학까지 했었다가 잠깐 올라왔는데......"

두 사람은 학내사찰요원들에게 쉽게 검거되지 않기 위해 학생들의 채플이 열리는 대강당 건물의 꼭대기 층과 지상에서 동시에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준비한 시위용품을 사전에 옮겨야 했다.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던 꼭대기 층의 출입문을 학생처 여직원을 설득해 쉽게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시위용품을 박물관 내에 감춰두고 시위 예정일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출입문을 살짝 열어두고 나왔다.

하지만 시위 예정일이었던 10월 24일 연세대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정보가 누출되어, 그 전날인 10월 23일 대대적인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시위주동자였던 강성구 역시 서대문경찰서 정보과 형사에 의해 등굣길에 연행되고 말았다. 예비검속 때 제 발로 들어간 이대수는 자신이 시위를 계획했으나 포기했다고 진술하여 시위 주동자인 강성구를 보호하려 했다. 강성구는 완강히 시위 예비음모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고 점심 무렵 훈방되었으나, 시위 예정 시간인 채플 종료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강성구와 이상훈은 고스란히 25일 같은 시각으로 시위를 연기했다.

25일 당일 박물관에 진입하려던 두 사람은 박물관 출입문이 닫혀 있어 당황했다. 뒷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했으나 소음이 생기면 주의를 끌게 될 것이었다. 강성구는 소음을 감출 수 있도록 탈춤반의 치과대 이상훈에게 오전이지만 시끄럽게 연습을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강성구와 이상훈은 탈춤반의 시끄러운 사물놀이 장단 소리에 맞춰 문을 부쉈고, 강성구는 다행히 체구가 작아 겨우 진입할 수 있었다.

강성구는 유리창을 겨우 깨고 독재타도, 유신철폐라고 한문으로 쓴 플래카드를 내려뜨리고 선언문을 낭독했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신호로 계단참에 있던 이상훈이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안 깨지더라구요. 참 제가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때 참 겁이 났었던 것 같애요. 그것이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내가 갖고 있었... 그게 안 깨질 게 아니거든요? 구두로 치면 누구나 다 깨집니다. 근데 안 깨지더라구요. 플래카드 매고 난 책상 다리를 하나 남는 걸 가져와서, 힘껏 두 손으로 잡고 쳤드니 쨍그랑 하고 깨지더라구요. 그래서 참, 그 깨지는 순간에, 그 순간부터 하, 겁이 없어지고요. 사람이.. 온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어요. 깨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제가 아주 해탈, 불교로 말하면 해탈 같은 거 같이 맘이 편안해지는 게. 아,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깨지는 순간에, 제가 탁 버려지는 느낌이라 할까. 받으면서 제가 참 커다란 자유를 느꼈습니다. 아마 인생에, 일생에 느꼈던 자유 중에 가장 큰 자유를 그때 느끼지 않았나. 그리고 깨고 나니까 그 다음 거는 그냥 쉽게 깨지더라구요."

채플이 끝나고 몰려나오던 학생들과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이상훈이 형사들에 의해 곧 체포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24일에는 학교도 등교하지 않았던 경영학과 76학번 공유상은 사복형사가 여학생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싸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것이 시위가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 도서관 증축을 위해 쌓여 있던 공사용 건축자재는 진압경찰의 진입과 함께 투석전으로 확대되는 도구가 되었다. 페퍼포그차가 들어오고, 그것이 뒤집히는 등 학생들의 투석전으로 연세대 구내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참 난리가 나더라구요. 페퍼포그 소리가 그때 막 펑펑펑펑 들리고, 그 담에 그 최루탄 가스냄새가 착 스며드는데..... 눈물이 저절로 났는데, 하나는 그 최루탄 냄새가 나니까 매워서 우는 것도 있지만 우리 동기생들이 앞에서 스크럼 짜고 내려가는 걸 봤는데. 내 친구가 만약에 주동을 하고 내가 밑에 있었다면 나는 저기에 껴서 돌 던지고 같이 싸울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저는 또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너무 고맙고, 존경스럽고 친구들이. 그래서 여러 가지로 그래서 하튼 눈물이 나고 그랬습니다. 근데 한 4시쯤 돼서 문이 덜커덩 하고 열리더라구요."

진압 경찰에 밀린 학생 시위대의 일부는 뒷문을 통해 교외로 진출하여 이화여대 구내로 진입하였고, 그곳에서 이화여대 학생들의 응원에 힘입어 시위를 계속하다 신촌로터리로 진출하였다. 가두의 시민들의 박수를 받기도 하면서 마치 연고전 가두퍼레이드를 벌이듯 서강대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동안의 가두시위에서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연세대의 투석전이 그만큼 규모가 컸다. 이들 서강대에 진입한 학생들은 마침 교련 시간에 잠깐 휴식 중이었던 서강대생들과 합류 시위를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무전기를 빼앗기도 했다. 진압경찰이 출동해 서강대를 포위하자 학생시위대는 자진 해산을 했다. 이미 시위를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려 7명의 구속자를 낸 시위였지만, 전설적인 무악대첩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고, 이에 자극받은 서강대 등의 타 대학들이 시위를 뒤이어갔다. 강성구는 10월 25일의 시위가 긴급조치 9호 하에서 가장 큰 시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시위 주동자들의 역량이 커서가 아니라 일반 학생 대중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그 25일 사건을 얘기할 때, 긴급조치 9호 하의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였다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누구는 무악대첩이라고도 하고. 참 조금 낯이 뜨거웠습니다만 저는 긴조 9호 하의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였다라는 허상을, 저는 이걸 허상이라고 봅니다. 그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그건 시위 주동자들이 철저하게 조직하고 준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학생들의 자발성에 의해서. 학생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이것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지. 제가 기도한다고 그렇게 되지도 않고, 제가 준비한 내용을 보면, 그 학생들이, 저는 제가 전체적으로 행한 당시에 행한 행위의 전체의 양이 그 현장에서 경찰들하고 물리적으로 맞서서 돌 던지고 그 의식, 그런 의식, 우린 의식화라도 되어 있었지만, 그렇지도 않은 학생들이 수천 명이 그렇게 길거리로. 그 학생들 하나의 행위보다 제 행위가 절대로 크다고 생각하지 않구요."

10월 25일 시위를 이끌었던 이들 학생운동가들은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면서 노동운동 등에 투신하고 사회운동가로, 목회자로 현장 활동을 이어왔다.
 

글·이경은 전 민가협 초대 상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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