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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사회와 이재오

 

불공정사회와 이재오

 

 

글·어수갑 eohsgkdemo.or.kr

 



"아빠는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중 하나 아닌가요? 요 세 가지 직업이 아니면 아빠가 아니잖아요. 그냥 동네 아저씨지. 아니, 표정들이 왜 그래요? 취직하려고 토익공부하려는 사람들처럼"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했던 말을 패러디한, 유명환 장관 딸의 나홀로 특채사건으로 공정한 사회 구호가 진창에 곤두박질 쳤을 때 인터넷을 떠돌던 한 누리꾼의 말이다. 웃고 넘기기에 앞서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맘 편히 살아갈 수 없는 불편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개그보다 못한 불공정사회를 향해 날리는 똥침 한방

언젠가부터 공정한 사회가 나라의 화두가 되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제발 그렇게 되길 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가 얼마나 불공정한 사회인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강남으로 상징되는 엄청난 부와 권력의 세습벨트는 나라를 강남과 강남 아닌 곳으로 나눠놓았다. 강남공화국에서 강남몽을 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위장전입·부동산투기·세금탈루·병역기피·논문표절 등 온통 공정사회를 거스르는 것들인데, 그들은 대개 스스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민들을 지도편달하기 위해 총리와 장관을 위시한 권력의 노른자위를 모조리 독식하려한다.

그들만의 리그로 기회독점체제를 구축해놓고 자자손손 누리려는 이들에게 일단 제동이 걸렸다. 후반기 국정지표로공정한 사회를 내건 것은 대통령이지만, 그것을 추동하는 힘의 원천은 이미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민들이다. 많은 이들이 공정사회라고 하는 슬로건이 진실로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배의 정당화를 위하고 레임덕을 최대한 방지해 보겠다는 얄팍한 정치공학적 수사는 아닌지 의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업프렌들리니 부자감세니 하면서 한편으론 친 서민을 말하는 일관성 없는 화려한 언술을 경험했기에, 만약 후자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공정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제도적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정사회 전도사 이재오

사실 공정한 사회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일찍부터 몽매에도 그리던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른 말이 아니던가. 현 정부에도 과거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공정한 사회라는 구호가 남다르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면, 이쯤에서 떠올려지는 한 사람이 있으니, 국민권익위원장을 거쳐 지금은공정한 사회의 전도사로 사회 각층과 소통을 도모하고 있는 이재오 특임장관이다.

1988년 어느 날 독일 베를린의 쇠네베르거우퍼에 위치한 유럽민협의 사무실로 팩스 한 장이 날아들었다. 이재오 당시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이 보낸 자필이력서였다. 그것을 보내기 얼마 전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고 최종욱 형(그는 귀국하여 초창기 학단협 대표를 하며 진보학술운동을 이끌다 지병으로 사망했다)이 내게 미리 귀띔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용처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당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조국통일운동이 절정을 향해 달아오를 때였다. 아마도 당시 이재오 의장은 유럽을 경유하여 북쪽 사람들을 만나 통일문제를 논의할 의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해외운동권이 다리를 놓아주기를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우리 운동은 통일운동에서 그 출로를 모색하려는 분위기를 몰고 문익환 목사, 작가 황석영의 잇단 방북이 있기 직전이었으므로 그의 구상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추진되지는 못했다. 공안정국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공안탄압의 광풍 속에 그도 구속되었다. 당시 그는 민족민주운동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이었으며 제1차 범민족대회 국내 준비위원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전민련은 어떤 단체였나.

전민련의 결성과 조국통일운동의 확대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던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노동자·농민 등의 기층 대중운동의 성장을 토대로 1987년 10월경부터 민족민주세력의 구심을 형성하기 위한 전국적 차원의 운동연합체 건설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8년 9월 2일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2월 22일 제14차 회의에서 전민협 결성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준비위원회를 통해 참가 단체를 확대하고 집행부 구성을 확정시킴으로써 1989년 1월 21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을 위한 창립대회를 1,1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연세대에서 개최하였다. 노동자·농민 등 8개 부문 단체와 전국 12개 지역 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된 전민련(공동의장 이부영·이창복)은 기층 민중운동의 참여가 대폭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전선운동과 차별성을 가졌다.

하지만 노선과 입장의 대립과 불일치가 남아 있다는 점, 전민련에 가입된 각 부문 및 지역 단체의 역량이 전반적으로 부실하다는 점, 통일전선운동으로서의 전민련 활동을 이끌어 나갈 주도 세력이 부재하다는 점 등의 한계를 안고 출발하였다.

전민련은 1989년 1월 21일 결성식에서 대북 관계 및 5공 청산 등 대내외 정치문제에 대해 제도정치권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력을 적극 행사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들은 결성선언문에서 진정한 민중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외세 자주화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조국통일운동을 촉진시키기로 했다. 1988년 전민련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목표로 전개되었다. ①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투쟁을 통해 노 정권의 동요의 폭을 극대화 한다 ② 대중투쟁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정치투쟁으로서의 진전을 위한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전개 한다 ③ 미·노 일당의 기만적 북방정책의 본질을 폭로하고 두 개의 한국 정책을 저지한다.

전민련은 출범 이후 5공 청산과 광주학살 원흉 처단투쟁, 국가보안법 철폐, 토지공개념 도입, 민자당 해체 등의 반파쇼민주화운동과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주한미군 철수 등의 반미자주화운동 그리고 8·15 범민족대회 등의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8·18 영등포 을구 재선거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1990년 4월 21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 13개 재야단체와 함께 국민연합을 결성하는 등 운동세력의 통일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영등포 을구 선거를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하였고, 그것은 합법정당 논쟁을 거쳐 전민련의 분열로 이어졌다. 1989년 5월 전민련 상임집행위에서의정치세력화 소위원회구성을 계기로 다시 표출된 합법정당 결성 추진 움직임은 영등포 을구 선거 이후 보다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며, 합법정당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는 조직 내 성원들은 그 직을 사임하고 추진한다는 전민련 2차 중앙위의 결의에 따라 9월 28일 전민련 간부 중 이부영 등 합당 추진 인사들이 사직하고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이 결성되었다.

이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정권의 탄압으로 조직역량이 약화되었으며,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해체되었다. 이상이 전민련의 결성과 활동 및 해체 과정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다.

그에게 통섭의 지혜를 기대한다

나는 인간 이재오의 DNA 속에 전민련을 비롯한 운동에 투신했던 기나긴 시절 가졌을 평화통일에의 열정과 사회변혁을 통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고자하는 욕구가 녹아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그가 사상적 편력을 통해 얻었음직한 통섭(通涉,Consilience)의 능력으로, 이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그리고 문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공정사회를 구현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속한 정권이 추진하고자하는 공정한 사회 담론이 정권의 비상을 꿈꾸는 날개가 될지, 침몰하는 배의 추가 될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르다.

하지만 그가 지난 은평구 출마 기자회견에서 "어렵지만 이번 선거에 사량침주(捨糧沈舟: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대처함)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고 여러분의 뜻을 겸허하게 기다리겠다"라고 했던 말을, 앞으로 남북문제 개선과 계층 간의 위화감 극복을 통한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는 데도 좌우명 삼았으면 좋겠다.

글 어수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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