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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다리에서 살아오는 아름다운 청년의 기억

전태일다리에서 살아오는 아름다운 청년의 기억

- 전태일다리 이름 짓기 캠페인에 참가한 김영문, 김민수 씨


글·사진 이은희 eunny21naver.com


올해 11월 13일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살라 참혹한 노동현실을 고발한지 딱 40년이 되는 날입니다.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재단에서는 전태일 2010이란 제목으로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전태일다리 이름 짓기 범국민 캠페인 808국민행동. 40여 년 전 스물셋 꽃다운 청년 전태일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그었던 청계천 평화시장 앞 열세번째 다리(현재의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 로 부르자는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한 김영문, 김민수 씨를 만났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청계천 평화시장 앞 다리 위 전태일 반신 부조상 옆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1인 시위가 이어졌다. 그들이 손에 든 피켓에 쓰여진 글은 "시민의 힘으로 전태일 다리를 만들어주세요". 현재 버들다리로 불리는 이 다리의 이름을 전태일다리로 바꿔 부르자는 캠페인이었다. 이름하여 전태일다리 이름 짓기 범국민 캠페인 808 행동. 전태일의 생일인 8월 26일부터 기일인 11월 13일까지 80일 동안 매일 8명의 각계각층 인사가 1시간씩 릴레이로 진행한다는 의미다. 캠페인에 참여한 808명은 유시민, 배우 박철민, 권해효, 홍석천, 김경형 감독 등 이름 있는 이들뿐 아니라 전태일의 친구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중학생, 청년 등 오늘을 사는 전태일들이었다. 그들 중에 40년 전 청년 전태일의 친구였던 김영문 씨와 40여 년 전 전태일과 비슷한 나이인 스무 살 청년 김민수 씨가 있다. 두 사람을 40년 전 그곳, 평화시장이 바로 보이는 전태일다리 위에서 만났다.

"내 앞에서 불을 그었던, 내 친구 전태일"

김영문 씨(사단법인 MK패션수출산업발전협회 수석이사)는 청년 전태일의 친구였다. 40년 전, 20대 초반 두 사람은 평화시장에 벌집처럼 가득했던 영세봉제공장의 재단사, 노동자로 만났다.

"당시 평화시장 2~3층엔 작은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있었어요. 태일이와 저는 다른 공장에 다니긴 했지만 화장실이 건물 중간에 있어서 쉬는 시간에 자주 만났죠. 나이도 비슷하니까 자연스레 친구가 되고요."

전태일과 함께 했던 바보회는 처음엔 친목모임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유난히 영민하고 생각이 많았던 친구 태일로 인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하루 열네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에 찌든 그들의 열악한 노동상황을 보게 됐다. 청계천 헌 책방에서 전태일이 산 근로기준법 책 덕분에 근로기준법이란 게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틈만 나면 모여 앉아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토론했던 그들은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상황을 알리기 위해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내고 설문조사도 벌였다. 그것이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해결될 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태일이 제가 일하는 동화시장으로 찾아와 창문가에 서서 둘이 얘기를 많이 했죠. 그런데 11월 13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을 거예요. 깊은 고뇌에 찬 모습으로 태일이 찾아와 평화시장에 노조가 만들어지려면 세 명은 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거예요.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개선되지 않은 현실을 보며 고민이 참 많았던 듯해요."

그리고 운명의 11월 13일. 김영문 씨는 마치 어제 일처럼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바보회 친구들은 그날 1시20분, 점심에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했다. 세상에 알리려면 신문 기사화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이벤트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최소한의 노동조건인 근로기준법조차 철저히 무시되는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휘발유를 준비하면서도 친구 태일이가 그런 결심을 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는 그 시간에 노동자들이 모이면 태일이가 거리 중간에 서서 우리의 요구를 말하고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태우기로 했어요. 그런데 평화시장 입구에서 경찰과 경비들이 문을 막고 나가지도 못하게 했죠. 현수막도 빼앗고요. 미칠 노릇이었죠. 이 상황을 지켜보던 태일이 우리 먼저 내려가 있으라 하더군요."

10여 분 후 태일이 내려왔고 바로 몸에 불을 붙였다. 1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순식간에 목격한 현실이었다. 이미 몸에 휘발유를 부었는지, 불길은 온몸을 휩싸고 솟아버렸고 전태일이 쓰러졌다. 정신없이 불을 끄자 머리며 입술이며 온몸이 불에 그슬린 태일이 일어섰다. 그리곤 마침 다가온 어느 언론사 마이크에 대고 무언가를 얘기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병원에서 태일은 숨을 거뒀다. 전태일과의 아픈 인연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군에 다녀온 후 평화시장에 노조가 생기고 78년엔 지부장도 맡아했다. 1980년 5·17 군사쿠데타 이후 들어선 정권이 해체 명령을 내리기까지 많은 전태일들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잡혀가고 투옥됐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도 일어서서 우리의 요구를 외쳤던 태일이의 모습이 평생 잊히지 않아요. 얼마나 정신력이 강했으면 그랬을까 싶고...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20대 노동자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봉제업계에서 일해 온 그의 현재 직함은 사단법인 MK패션수출산업발전협회 수석이사.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약자인 협회 이름처럼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제품들을 살리자는 취지로 동대문과 남대문에서 활동하는 봉제 관련 상인들과 디자이너들이 모인 단체다. 단체의 목표는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만 판매하는 상가를 설립하는 것. 현재는 디자이너 인큐베이팅과 기술교육 등을 시키고 있다.

"처음부터 다리 이름을 그리 지었으면 좋았잖아요. 다리 위에 동상이랑 많은 사람들의 글을 새긴 동판도 있는데... 저야, 친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오히려 많은 분들이 태일이를 위해 이렇게 힘써주시는 게 고맙지요.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태일이 이름도 널리 알릴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앞으로도, 젊은 친구들도 전태일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바람 부는 다리 위에서 전태일 부조를 바라보고 선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무살 청년,
광화문 광장에 전태일 동상이 서는 날을 꿈꾸다


올해 갓 스무 살의 청년 김민수 씨는 808시민행동 첫날 전태일 동상 옆에 섰다. 청년유니온 회원으로서였다. 그런데 이 친구 이력이 범상치 않다. 올해 3월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입학. 4월중순 자퇴. 대안학교 교사, 마포FM 이빨을 드러낸 20대 제작진 중 한 명, 커피숍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 현재는 청년유니온 노동상담팀장.
입학 한 달 반만에 대학을 때려 친 것은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만 목매는 또래들과 학교에 대해 깨끗이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었다. "기성세대가 부리기에 적합한 기계가 되기 위해 스펙을 쌓아 일자리를 얻고 끝없이 경쟁하며 살다 죽는 모든 과정이 싫었다. 누군가는 실패해야 내가 성공하는 구조를 만드는 출발선 격인 대학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당찬 대답이다.
그가 전태일을 진지하게 찾아보기 시작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계기였다. 중학생 때 그가 좋아하던 래퍼 MC스나이퍼의 노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를 들었다. 몸에 불지른 전태일의 추락, 나는 말하네 늙은 지식인들이 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이들은 몸으로 실천했음을이란 노랫말이 팍 꽂혀왔다. "전태일이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회자되는 걸까" 궁금했다. 『전태일평전』까지 찾아 읽었다.

"제가 집회나 시위 같은 방식은 좀 내켜하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 동상 옆에서, 나 혼자 한 시간이나 서있지? 싶었어요. 그런데 한 시간 동안 그곳에 있는데 정말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더라고요. 정신이 맑아지고 겸허해지는 느낌이랄까?"

현재 김민수 씨는 청년유니온 노동상담팀장을 맡아하고 있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청년들을 위한 노동구제 상담 창구가 꼭 필요하다고 그가 강력히 주장하자 덜컥 팀을 만들고 그에게 팀장 직함을 내려줬다.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그 일을 맡아해야 하는 청년유니온 시스템 덕분이란다. 이 일과 함께 공인노무자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도 한다.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몇 번 하다 보니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노동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단 걸 절감한 까닭이다.

"광화문광장에 전태일동상이 들어서는 날이 오면, 우리나라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거란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정말 그럴 거 같지 않아요?"

발랄하고 총명하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챙기고 세상을 돌아볼 줄 아는 스무 살 청년. 아마 전태일이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 두 사람을 만난 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서울시의회가 전태일다리란 이름을 기존 버들다리와 함께 쓰기로 의결했다는 뉴스를 볼 수 있었다. 40주기를 기념하는 문화제도 서울광장에서 열린다고 한다. 잘된 일이다. 이제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의 동상 앞에서 잠시 멈출 때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고된 노동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하늘에서도 노래하며...
글·사진 이은희 [희망세상] 독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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