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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시] 태안사의 아름다운 곰_국토의 시인 조태일

태안사의 아름다운 곰_국토의 시인 조태일

글·서효인 humanlovernaver.com

 


때 아닌 역병이 돌고 있다. 병에 시름할 시간도 없이‘우리의 땅’에 그들은 묻히고 있다. 이른바 구제역이라 불리는 가축의 전염병은 그 병의 진원지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전염이 의심되는 가축은 무자비하게 살처분되고 있다. 1월 중순인 현재 200만 마리의 돼지와 소가 매장되었고, 남도에서는 AI로 인 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닭과 오리가 땅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깊게 판 땅에 한때 농민과 고락을 함께하던 가축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 위로 흙을 덮어버린다. 이 잔혹한 처분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 와중에 사라져가는 생명 의 존엄성에 대해서 우리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숙연함 앞에 서서 시를 읽는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조용히 돋아 난 풀잎 하나’에도 혼을 느끼고 숨결을 가늠하던 시 인에게 오늘날의 현실은 아비규환, 그 자체일 것이 다. 그뿐인가. 시인이 그토록 사랑하던 국토의 현실 은 그가 장사처럼 일을 하고 소년처럼 시를 쓰던 시 절처럼 우리에게‘허연 뼈까지를’요구하고 있다. 실 제 발바닥이 다 닳을 만큼 열심이던 농가의 노부부는 그날 오후 살처분 될 소에게 마지막 여물을 주며 눈 물을 참지 못했다. 어느 대학의 청소노동자는 새해 첫날 해고통보를 받고 사상 최악의 추위 속에서 역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겨울은 겨울대로 살을 에이듯 차갑고, 여름은 여름대로 너무나도 뜨거운 날들이 우리의 국토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토의 시인 조태일은 1941년 전남 곡성군의 사찰 에서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곡성의 안쪽,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태안사가 시인의 고향이다. 지리산의 굽이진 산세와 섬진강의 맑은 흐름과 함께하던 시인 의 유년시절은 1947년 여순사건과 함께 끝나고 만다. 여순사건 당시 태안사의 대처승이었던 시인의 아버 지는 식솔을 이끌고 광주로 피난 아닌 피난을 가게 되고 이후 조태일이 12세 때에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나 죽고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고향 땅을 다시 찾 아라”7남매 중에 넷째였던 조태일에게 유일하게 남 겨진 이 유언은 이후 시인이 온몸으로 맞서야 했던 시대에 대한 강력한 예언처럼 들린다. 그리고 실제 시인 조태일의 삶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벼린 식칼처럼 날카로웠고 타오르는 횃불처럼 뜨거 웠다. 조태일은 시를 쓰면서 한 번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88년에 있었던 ‘민족문학교실’강연에서 시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가지 태도에 대해 말한 다. 첫째는 타락한 사회에 굴종·순종하는 것, 둘째는 현실을 도피하는 태도, 셋째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변혁시키려는 행동적 태도이다. 시인의 태도는? 당연히 세 번째이다. 시인이 견지한 이러한 태도는 평소 의 그의 별명이었던‘태안사 곰’처럼 우직했으며 힘이 셌다.



4·19 혁명을 광주고등학교의 운동장과 광주의 거리 에서 맞이한 시인은 절친한 친구 박석무와의 제주도 무 전여행, 그리고 어린 조카의 가난으로 인한 죽음을 통해 문학에 대한 꿈을 굳건히 하게 된다. 그에게 시란 시대의 증언자이자, 대변자이자, 미래에 대한 예언자이며 설정 자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1962년 경향신문 신춘문 예로 시단에 데뷔한 이래 조태일의 시가 현실과 불가분 의 관계에 놓이게 됨은 너무나 자명하다. 다소 낭만적 서 정을 다루었던 첫 시집『아침 船舶』이후에 여러 시인과 어울리던 조태일은 군 제대 후 두 번째 시집『식칼론』에 서부터 본격적으로 저항의 태도를 확실히 한다. 시집을 준비하던 1969년 시인은 월간 시전문지『詩人』으로 당시 젊은 시인들의 구심점 역 할을 자임하였고, 점점 더 폭압적이 되어가던 당시 정권에 맞서는 문학 인의 최전선이 되기도 했다. 결국 『詩人』은 당국의 압력으로 폐간되고 만다.(후에 2003년, 이도윤 시인이 반년간지로 복간하여 현재까지 간행 되고 있다) 애정을 가지고 어렵사리 펴내던 잡지의 폐간은 앞으로 그에 게 다가올 시대적 불화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조태일은 유신독재체제와 맞서는 문인 단체 창립에 힘을 모으 고 초대 간사직을 맡았다. 현재까지 저항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문학 단체인‘한국작가회의’의 시작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그것이다. 박정희 정권에게 눈엣가시였던 단 체의 간사인 그가 세 번째 시집『국 토』를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하자 당연하다시피 판매가 금지되었다. 평소에 보여준 그의 저항 시인으로 의 면모가 시의 구절구절마다 강직 하게 드러났다. 시인은 잘못된 현실 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 화법을 구사한다. 독재정권에게 어 떤 두려움이나 외면도 없이 식칼을 들이대는 그의 정신에게 긴급조치라는 독재의 철퇴가 가해진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했다. 1977년 시인은 양성우 시인의『겨울공화국』발 간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1979년 박정희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는 이 유로 투옥되기도 한다. 조태일의 그토록 사랑했던 국토의 겨울은 긴 겨울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을밤의 총성으로 국토에 드디어 봄날이 오는 듯 했다. 그러나 새로운 군 부가 서울의 봄을 짓밟았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탈취해 버렸다. 시인은 계 엄의 해제를 촉구하는 지식인 서명과 평론 등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군부에 저항했다. 그러나 시인의 날카로운 시안도 1980년 5월에 벌어질 광주에서의 참사까지 예측하진 못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시인은 2년간 절필을 했고 신경림, 구중서 등과 함께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역시 2년의 징역형 을 받는다. 시인은 이후 광주대 교수로 일하며 고향의 후학을 살피며 시창작에 힘쓴 다. 생명시로 일컬어지는 조태일의 후기 시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부드럽고 아름다운 언어의 결이 살아있다. 우리가 조태일 시인에 대한 평가를 남성적 이고 강건한 저항시인으로 단순화시켜서는 안 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시 와 자유, 자유와 자연에 대한 심미적 실험을 계속하던 시인은 평소 사람을 좋 아하고 그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인간적 우애를 나누는 습관을 평생 간직했 다. 광주대의 제자와 지역의 동료작가들과 친밀하게 대화하며 든든한 무등산 처럼 곁에 있었다. 늘 그러하였듯이 1999년 그의 고향인 태안사로 학생들을 이끌고 답사여행을 갈 때도 그것이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라 누구도 생각하 지 않았다. 현재 태안사에는‘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건립되어 시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곰 같은 사내로, 아름다운 시인으로 늘 우리 곁에 있을 것 같던 조태일 시인은 그렇게 새로운 세기를 보지 못하고 급성 간암으로 눈을 감는다. 그리 고 얼마 있지 않아 2000년이 왔고 후세의 사람들은 여전히 발이 붓도록 우리 의 국토를 밟고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국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시인의 식칼과도 같은 정신은 태안사의 곰처럼 영원할 것이리라.

 
글 서효인 시인, 2006년 계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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