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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한 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대학교 서클 한맥

모든 것은 한 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대학교 서클 한맥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문제가 된 글은 한맥 6호에 실린, 광주대단지 실태를 고발한 르포르타주 「광주는 죽지 않았다」이다. 80년 5월의 광주가 아니다. 김영곤과 함상근 등 고려대 서클 한맥 회원들은 경기도 광주에 찾아가 한 편의 글을 쓴다. 광주에서 그들이 들은 것은 한 여성의 죽음이었다. 쫓겨난 철거민들의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산부가 분만한 아기를 삶아 가족의 아사를 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참상이 바로 다른 곳이 아닌 광주단지에서 일어났다.

뉴스메이커 556호에서 한맥 회원 조상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청계천 주변의 인쇄공이었던 한 가장이 아내가 허기에 지쳐 실성해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고 하며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하는 이장의 생생한 증언에 치를 떨었다. 직접 보고 들은 현장을 오히려 걸러서 광주대단지 르포를 꾸몄다."

군사정권은 도시 빈민의 실태를 고발한 이 글을 학생들이 조작한 것으로 몰아붙였다. 1979년 피살되기 전 방송에 출연한 박정희 대통령이, 고대 학생들이 사실을 왜곡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말할 정도로 이 글이 준 당혹감과 파장은 컸다.
김영곤은 「한맥 한사회 민우 야생화 그리고 68그룹의 형성」이라는 글에서, 한맥 회원들이 민우지 사건으로 구속돼 만기를 채운 후에야 출소한 배경에는 한맥 회원들의 활동에 관한 기억이 박정희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라고 썼다.
광주대단지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두 바퀴를 돌았을 때였다. 산업화와 함께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청계천 주변 등지에 살며 도시 빈민이 되었다. 이주 정책에 따라 정부는 철거민들을 경기도 광주로 쫓아냈다. 1971년 8월 10일. 철거민들은 대책 없는 이주 정책에 항거해 성남 출장소를 포위하고 관용 차량과 경찰차를 부수고, 파출소를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김영곤이 광주 대단지에서 본 것을 말한다.

"집집마다 요 텐트 두 배 크기의 땅만 준 거에요. 움막 같은 좁은 방에 한 가족이 모여 있고, 연탄 화덕이 전부였어요."

광주 항쟁을 계기로 그 지역은 성남시로 승격되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를 며칠 앞두고 나는 여의도로 향했다.

김영곤을 찾아서

전날 한맥 회원을 수소문하기 위해 김낙중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소개받은 이의 이름은 김영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익숙한 이름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김영곤은 동명이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료를 읽으며 접한 김영곤이라는 이름이 그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평생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며 수배의 삶을 살았고, 현재 비정규직 강사들의 교원지위 회복을 위해 수년째 여의도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그 김영곤이었다.
늦은 저녁 여의도로 향하며 나는 13만 5,000여 명의 비정규 대학교수 중 하필 그가 여의도 국회 앞에 텐트를 치고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했다. 착잡했다.
국회 맞은편 국민은행 건물 앞 등산용 작은 텐트 안에서 김영곤, 김동애 부부는 도로의 소음에 휩싸인 채 노숙하고 있다. 김영곤은 고려대 경제학과 68학번이다. 농촌 출신인 그가 대학에 입학해 처음 가입한 서클은 한국농어촌문제연구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농현상이 극심한 상황에서 농촌 문제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1학년 때 동학혁명이니 민족주의니 하는 것을 공부하자고 해서 학생들을 모았어요. 서클 형태는 아니었고,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이었어요."

그 시기 중요한 인연을 만난다. 필명인 유한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양학부 도서관 사서 유기성이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전북 장수에서 고향 선배의 국회의원 선거를 도왔다.

"제도 정치권의 한계를 실감하고 사서가 된 분이에요. 이분이 아나키스트였던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시고 에리히 프롬의 세인 소사이어티 등을 영문으로 읽히고 독서지도를 했어요. 결혼하면 이웃을 덜 생각한다는 이유로 평생 독신으로 사시며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실천했지요."

유기성이 자리를 마련해 학생들과 함께 토론에 참여했다. 민맥과 한모임 학생들도 유기성 씨와 교류하고 있었다. 때론 50여 명의 학생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며 민주주의를 꿈꿨다.
다음 해인 1969년. 68학번 독서모임 친구들과 3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민맥, 4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한모임을 통합해 한맥을 만든다. 지도교수는 김윤환이었다. 회원들은 그가 소장으로 있는 노동문제연구소의 영향으로 노동문제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서클들의 관심이 농촌문제에 집중된 분위기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흐름이었다.
한맥에서 주최하는 가장 큰 행사는 해마다 열리는 전국대학생학술토론대회였다. 전국 각처의 대학생 일이백 명이 찾아와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회의를 마치면 다락원으로 이동해 다시 밤샘 회의를 했다.
한맥을 결성한 1969년은 매일같이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있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때론 일요일도 짱돌을 들고 교문 앞에서 경찰들과 대치했다. 그 시절 고려대는 전국적으로 시위 인원이 가장 많은 학교로 손꼽혔다.

내 인생의 도시락 한 통

1971년 10월. 광주대단지의 실태를 기록한 르포가 문제시되면서 한맥의 장신구 회장이 붙들려갔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써서 항의한다. 대자보는 필력이 좋은 윤재근이 썼다. 대자보엔 부정부패의 원흉 세 명의 권력자 이름을 표기했다.
처음엔 L모, Y모, B모, 다음엔 이모, 윤모, 박모, 그 후엔 이○락, 윤○용, 박○규으로 바뀌었고, 10월 4일 학교 정문에 붙은 대자보엔 실명을 그대로 표기했다. 부정부패의 원흉 이후락, 윤필용, 박종규를 처단하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1971년 10월 5일 새벽 1시 30분경.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 군인들이 짚차 한 대와 군용 트럭 세 대를 타고 고려대학교에 난입했다. 그 시간 다섯 명의 한맥 회원 함상근, 강승규, 윤재근, 정승옥, 심강일은 학생회관에 있었다. 매일 시위를 마치면 정문을 빠져나가지 못해 학생회관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이날 김영곤은 전국대학생 토론회 준비를 위해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그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다음 날이었다. 지방에 내려가지 않았으면 그도 고초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은 회원들을 짚차에 태워 수도경비사령부로 데려갔다. 군인들은 조인트를 까고 쇠뭉치로 구타하는 등 밤새 학생들을 고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려대 총장 김상엽의 항의로 새벽 6시 곤죽이 된 학생들이 총장 집으로 실려왔다.

기자들을 통해 무장군인 난입사건이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귀에 들어갔다. 고려대에서 대응을 고민하는 사이 서울대에서 먼저 성명서를 내고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 학생들도 즉시 시위에 들어갔고 전국의 대학에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사건은 대학가를 넘어 일파만파로 퍼졌다. 문교장관 민관식은 국방장관에게 항의서를 보내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10월 8일, 야당 국회의원들의 요구로 국방위원회가 열렸다. 사흘 뒤인 10월 11일엔 국방장관이 문교장관에게 사과문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 날, 박정희 정권은 서울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서울지역 10개 대학에 휴업령과 함께 군인들이 진주했다. 10월 15일. 한맥 회원들은 지도교수 김윤환의 부름을 받는다.

"고려대에 군인들이 들어오기 직전에 우릴 불렀어요. 총장이 한맥을 해체하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죠. 인촌기념관 근처에 철조망이 있었는데 그걸 미리 다 잘라놨어요. 긴박한 상황이라 퇴로를 확보한 거죠. 그날 학생회관 앞에서 군인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것을 막던 현승종 교수가 구타당했어요. 학생들에게 신임이 큰 교수였죠."

한맥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이때 김윤환은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함상근과 회원들은 철조망 너머로 피신했다. 김영곤과 조연상만 학교에 남게 되었다. 군인들은 학생들을 보는 대로 구타하고 잡아들였다. 고려대 학생 5천명 중 1,500명 정도가 연행되었다. 김영곤과 조연상은 학교 출판부 서고로 피신했다. 책장 맨 윗칸에 기어올라가 숨었다. 서고 바깥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소리와 쫓겨온 학생들이 끌려가고 구타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이 건물마다 다니며 학생들을 사냥하듯 잡아들이고 있었다.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하나 까넣을까요? 최루탄을 출판부 안에 던지겠다는 소리죠. 조마조마한데 여긴 관둬. 하는 상관의 목소리가 들려요. 꼼짝없이 잡힐 뻔했죠. 3박 4일 허기를 견디다 월요일에 출근한 출판부장이 싸온 도시락을 줘서, 그때 한 끼를 먹었어요. 그날 출판부장이 자가용 트렁크 안에 숨겨줘서 겨우 학교를 빠져나왔어요."

두 사람은 수배를 피해 도망 다녔다. 친구 집에 피신한 조연상이 곧 잡혔다.

"그로 인해 우릴 피신시켜준 출판부장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어요. 고문으로 골병이 들어 오랫동안 고통 받은 것을 나중에 알게 됐죠."

2010년 텐트 안에서 만난 한맥의 오늘

김영곤은 현재 고려대에서 노동의 역사와 노동의 미래를 강의하고 있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고려대분회를 만들어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의 위원으로, 2007년 9월부터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있다. 그리고 국회, 고려대 등에서 대학생, 학부모와 함께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가 한맥에서 활동하던 시기와 현재 비정규 교수의 신분으로 보는 대학의 차이를 설명한다.

"당시엔 비판 기능이 대학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교수들은 자기 검열에 익숙해 있어요. 처음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데 질문도 없고 대답도 일절 없는 거예요. 너무 놀랐어요. 이게 뭐니? 그러면 선생님 틀려도 돼요?라고 말해요. 4대강을 왜 하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 나도 몰라요 하고 넘어가야지 강사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대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현재 대학의 실상입니다."

그가 볼 때 대학은 온갖 부패 비리가 난무해도 아무도 말을 못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그는 왜 텐트에서 노숙하고 있을까? 대학생의 학습권의 전제가 되는 대학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의 의결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교실에서 학생이 질문했을 때 질문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교수가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물어볼 수 있는 권리, 이것이 교육권이고 학습권이에요."



새벽 한 시가 넘어 인터뷰를 마치고 좁은 텐트에서 빠져나온다. 텐트 바깥에 노숙 부부가 쓴 피켓을 읽는다. 서정민 교수와 한경선 박사의 삶이 몇 줄의 글에 요약되어 있다. 김영곤은 두 열사 자녀들의 입학금과 등록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초겨울 찬바람이 노숙 부부의 텐트를 쓸고 지나간다. 올해는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오늘날 대학은 무장군인 난입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교원 지위가 없는 강사들은 입이 없다. 말할 수 없다. 김영곤, 김동애 부부의 과거 군사정권이 빼앗은 강사의 교원지위와 대학생의 학습권 찾기 싸움은 말할 권리를, 그 입을 되찾기 위한 현재의 싸움이다. 대학시절 독재에 맞서던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우민정책이라는 개발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대장정에 서 있다.

글·송기역 시인·르포작가. 『허세욱 평전』을 펴냈다.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을 답사하며 강과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르포르타주 『흐르는 강물처럼』(레디앙)을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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