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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시를 멋지게 바꾸는 가장 간단한 방법 - 좋은 도시란...

 

우리 도시를 멋지게 바꾸는 가장 간단한 방법

 

글·구본준 bonbon@hani.co.kr

좋은 도시란, 공공건축물이 아름다운 도시

여러분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마 그렇다는 분은 아주 적을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는 도시는 우리 맘에 들지 않는 걸까요? 아름답지 못해서, 편안하지 못해서, 그리고 다정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이 드는 도시, 돌아다닐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 우리 도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건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건축이란 공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건축 안에서 살고 일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건축을 느끼지 못합니다. 건축은 도시의 모든 공간을 이룹니다. 이런 건축이 잘못되면 우리 도시는 맘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없이 살아가는 곳이 되어버립니다.

좋은 도시는, 분명 건축이 좋은 도시입니다. 건축이 좋으면 무조건 좋은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도시들은 좋은 건축물이 많은 도시라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좋은 건축이란 물론 화려하고 크고 비싼 건축이 아닙니다. 사는 사람들이 만족하는 건축, 오래 오래 보고 써도 질리지 않는 건축, 한번 자리 잡으면 듬직한 친구가 되어 거리를 지키는 건축이 좋은 건축입니다. 이런 건물이 많을 때 우리 도시는 살만하고 정붙일만한 고향이 됩니다.

물론, 도시의 모든 건물이 이런 좋은 건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습니다. 절대 다수의 모든 시민들은 늘 풍족한 여유 없이 하루하루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살아가는 건축물들은 작고, 좁고,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을 찾기 전에 조금이라도 알뜰살뜰 쓸 방법 없나 찾아야하고, 보기 좋게 꾸미고 싶어도 그럴 경제적 여유가 없어 흉하면 흉한대로 사는 법입니다. 애초부터 건축의 예술성이니 미학이니 가치를 논하기란 사치스런 먼 세상의 한가한 이야기일 뿐이겠죠.



그러나 서민들이 살아가는 건축물들이 모두 뛰어나지 못하고 열악하더라도 도시가 아름답고 정다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쓰는 건물들이 좋은 건축이 되면 좋은 도시가 되는 겁니다. 어느 도시나 평범한 시민들이 사는 건물들은 뛰어날 수도 없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좋은 도시, 살고 싶은 도시라고 꼽는 도시들이 있는 것은 이런 공동의 건축물들, 바로 우리가 공공건축이라고 하는 건축물들이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주인인 공공건축물들이 정다워지고, 아름다워지면 도시는 곧바로 살만한 곳으로 바뀝니다.

공공건축, 모두에게 열린 공간

한번 생각해봅시다. 세상에는 내 것이 아닌데도 내 것처럼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함께 쓰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거리에 포근하고 정겨운 벤치가 하나 있으면 늘 그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기분이 달라집니다. 피곤할 때 내가 좋아하는 그 벤치에 앉으면 거리가 내 것 같습니다. 그 의자는 내 것이고,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의 세금으로 만든 공공의 의자이니까요. 동네에 놓은 거리 화분 하나만 예뻐도 수백, 수천 명이 즐거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공공건축물이 좋아지면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아름다운 도서관 하나만 있어도 동네 주민들의 삶의 질이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공공건축은 단번에 좋아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모두가 관심을 갖고 소중하게 여기고 고민해야만 좋아집니다.

공공건축은 열린 공간이란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마이클 왈저라는 학자는 도시의 공간을 외곬 공간과 열린 공간으로 나눠 구분합니다.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은 기능이 하나뿐이냐 여럿이냐가 됩니다. 기능이 하나면 외곬공간이고, 여럿이면 열린 공간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열린 공간입니다. 열린 공간은 기능이 여러 가지여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 공간입니다. 그 예로 드는 곳들이 분주한 광장, 활기찬 거리, 시장, 공원 같은 곳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열린 공간에서는 남들의 눈길을 받아들이고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열린 공간들은 모두가 중요하게 여겨야할 공동체적 가치를 제공하는 공간이며, 여러 사회계층을 하나로 묶으며 우리가 공동체에서 가져야할 덕목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런 열린 공간이 줄어들고, 외곬 공간이 늘어나면 도시는 배타적이고 쪼개지고 양극화되게 됩니다. 결국 열린 공간인 공공건축이 더 많아져야 도시는 더 민주적이고 더 행복하고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인 곳, 그래서 서민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유럽의 거리를, 선진국의 도시를 높게 평가하고 부러워하게 되는 이유에 바로 이 공공건축이 있습니다. 건축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간과되기 쉬운 예술이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공기처럼 너무나 익숙한 예술인 탓입니다. 우리가 환경 문제를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공기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처럼 도시를 제대로 가꾸려할 때는 공공건축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지만 실은 가장 간과되는 것, 그게 바로 공공건축입니다.

공공건축의 적, 토건동맹

그러면, 다시 우리 공공건축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왜 우리나라의 공공건축은 아직 우리 도시를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걸까요? 그건 건축이란 것이, 특히 공공건축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사회 전체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건축은 정확하게 그 사회의 종합적인 수준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어느 한 사람 똑똑하다고 좋은 건축이 나오지 못합니다. 조금 전문적인 말로 다시 풀면 건축은 아무리 가리려 해도 한 민족 단위의 문화 수준, 의식 수준, 기술 수준, 경제 수준, 민족성까지 가감 없이 명확히 드러나는 분야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천재가 가장 무기력하게 힘을 쓸 수 없는 예술분야(임석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공공건축이 아직 성에 안차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부족한 것은 우리 사회의 수준이 아직 낙후되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의 수준 문제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짜 주범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못나서가 아니라 진짜 건축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쁜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토건동맹입니다.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우리 문화를 후퇴시키고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집단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호 [희망세상]에서 말씀드렸듯 이들은 서로 이권을 공유하면서 똘똘 뭉친 일종의 마피아 패밀리입니다. 토건회사들은 로비와 불법 리베이트로 각종 토목 건설 공사를 발주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을 관리합니다. 토건회사들에게서 떨어지는 떡고물에 중독된 행정기관들은 토건회사들에게 목돈을 가져다주는 각종 공사를 남발합니다.

여기에 정치인들이 더욱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정치 자금 등으로 토건자본과 관계를 맺은 정치인들은 자기가 가진 권력으로 공공건축, 토목공사, 재개발사업을 지나치게 부풀려 시행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와 자본을 감시해야할 언론은 토건자본들의 광고로 먹고 살기 때문에 이런 검은 유착관계의 산물들에 눈감거나 오히려 경기부양책이라고 칭찬하기까지 합니다.

이 토건동맹들이 우리나라 공공건축을, 그리고 건축 문화 전체를 망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오히려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그리고 최근 들어 토건동맹들이 더욱 활개 치면서 온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공공건축물과 사회간접자본을 새로 많이 짓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짓는 방법을 보면 대형 건설회사들에게 국민 세금으로 공사비를 뭉칫돈으로 안겨주는 꼴입니다. 그게 지난 호 [희망세상]에서 말씀드렸던, 턴키 방식이란 것의 폐해입니다.

건축은 무척이나 전문적이면서도 예술적이고, 더욱 중요하게는 공공적인 분야입니다. 그래서 설계는 건축가가, 시공은 건설회사가 각각 맡아 서로 밀고당기며 자기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야 좋은 작품이 되는 건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턴키는 건설회사가 대장이 돼서 자기 부하로 설계자를 거느리는 구조입니다. 당연히 창조성보다는 건설사가 챙기는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가장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이익보다 공공성을 추구하는 공공건축에는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방식입니다. 선진국 어느 나라도 이런 턴키방식으로는 자기 나라를 대표할 중요한 공공건축물을 짓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 많은 방식을 우리나라에서만 미친 듯이, 그것도 최근 들어 더욱 미친 듯이 써대고 있습니다. 왜? 정치인, 지자체장, 공무원들이 자기네들 좋자고 쓰는 겁니다. 정치인과 지자체장은 자기 임기 내에, 한국에서 심지어 동양에서 아니면 세계에서 가장 크거나 높거나 비싼 건물을 지으려 합니다. 그러니 그런 막대한 돈이 드는 결정을 시민들과 토론도 않고 자기 멋대로 정해서 속도전으로 빨리 짓습니다. 당연히 전문가들이 천천히 따져가며 짓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공공건축, 사회의 정신과 가치를 담는 그릇

인류 역사상 위대한 건축물, 훌륭한 건축물은 거의 예외 없이 공공건축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공공건축물들은 예외 없이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중요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건물들을 보면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들은 없었습니다. 건물을 통해 어떤 가치를 구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건물이 몇 층인지, 몇 평인지, 얼마인지로 공공건축물의 가치를 매기는 것은 최근 들어, 그것도 한국이나 후진국들에서만 성행하는 현상입니다. 높은 건물이 나라의 능력과 부를 상징한다면 아직 100층짜리 건물 하나 없는 대한민국보다 먼저 100층 짜리 건물을 지은 북한이 더 앞서가는 나라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극장이 있는 나라가 세계 최고의 문화국가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그런데도 이런 한심한 논리가 토건동맹들이 하도 떠들어대니까 진실처럼 포장되고 랜드마크란 유령이 되어 떠돌아다닙니다.

공공건축은 그 사회가 지향해야할, 그리고 중시해야할 가치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공공건축은 크고 높고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사회가 꼭 가져야할 건물입니다. 조엘 코트킨이란 이는 도시는 거주자들을 한데 아우르는 그래서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정체성 안에서 생활해 나가게끔 하는 의식을 발달시켜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회학자 에즈라 파크의 말처럼 도시는 정신의 상태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태도와 관습, 정서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도시에, 정확히는 공공건축에 담습니다. 지금 우리 공공건축은 토건동맹들에 의해 장악되어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의 정신과 가치가 아니라 외부에 보이기 위한 관광 자원으로의 가치, 경제적 가치, 정치적 가치로 탈바꿈한 돈의 가치만이 담기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시민들이 좀 더 공공건축에 관심을 갖고, 잘못된 공공건축을 매섭게 응징하고 좋은 공공건축에 환호를 보내주어야 토건동맹의 검은 고리가 깨집니다.

건축물은 잘만 만들면 오래도록 도시를 빛내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래서 건축을 응고된 음악이라고도 합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르 코르뷔제는 건축은 원재료를 사용하여 감동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건축이 음악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감동적인 관계를 만들어준다는 것을 공공건축을 통해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그동안 부족했던 탓에 제대로 된 공공건축물들이 많이 나오지 못한 탓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존 러스킨이 말했듯 건축이란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하는 예술이며, 그 이유는 건축은 모든 사람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질 때 공공건축은 달라집니다. 이 변화 하나로 우리가 사는 도시는 사랑스런 곳이 됩니다. [희망세상]에 1년 동안 건축 이야기를 연재한 것은 사실 이 이야기 하나를 하기 위해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건축을 소개하는 기회를 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글·구본준 <한겨레> 대중문화 팀장, http://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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