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트라우마] 빨간 딱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
-대전 산내유족회 부회장 이계성
글·최현정 chhjung@paran.com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의 재소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적법한 절차도 무시한 채 당대 정권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계성 선생님. 그도 그날 그 구덩이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남원건국군을 이끌던 고 이현열 님. 오랜 세월 빨갱이의 자식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용납되지 못했던 상처를 품고 살아갔다. 상처를 품은 눈은 예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고 슬프다. 세 시간 정도의 만남 동안 그 두 눈에 눈물은 차오르려 하다가 이내 장난 섞인 호탕한 웃음소리에 덮여 사그라들곤 했다. 그의 단단한 어깨는 그렇게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삶 속에서 다져진 것일 테다.
아버지를 향한 깊은 원망으로 기억되는 과거. 이제 그는 아버지의 뿌리를 찾는 길 막바지에 서있다. 다음 세대에는 다시는 과거에 내가 겪었던 세상이 오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순간도 노력하고 있다는 그,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열심히 살았던 한 평범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한다.
"어머니 말씀이 해방 직전부터 아버님은 여운형 선생 운운하면서 그런 조짐을 보이셨다 해요. 어릴 때 기억으로 아버님이 해질 무렵에 자전거타고 들어오시면 일본 놈들한테 압수한 권총을 차고 오신단 말이에요. 일본 놈들 권총집이 가죽으로 벌그스름한 놈이 번쩍번쩍해요. 그 때는 이미 일본 군인들이 남원에서 진주 쪽으로 후퇴할 때로 인민위원회 주관으로 건국군들이 남원 읍내에서 자치를 하고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권총을 어머님 드리면 뒷단 장독에 숨겨 두셨어요. 그러면 일제시대 순사들처럼 그대로 시커먼 옷을 입은 경찰들이 집에 와서 아버지 잡아가려고 막 뒤지고."
군인과 우익청년들이 집안에 닥쳐와 장독을 부수고 가재도구를 내동댕이치는 장면에 아직도 가슴이 요동친다. 그런 끝에 1947년 어머니와 동생들과 남원 산동의 외가로 몸을 피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50년 봄 대전형무소에 면회를 가서였다. 아버지는 헤어질 때 악수를 청하셨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학살되었다.
한국전쟁, 살기위해 산에 오르다
인공치하였던 남원에서 어머니는 남원군당 여맹위원장으로 계셨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토벌작전에 의해 지리산으로 쫓겨 간다. 그렇게 유복한 가정의 개구쟁이 소년이 철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년이 굳이 눈밭이고 강물 위고 수없이 널린 퉁퉁 부은 송장을 보기까지 하면서 철들어야 했을까. 눈 쌓인 커다란 바위가 초가집인줄 알고 밥 좀 얻어먹자고 애걸복걸하던 기억에, 끝없는 눈밭 위에 펼쳐진 소나무 밭이 마치 국군토벌대로 보여 겁을 먹고 도망치던 기억에 호탕하던 웃음이 잠시 멈춘다. 그 중에도 두 살 아래 누이동생의 기억이 가장 뼈아프다.
"그해 겨울에는 그렇게 눈이 많이 와서 날씨까지 추웠어요. 그래서 3, 4일간을 잠도 안자고 쫓겨 갔지 않습니까. 그 인민군 패잔병하고 남원군 땅 사람들이 합류해서 명색이 빨치산이라 하는데 남원군 땅 사람들은 거의 비무장이었어요. 그때 그들은 살기 위해서 산에 오른 사람들이지 빨치산이 아니에요. 그런데 내 누이동생이 그런 식으로 뒤에 따라가다 보니까 여자 아니오. 나는 머슴애다 보니까 몸은 건강해서 산도 잘 타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동생이 발목을 다쳤단 말이에요. 그 추운데서 움직이지 않으면 혈액순환이 안 되어서 당장 동상 걸려요. 발목 삐어서 못 움직이니까 어른들이 업고 계속 도망친단 말입니다. 그러니 계속 얼어서 막 허벅지까지 가지색으로 변합니다. 어느 순간 바작을 진 어떤 농민이 오더니 누이동생을 싸가지고 산에서 내려가 버렸죠."
왜 그러냐고 물을 새도 없이 싸리나무로 엮은 바작에 실어 여동생을 보냈다. 결국 동생은 다리를 잘라야 했다. 동생 이야기로 붉어진 눈가에서 어머니 이야기가 이어지니 끝내 눈물이 흐른다. 지리산에 내려와 서울에서 온 피난민이라 속이고 전라남도 곡성에서 구례, 장성, 광주, 나주에서 강진까지 왔다. 어머니는 다섯 오빠를 둔 막내딸이라 이름이 김계단인데도 귀단아, 귀단아 하고 불린 귀한 사람이었다.
"강진에 처음 가서는 아침에 어머니가 수건을 얼굴에 둘러쓰고, 부끄러워서 그런지 몰라요, 쪽박을 가지고 나가서 밥을 얻어 와요. 그 때는 인심이 자기네들이 힘들어도 나눔의 정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 잡곡밥도 있고 흰밥도 있고. 제사를 지냈던 집은 무채를 얹어주고. 그것도 늘려 먹으려고 물을 부어서 먹었어요. 어머니가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나중에는 그것으로 먹고 살았지요."
아버지는 당신의 사상에 의해 마음이 다져졌겠지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 고생을 지켜보기란 말도 못할 노릇이었다. 지독한 시절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썩을 놈, 썩을 놈 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뭣 하러 결혼을 했느냐고.
"한번은요 어머니가 동네 부잣집에 식모를 해주었는데, 가을이 끝나고 가을일 한 사람들을 모아 그 대궐집에서 밥을 다 먹여요. 가을 갈치 찌개에 쌀밥을 수북이 담아주더라고. 그래 죽만 먹다가 위장이 줄은 놈이 그걸 싸갈 수는 없으니까 아구아구 먹었다 말이에요. 나중에 일어나는데 목구멍으로 마구 넘어오더라고. 그래서 아이쿠 이 아까운 걸 하고 입을 가리고 뛰어가는데 다 토해버렸잖아. 얼마나 먹고 싶음에 대한 갈증이 있었으면 이때다 하고 다 먹었잖아."
어디서든 무슨 일을 하든 붙어다녔던 빨간 딱지
세상이 옭아맨 굴레와 가난. 그리고 훗날까지 빨간 딱지는 세상과 마주할 기회를 점점 앗아갔다.
"월남전 일어났을 때 65년도에서 66년도 사이일거에요. 해외개발공사라고 해서 미국 중장비 회사에 우리 인력을 송출하는 기구가 있었습니다. 그게 신문에 났기에 지원을 했죠. 어렵게 합격을 하고 여권까지 나왔는데 신원조회 걸려서 못 갔습니다."
"내가 범죄자는 아니지만 어머님이 첫째는 남원군 땅 여맹위원장 아니었소. 또 산에 올라갔다 내려왔죠. 요새도 국가보안법 적용하는데 얼마든지 잡아다가 인신공격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항상 빨갱이라고 탄로날까봐, 혹시나 나를 아는 사람 있을까 두려워서 경계를 하고 다녔어요. 하여튼 식구들은 형제지간에도 그런 얘기 일체 안 해. 그렇게 해서 형제지간에 정이 없고 다감한 맛이 없어요. 항상 냉랭하고 할 얘기만 딱딱. 그게 생활이 되다 보니까 자녀교육도 그렇고 반려자와의 정이라던가 남들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가 노력을 해도 잘 안돼요. 이미 늦어버렸잖아. 그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가족을 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일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늘 뭔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했다. 처음에는 간이음식집에서 물지게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청소 일을 했다. 청소를 열심히 하다 보니 눈에 띄어 당대의 권력자 집안의 운전기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자동차를 공부하고 그 자의 업무와 취미를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그 집안의 비서가 되었다. 그 집안일이 자기 아니면 안 돌아가게 되는 자신은 완벽한 세파드였다고 생각했다.
"신원조회 기술서 있죠. 신원조회 정보계 형사가 그거 보는데 거기 친지관계를 적는 란이 있습니다. 내가 높은 사람 많이 모시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다 그 양반들 이름을 막 써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보는 담당관이 아 이거 조사할 필요도 없네.해요. 그 원리로 살았어요."
남들에게는 평범한 삶이었지만 자신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냉기가 돋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무쇠 같은 사람이 어머니 얘기만 하면 눈물이 천둥소리처럼 쏟아진다. 어머니는 2004년 어느 날 강진에 들르자 하시며 신세 졌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답을 하셨다. 이제 떠나시려 그러는구나 싶었다. 마지막 일 년은 곁을 지키면서 병수발을 했다. 2007년 3월 24일 새벽 12시 어머니는 숨을 훅 내쉬고 눈물을 주욱 흘리시더니 떠나셨다. 86세로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라고 장례식장에서는 허허 하면서 손님이 건네는 술도 한잔 씩 받아먹고 했는데 모두 떠나 새벽이 깊어지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소리 내어 엉엉 울어야 했다. 죽을 다짐 할 만큼 힘든 순간에도 지켜준 것이 어머니 아니었던가. 그놈의 빨간 딱지 때문에 앞길이 막혀 목숨을 끊으려 할 때에도 어머니는 늘 마음에 찾아오셨다.
학살터를 찾고 위령제를 지내며 세상밖으로 나오다
뼈아프게 살려면 한도 끝도 없고. 어떻게 보면 그 경험으로 재밌게 살아온 거지하고 생각하련다. 1998년도 주차관리직을 하면서부터 책을 읽을 시간이 생기자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현대사를 공부했다. 처음 학살터를 찾았을 때에는 이미 대전 참여연대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그들과 처음 만나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날 당시 참여연대 사업국장에게 물었다.
"이런 활동 하면 돈도 안 생기고 나중에 장가도 가야하는데 어떡해요? 하고 내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타고 났나 봐요. 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가슴에 남고 순수한지 그 때부터 제가 발동이 걸렸어요."
그렇게 2002년부터 대전 유족 모임에 합류했다. 학살이 일어났던 7월에는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한 달에 한 번 씩 유족회 모임을 갖는다.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부터 세상이 밝아보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린 젊은이들 덕택에 자신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할 수 있다. 또한 그 역시 같은 아픔이 있는 유족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 신고를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왔다. 그는 동질성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 한 구덩이에서 함께 부모를 잃은 자들이니, 빠듯한 살림살이일지라도 자장면 한 그릇 대접하면서 여태껏 자식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한 맺힌 인생여정을 들어주고 싶다. 최근 진실화해위원회는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 부당하며 국가는 유족을 지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 속의 겪을 것을 참 다 겪었어요. 8·15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요, 서울시내에서 4·19 현장을 봤잖습니까. 또 5·16. 87년도부터는 시청 앞 광장에서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깨고, 경찰은 최루탄 쏘고. 그 때 한국은행에서 일할 때요. 신세계 앞에 분수대 있죠. 명동 입구에서 난리가 나잖아요. 위에서 올려다 보다 뛰어내려 가지고 청경이고 나고 같은 직급이니까 다 통하지 않습니까. 청경한테 야 문열어!하면 학생들이 우르르. 학생들 이끌고 빨리 날 따라와! 하면서 숨겨주고 한국은행 분수대에서 학생들 몸 씻게 하고. 가만히 있어 내가 바깥에서 상황을 보고 올게!하고. 허허허"
허허허하는 그 웃음의 절절함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역사로 인해 불가피했던 삶의 질곡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외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했던 개인의 역사는 기억으로, 남은 삶으로, 그리고 후세대에게로 이어진다. 역사적 사건만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 사건 속에서 온 힘으로 분투했던 어느 한 사람을 같이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그가 살아있었으므로. 그 기억을 위해서 <역사와 트라우마>인터뷰를 했었다. 이제 인터뷰를 마친다.
*그동안 인터뷰를 허락하시고 살아있음을 증명해주신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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