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굳이 서울이 아닌 춘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 했던 건 장학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을 하고도 모자라 1986년 10월 말, 대학 입시를 한 달도 채 안 남겨둔 시점에 건 대항쟁으로 입건된 누나와 무기력하고도 무능력해 보였던 부모님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탓이 더 컸다. 1987년의 춘천은 여느 지방 도시처럼 고즈넉했다. 새벽이면 물안개가 몰려와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아침 8시에도 가게문을 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누나가 그렇게 부정하려 했던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정권이야 어찌 되었건 부모님 세대가 이루지 못한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혼신을 다할 것이라 스스로 다짐하며, 이곳에서 4년을 보내기로 결심을 하고 내려온 곳이었다. ‘봄내’라고도 하는 춘천(春川)의 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햇살은 화살처럼 등더미에 꽂히고 꽃과 바람이 일렁이는 호수를 품은 도시의 봄은 찌들대로 찌든 서울의 봄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빛깔이었다. 하지만 대자보 한 장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지방대학의 캠퍼스는 시들했고, 누나와 누나의 동료들을 보면서 현실 변화에 가장 민감할 것이라 여겼던 대학 선배들조차 세상일과는 별 상관없이 사는 듯 보였다. 이런 낯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은 집에서 해방 됐고 누나가 짊어진 이념과 전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부담 없이 내려놓을 수 있어서 불안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봄날 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새벽부터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수업시간이 아니면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며 소위‘개천에서 난 용’이 되려고 무진 애를 쓰던 날들이 한 달 쯤 지날 때였을까? 소위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운동권 선배들이 슬슬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책을 내밀며 일독을 권하기도 했고 호쾌하게 술을 사겠다며 꼬여서는 민중의 현실과 독재정권의 압제를 토로했다. 이미 누나의 책꽂이에서 수도 없이 보았을 뿐더러 누나에게 수배가 떨어질 때마다 그 책들을 치워야 했던 나로서는 선배들의 수작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더군다나 이미 독점 자본의 횡포로 아버지가 꾸려가던 개인사업체가 부도를 내고 아버지마저 수배된 상황이었던 나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민중의 삶이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코웃음이 쳐질 정도였다. 그렇게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맞이한 5월, 대학생 으로 처음 맞이하는 축제를 맡게 되었다. 설렘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미 시니컬한 현실주의자이자 조로(早老) 한 신입생이었던 내겐 모든 게 시들했고 진부해 보일 뿐 이었다. 하지만 내가 속한 학과의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하는 축제이니 1학년은 모두 전야제에 참석하자는 과대표의 당부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학내 동아리들의 공연이 이어지고, 어둠이 내린 학생회관 앞 광장의 가설 무대 앞에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사위가 고요해지면서 이제까지 레크레이션 강사처럼 재미있게 진행하던 사회자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시낭송 순서를 알렸다. 그리고... |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지금은 역사전문 출판사를 경영하는 한 선배가 절절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 불끈불끈 주먹을 쥐고 /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 까무라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라쳐서 /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 보았는가”
이 대목을 들을 때 건국대학교에서 줄줄이 묶여 끌려가던 누이를 TV를 통해 보고 까무라치던 어머니가 떠올라 목울대가 뻐근해졌기 때문이다.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 지금은 겨울인가 / 한밤중인가”
절절하게 울려퍼지는 소리에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서 나의 오만과 나의 위선에 가슴까지 뻐근해 지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가늘게 떨리는 낭송자의 목소리가 나의 침묵과 의도된 외면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날카롭게 느껴졌을 뿐 아니라 적어도 노예나 머슴, 허수아비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인간의 자존을 회복하려는 반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야 적어도“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 명해야 하는가”라는 시인의 날선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아니 훗날 태어날지도 모를 나의 아기에게, 그 세대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겨울공화국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우리들의논과밭이가라앉으며 누군가의이름을부르는것을들으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 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뻐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 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우리들은또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 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약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쓰러지며부르짖어야할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여보게 /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 한사코 온 몸을 바둥거려야 / 하지 않은가/ 여보게”로 끝나는 길고도 긴 이 시가 낭송이 되는 동안 수많은 자책과 다짐을 하면서, 마음 한 편으로는 철옹성처럼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던 나의 마음을 이렇게 단박에 허무는 시의 힘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소나기에 버틴 까치집이 가는 비에 젖는다고 했던가? 선배들의 온갖 회유와 강요에도 꿈쩍 않던 마음이 이 시 한 편으로 무너지는 것은 한 발 앞서 시대의 과제를 천명하고 시대의 양심을 노래한 문학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 후, 대자보 하나 없던 캠퍼스에는 아침이면 이곳저곳에 대자보가 붙기도 했고 그것을 떼는 학교 측 직원들 과 학생들의 시비가 붙는 모습이 자주 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던 학생들이 서서히 우리사회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 발언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우리가 되어갔다. 그렇게 5·18을 기념하는 첫 집회를 하기도 했고 이후 6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잠잠하던 춘천도 학교도 들불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유인물을 들고 거리에 나서면 저벅저벅 소리 맞춰 진군하는 전경들의 군홧발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것이 겨울 공화국에 울려 퍼지는 폭력의 교향곡이려니 하고 맞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 심장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에 놀라 달아난다면 평생을 부끄러워야 할 것이며, 노예며 머슴이며 허수아비로 살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든 아기의 베게맡에서 부끄러움으로 일관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가고 /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가고 /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순박하고 초라했던 춘천은 한 순 간 도청을 점거하기도 했고, 이후 6.29 선언이 있기까지 학내에서 농성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온전히 양성우 시인의 시 <겨울공화국> 덕이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겐, 아니 그 시절 나와 함께 어깨를 걸고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은 양성우 시인의 날카로운 시대인식에서 배운 바 크다고 하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간은 벌써 24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들은 군사정권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가게 했고, 민주주의의 폭을 많이 넓혀놓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사는 곳에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온 것인지, 한밤중의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절대군주처럼 군림하던 통치자의 권력을 제어하고 민의를 수렴하고 대변하도록 제도와 형식의 보완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지엽말단의 일일 터. 겨울공화국의 깊은 뿌리는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여명은 아직도 한참 뒤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양성우 시인의 <겨울공화국>은 한 시대의 벌거벗은 초상이자 그 시대를 살아야 할 사람들의 삶의 지침이었다. 그 시가 지어진 지 30년도 더 된 지금, 우리가 이 시에서 현실의 그림자를 만난다면 큰 불행이 아닐까. 다시금 <겨울공화국>의 마지막 구절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 고 /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 한사코 온몸을 바둥 거려야 / 하지 않은가 / 여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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