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고문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김근태 고문사건은 1985년 12월 19일 민청련사건 첫 재판에서 김근태가 모두진술을 통해 고문의 진상을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김근태의 모두진술은 충격적이었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매일)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5일, 9월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중략)........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와
(이 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면서 진술함)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진술은 당시 민주진영을 아연 긴장시켰고, 신민당을 포함한 광범위한 세력들이 연합하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고문공대위는 나중에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사망했을 때 광범위한 세력들이 힘을 합쳐 대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을 굴복시킨 국민운동본부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김근태 의장의 고문사실은 이 재판 때 처음 알려진 게 아니었다. 그보다 두달 가까이 전인 9월 26일에 이미 김근태 의장의 부인 인재근 씨에 의해 김근태 의장이 참혹하게 고문받은 사실이 폭로된 바 있었다. 이 과정은 참으로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김근태 의장은 6월 김병곤 상임위원장 구속을 시발로 민청련 탄압이 시작되면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결국 8월 24일 경찰에 연행되어 8월 26일부터 서부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았다. 그런데 구류를 살던 그가 9월 4일 갑자기 유치장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 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연행하여 고문을 시작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들은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김근태 의장 부인 인재근 씨도 불안한 마음을 안고 김 의장의 소재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어디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디선가 김의장 신변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직감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김 의장이 송치되어 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수사기관에서 연장할 수 있는 법정 최장 기일이 3주 21일이었기 때문에 법대로라면 9월 26일까지는 검찰에 송치되어야한다는 사실에 희망을 건 것이다.그래서 인재근은 시국사건 피의자들이 검찰로 송치될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통로인 공안검사실로 가는 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염없이 김의장을 기다렸다. 인재근의 예상은 적중했다. 기다리기 시작한지 4-5일쯤 지난 마지막 송치일인 9월 26일에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김근태 의장이 수사경찰의 삼엄한 호송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에서 담당검사실로 가는 1-2분의 짧은 시간에 김 의장은 자신이 받은 참혹한 고문 사실을 아내에게 전달한다. 김 의장도 이런 극적인 만남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이 짧은 시간에 고문사실의 개요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김 의장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없이 고문받은 날짜와 시간, 고문 받은 정황 등을 속으로 되뇌어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인재근 씨로부터 김 의장의 고문사실을 전해 받은 민청련은 바로 다음날 ‘치안본부의 살인적인 고문수사를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구속자 가족 및 회원 30여명이 사무실에서 항의농성에 돌입한다. 이렇듯 인재근 씨의 기지에 의한 고문사실의 폭로와 민청련의 발빠른 대응으로 민주화운동 탄압과 용공조작의 작전계획은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사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부터 1987년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장기집권의 걸림돌이 되는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삼민투로 대변되는 학생운동과 그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민청련이 1차 타겟이었다. 물론 그 뒤를 이어 민통련과 민추협,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김대중 씨까지도 잡아넣겠다는 것이 그들의 시나리오였다.(2011, 서중석 <6월항쟁>)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위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이었고,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내통하여 공산혁명을 기도하는 세력으로 용공 조작하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용공조작을 하기 위해서는 이근안 같은 고문기술자를 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그들의 작전에 1차 타깃으로 걸려든 것이 민청련이고, 김근태 의장이었다.
글_ 권형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