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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뒤 역사]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신동호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신동호


이맘때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시점, 월드컵을 치렀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있었으며 우리 곁에 파병문제며 송두율 교수 문제 등으로 들끓고 있는 이시점,

그러나 여전히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냉혹한 시점. 바로 이맘때쯤, 정신없이 시대의 벌판을 지내왔으므로 한번쯤 우리의내면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닐는지. 두 해전 나의 뒷덜미를 조르는 한 구절이 있었으니, 우리사회는 서구지식의 도매상이 아닌가? 나의 삶은 잘 포장된 서구의 지식으로 그 서구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왔던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에 휩싸여 있었을 그 즈음.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딘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황석영. [손님] 중에서)

장편소설 [손님]은 6.25전쟁 당시 벌어졌던 황해도 신천지방의 양민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북의 경우는 `신천박물관` 을 설치하여 미국의 양민학살로 이를 고발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미국의 학살이든, 좌우익의 대립이든 어쩄든 우리것이 아니었던 것들이 들어와 벌어진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황석영은 이들을 `손님`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손님` 들이 여전히 우리 땅에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황석영은 뒤이어 마치큰 걱정이나 되는 듯, "이 작품에 그려진 사실들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 이었으므로 북이나 남의 어떤 부류들이 매우 싫어할 내용일지도 모른다"고 능청을 떤다. 이윽고 그는 "서구에서 냉전이 사라진 지 십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변방의 얼음이 녹아내린다" 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양 한마디를 더 던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 보니 사실상 무서운 `손님 마마님`은 아직도 미국이 아닌가"(위의 글)라고.

화해와 상생

이제까지우리는 너무나 대립에 익숙해져 있었다.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을 들먹이지않더라도 우리는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학당`의중앙에 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을대변하는 둘의 대립은 분명 서구적 사유임에 틀립없다. 이로부터 자연과 인간, 아니 하늘과 땅도 대립의 구도로 흘러왔다. 나는 한 시절 이땅의 진보를 표방했던 그 모든 사상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긴다. 헤겔의 변증법, 혹은 맑스의 역사적 ㅇ물론 또한 대립물의 투쟁으로부터 사회가 발전한다고 설명했다. 노동자와 자본가, 진보와 보수, 통일과 반통일까지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립의 구도를 설정했고 투쟁을 기획했다.

물론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에 대항하던 시절 이러한 대립구도를 통해 이뤄진 민주화의과정을 폄하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시대가 달라진 지금까지 그러한 대립구도가 과연 올바른가 하는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방황하고 헷갈려한다. 파병은 과연 옳은가? 송두율 교수의 행동은 과연 옳은가? 핵폐기물시설 개발은 과연 옳은가? 나이스는?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 투쟁은? 하물며 삼보일배의 고행을 보고도 새만금에 대한 찬반이 오간다. 그렇다면 뭔가? 지금까지 우리의 생각을 지배했던 대립구도로부터 한번쯤 벗어나 볼 때가 되었다는 건 아닌가. 개발이 아니면 보존이고 파병이 아니면 꼭 파병반대 뿐이란 말인가.

황석영의 [손님]은 바로 이 지점에 다다른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세기를 지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하다.(위의 글)

황석영이 냉전의 유령들을 한판 굿으로 잠재우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마마` 즉 `손님`을 손흔들어 보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본시 마음이기도 했던 화해와 상생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해보자는 것이다.

지금도 경상남도 함양지방에 가면 신라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上林)이라는 숲이 있다. 함양은 예로부터 물난리가 심했던 곳이고 최치원은 이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하자마자 물난리를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숲을 조성하는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묻는다.
 

 "그러시다면 올해의 홍수는 어찌 하나요?" 최치원은 그해의 물난리는 잡기위해 둑을 쌓을 것을 권한다. 최치원은 둑을 쌓은 후에 숲이 우거진 둑을 다시 원상복귀 시켰다고 한다. 지금으로치면 개발과 보존이 잘 어우러진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손님`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고도 우리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색의 결과물들이 많다. 황석영이 이맘때쯤 [손님[을 우리들에게 던져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기, 통일을 이끄는 이데올로기는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될 수 없다는 걸 그는 체험을 통해 구성해낸 것이다.

광주의 아들

황석영은 1989년 남북작가회담의 성사와 문화예술의 남북교류를 위해 방북한다. 그는 스스로를 `분단시대의 작가`로 규정하고 분단 ㅂ순의 현실적인장치로 존재하는 이른바 `국가보안법`과 정면으로 맞서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채 활동하고 있다고 천명한다. 분단시대 작가로서의 황석영은 따라서 통일을 역사적 과업으로 여기며 방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의 세월동안 국외 방랑생활을 견딘 그는 1993년 귀국을 당행하여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1998년 석방될 때까지 5년 여의 세월을 영어의 몸으로 갇혀 있었다.

[객지]와[장길산]으로 이미 작가로서의 명예를 얻었고 민주화운동의 지난한 과정을 겪은 그가 방북을 결삼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70년대 기층의 삶과 더불어 뒹굴며 [객지[, [삼포가는 길] 등을 써냈던 황석영은 좌절과 절망의 우신시대에 접어들자 근대화 정책의 소외 지역이었던 호남을 삶을 변화시키는 현장이었고 그곳에서 만난 농민, 노동자, 뜻있는 청년들은 소설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석영은 스스호 `오월 광주의 아들`이라 표현하며 그의 소설[장길산] 또한 전라도와 광주의 피를 통해 민중의 의미를 재발견 시켜준 작품이라 말하고 있다.

  하루는 선생이 나를 만나자마자 대뜸 마흔다섯에 기술 없이 취직할 수 있는 공장이 있으면 꼭 알아봐달라면서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유를 묻는 내게 선생은 "공장 얘기를 꼭 좀 써보고 싶다"시며 여간 기대에 찬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말리고 싶었다. 나이 든 이가 기술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직업이라는 것이열이면 열 지저분하고 위험하고 힘 꽤나 쓰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곳은 제 딴에는 힘좀 쓴다는 장정들도 일주일도 못버텼다. 그러나 선생은 자세한 설명에도 바로 그런 곳을 원했다며 되려 반색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 선생의 모습에서 나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선생의 주옥같은 소설들이 어떻게해서 쓰여진 것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김한수, <석방이유서>중에서)

소외된 자들의 현장, 팽팽한 긴장의 현장을 향해 앞서간 황석영, 두려움이라든지 망설임 같은 것들은 작가로서 그가 짊어진 사명 앞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되지 못했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이들이 황석영을 `싸나이` 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의 방북 또한 오월 광주에서 시작되어 6월항쟁을 거치며 시대와 맞서는 한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방북 동기에서 첫째로는 순순한 작가적 열정으로 시대 상황에 한 몸을 팔아보겠다는 생각이었으며, 40여 년 동안 서로 적대적으로 얼어붙어 한치의 양보도 없는 남북관계를 한 번 휘저어 보자는, 그래서 정치인이나 조직적 활동가가 아닌 대중이 잘 아는 `작가` 로서 이 냉전상황을 얼음에 금이 가도록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황석영, 1993년 서울형사지법311호 법정 <모두진술> 중에서)

작가로서의 순순한 동기,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로서 황석영은 정치인이나 조직적 활동가이기 이전에 작가였기에 열정 하나로 시대를 앞서갈 수 있었다. 그 시대 앞에서 그는 때떄로 ` 싸나이`의 눈물을 보인다. 그 길은 결단을 필요로 하며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우정어린 욕 한마디

2001년 여름 나는 황석영의 [손님]을 읽었고 운 좋게 그와 함께 평양에갈기회를 얻었다. 북의 쟁쟁한 소설가들인 홍명희 선생의 손자인 홍석중, [청춘송가]의 작가 남대현 등이 그를 만나러 고려호텔에 와 주었다.

덕분에 그들이 맺은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작가들 사이에 오가는 남북의 이야기를 쉽게 경청할 수 있었다. 사실 거기에는 우리들의 우려스러운 마음처럼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대립도 없었으며 더 큰, 아니 더 앞서가는 작가의식들이 스며 있었다. 동석한 북의 시인 리호근이 다음가 같은 시를 낭송하며 이를 확인해 주었다.

(..)60년대 초반 임지가 [객지]를 안고/거기 서울대학로가로 달려나왔을 때,/[장길산]의 손으로 박정희멱살 움켜잡던 때/저 [시대의 어움을 넘어...]로/전두환의 대머리를 우려주던 때/그때 이미 당신의 촤우익측에는 /[껍데기는 가라]와[함평고구마]를/수류탄처럼 추켜든 신동엽이며 문병란이 있었고/지금 저 원주골안에서 못난이구실을 하는 지하가/날창처럼 [오적]을 빼여들고 서있었소/그러나 우리는 그때 이미 좌우익측이 아니라/한몸과 두손과 발이 되여/릉욕당하고 있는 이 땅의 통분을 안고/함께 몸부림도 쳤고/함께 주먹도 내흔들었던거요(...)


(리호근, <오늘 밤 잔치> 중에서)

그들은 `그때 이미 좌우익측이 아니라` 는 걸 확인했던 것일까. 그리하여 기독교도 맑스주의도 모두 `손님` 임을 알아차리고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누었던 것일까. 다음날 밤 8.15행사의 만찬이 이워지던 양가도 호텔 복도에서 황석영은 북을 향해 한 마디 욕을 내뱉었다. 단체들 간에 있었던 잘못된 계약 건 때문이었다. "야 조선노동당 xx들아!" 순간 주변이 적막감에 쌓였다. 여기가 어디인가, 적성국가 북의 심장부 평양이 아니던다, 아니 여기에서 저런 욕을 내뱉어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이내 북의 안내원들과 남쪽 몇 사람의 만류로 그는 화를 접었지만 그 사건을 통해 그가 또 어디로 앞서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수십년의 세월을 작가로 운동가로서의 삶을 통해 남쪽의 부조리와 싸워온 그이기에 이제 신뢰를 바탕으로 북쪽을 향해 한마디의 욕을 던진 것이다. 어쩌면 통일이라는 명체 앞에서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걸 일갈했던 것이 아닐까.

자, 이제 오늘 `싸나이` 황석영은 또 다시 새 길을 간다. 우리 모두 `손님`들을 무르고 집안정리에 힘을 모아야할 때가 아닐까. 새로운 `손님`들을 맞을 땐 집안 싸움이 없도록 서로 마음을 모어야하지 않을까. 그와 한 시대를 산다는 것이늘 든든하고 흥미진진하다.

<사진 자료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글_ 신동호
강원도 화천 출생. 시인. 1984년 강원고 재학시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오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창장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시집 <겨울 경춘선>과 <저물 무렵>, 문화평론 <전유성論-디오게네스와의 희극적 만남> 등을 출간. 한양대 국문과에서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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