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 인간 김남주 1
"이것이 시키지도 않았는대 거기 피어 있습니다"
작달만한 키에 굽 닳은 구두, 낡은 `우와기` 에 부스스한 머리. 옷을 벗을 때마다 희고 굵은 이빨이 드러나 더욱 새까매 보이는 얼굴... 검은 뿔테 안경이라도 걸치지 않았더라면 영축 없이 시골 농사꾼으로 보였을이 구닥다리 청년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피어난 것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흔하디흔한 것들에 대한 무한정한 사랑과 혁명에 대한 뜨뜨거운 열절을 가슴에 품은 열혈 청년 김남주였다.
당시 `창비에 실린 시를 보고 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이 따위 시는 나도 쓰겠다)`며 겁 없이 등단한 무서운 신예 시인이기도 했다.
1974년 여름, 이 신출내기 시인이 <창작과 비평>에 실은 여덟 편의 시는 유신 치하 칠흑 같이 캄캄한 잠에 빠져 있던 문단에 파문을 일으겼다. 어떤 위선도 기만도 꾸밈도 용서하지 안고 단숨에 진실로 육박해 가는 그의 시는 고급한 은유나 화려한 시적 의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는 듯한 섬짓한 충격 으로 다가왔다. 펄펄 뛰는 심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이 날것그대로의 시는 펜대를 굴리는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혁명적 리얼리티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유신 선포 직후,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우신투쟁 지하신문 <항성>을 제작. 배포했던 김남주는 그 일로 인해 전남 도 경찰국 대공분실로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 이하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그의 양심은 적들의 `똥구멍이 라도 싹싹 핥아 주` 고픈 `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허위의식과 관념성을 아프게깨달아야 했다.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공고한 신념도 죽음과 폭력의 공포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굴욕적인 자기 확인이었다.
깨달음의 고통 속에서 머슴 출신의 아버지와 애꾸눈 어머니의 둘째로 태어난 군 단위 중학교에서 일년에 한 명 들어갈까 말까 한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입학하기까지의 모범적인 성장 과정, 1964년 모교인 광주일고가 굴육적인 한일회담 반대시위에동참하지 않자 고민끝에 자퇴해 버린결기, 말단 면서기라도 해서 집안의 울타리가 돼 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애원으로 대입 검정고시를 치고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한뒤에도 3선 개헌 반대운동, 교련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대학 4년을 보낸 자부심이 일거에 녹아버렸다.
죽음과 폭력의 공포 앞에서 굴욕적인 자기 확인
1974년 봄, 출소 후 고향 해남에 내려가 있던 김남주는 다시 `민청학련` 사건 소식을 접했다. 1000여명이 검거된 그 사건에서 김남주는 요행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모두가 그를 성명 미상자로 보호해 주었던 덕분이었다. 절친했던 이강을 비롯하여 친구, 동료들이 줄줄이사형, 무기 등의 중형을 선고받는 암울한 상황에서 혼자 남은 그가 감당해야 했을 정신적 상실감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 했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자기 치유와 회복의 치열한 과정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지만, 자신이 몸담은 현실을 굳게 밟고서 혁명전사로 거듭나기까지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필요햣다. 광주로 올라간 김남주는 광주경찰서 뒷골목에 `카프카`라는 헌책방을 열었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변혁운동의 무기가 될 새로운 사상을 널리 보급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카프카는 곧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사람들과 광주지역 청년학생 활동가들, 열혈 문학청년들의 문화공간이자 사랑방이 되었다. 김남주는 그들과 함께 레닌과 모택동, 체 게레바의 사상과 생애를 이야기했고, 네루다와 고리키의 문학을 논했다. 한때는 아나키즘에 매료되기도 했으나, 실제로 김남주의 문학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민족해방을 주요 과제로 삼았던 남미의 문학이었다. 이후 해남에서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김남주를 가까이서 지켜본 동화 작가 윤기현은 이렇게 말했다.
"남주 형은 또, 문학예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혁명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러시아로부터 시작해서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3세계 혁명시인들에 굉장히 심취돼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혁명시를 줄줄 외워. 내가 알기로 몇 백 편 외우고 있었어요. 이후 시와 혁명, 시인과 전사를 같이 보게 된 것도 바로 그런 과정 속에서 시를 쓰면서 계속 강해진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3세계 혁명시인들에 심취
그런데 국내에서 출간된 번역본의 거의 없던 시절, 김남주는 어떻게 이국의 혁명 시들을 접할 수 있었을까. 아내이자 동지인 박광숙은 그 의문의 열쇠가 중학됴 때부터 다진 영어, 일어 등 빼어난 외국어 실력에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중헉교 때 벌써 단편소설을 줄줄 읽었대요. 영어를 그렇게 좋아했나 봐요. 고등학교 졸업한 뒤에는 <함성>을 같이 제작했던 이강 씨가 카츄사로 들어갔는데. 미군 부대에 있는 원서들을 빼돌려가지고 친구를 줬나 봐요. 그래서 당시에 읽을 수 없는 자료를 많이 본 거죠. 영어, 일본어, 원서를 다 구해 읽었대요. 사람들이 희한하대. 반미를 외치면서 어떻게 그리 영어를 잘 하냐고."
얼른 봐서는 이렇다 할 게없는 허술한 행색에 흐물흐물 입가에 매달고 다니는 사람 좋은 웃음, 그리고 괴짜다운 행동으로 이시절 김남주는 `물봉선생`이란 별칭으로 통했다. 이 `물봉`이란 별명과 뒷날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후에 널리 알려진 `전사`라는 칭호는 쉬이어울릴 수 없는 짝이었지만, 기이하게도 그것들은 김남주에이르러 교묘하게 뒤섞이고 비벼지고 변형되면서 김남주 만이 자아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물론 김남주가 실천 속에서 끝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반성적 인간` 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봉` 이란 별명과 `전사` 칭호 |
이에 대해 그의 오랜 친구이지 동지인 이강은 이렇게 말했다. |
"그 즘음 그는 사생활과 공생활이 모두 애매하고 불확실했기 때문에 시인으로 대접받는 동안 물봉이나 기인으로 인식되어지고 본인도 그런 특수한 사람의 행세에 맛을 들이지 않았나싶다. 그러나 내가 아는 본래의 남주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고 철저하게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이었다."
오래지않아 카프카는 문을 닫게되었다. 주변에서는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애당초 이재에 밝지 못한데다가 책 파는 데는 도통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가 서점 운영에 실팬한 곳은 지극히당연한 일이었다. 걱정스러웠던 것은 김남주가 `함성`지 사건으로 입은 내상이 치유되기는커녕 동가식서가숙하는 도시에서의 무질서한 생활로 오히려 덧나 버렸다는 점이었다. 무력하기 짝이 없는 `준 룸팬적` 생활은 김만주에게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회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농민들과 강고히 결합하여 변혁을 희구하겠다.` 는 결심이었다. 해남으로 내려간 그는 황석영, 최권행을 만나 사랑방농민학교 운동, 해남농민회 발족, 전남지역 현장문화운동에 주력했다. 윤기현은 당시 김만주의 활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남주형은 주로 전대, 조대에 있는 후배들을 농민운동 쪽애 연결하는 역할을 했지요. 당시 농민운동이 상당히 활발했으니까요. 튿히 함평고구마 사건 때는 노동운동, 문화운동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서 중요한 사람들을 추려내고, 과학적인 사회 인식을 심어주고, 농민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아주 탁월하게 조직하더라구요. 지식인들을 대하는 것하고 농민과 노동자들 대하는 것이매우 달라요. 우리같은 민중 출신을 대할 때는 굉장히 유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바보스러울 정도로 말도 어눌하고 행동도 굉장히느리고, 자기혼자 떠든다거나 아는 체하고 설교하려 한다거나 이런 거 전혀 없어요. 장기 두고 바둑 두면서 일상적인 이야기
를 하거나 농담하는 정도지요. 그런데 지식인들하고 대화하는 거보면 전혀 딴사람이에요. 굉장히 엄해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지도 하고, 완전히 이중적이죠. 목사들한테도 `실천하지 않으려거든 말하지 말라. 너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뭐 그런 소리를 하냐.` 그렇게이야기해요."
이 과정에서 김남주는 현장운동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1978년경 김남주가 다시 광주로 올라온 것은 활동의 수위를 높이기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문화운동을 위해 황석영, 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한편으로 정식으로 팀을 짜서 후배를지도 . 양성하기 시작했다. 교재는 일어판 [파리코뮌]이었다. 그런데 그만 사단이 일어났다 후배들과 학습하던 [파리코뮌]에 대한 밀고가 들어간 것이다. 긴만주가 집을 비운 사이 그의 거처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치고, 사과 궤짝으로 한 상자 분량의 귀중한 번역 원고와 습작 원고를 강탈해 갔다. 김남주는 다시 수배의 몸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그의 삷을 일시에 규정해 버린 `남민전` 가입은 바로 이 도피 생활 중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남민전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맞춰 예속적 독재권력의 타도와 외세의 축출, 그리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목료포 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 `인혁당`과 같은 자생적 사회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었다. 민주화복구솟자협의회에서 알게 된 박석률이남민전 가입을 권유하자 김남주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에게있어 비밀 지하 조직 활동의 필요성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었다.
반유신에 머물면서 성명서나 내는 운동에 불만
대법원이 인혇당 관계자들에대한 사형을 확정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 윤보선과 같은 대중적 인사들마저도 명동성당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구속 수감되는 이 나라에서 비밀 지하 조직 없는 변혁운동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바늘 구멍만한 자우조차 용인되지 않는 유신 말기의 숨 막히는 상황에서, 종교단체의품에 안겨 소극적이고 제한된 활동에 자족하지 않느 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는 것이 김남주의 판단이었다. 당시 남민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학영은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물줄기를 따라 흐르며 ([내가 만난 김남주], 이룸)` 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왜 우리나라 운동은 맨날 요 모양이다냐"
남미나 베트남 등의 민족 해방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늘 단순히 반ㅇ신에머물면서 성명서나 내는 당시의 운동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토로하곤 하였다. 그때 그는 이미 민족 혁명 운동가로서 자신의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던 것 같다.
글_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 『김진수』 『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