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항쟁,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 점거 농성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구로구에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65년이다. 지금도 많은 공장이 공업단지 지역 외곽의 구로동, 고척동, 신도림동, 오류동, 개봉동에 널려있으며, 서울의 금속기계 공장의 4분의 1 이상이 구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구로구에는 대규모 공구상가도 자리 잡고 있어 가히 공업도시라 일컬을 만하다. 그래서 7,80년대 구로지역은 잿빛이었다. 단순히 이미지로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구로는 변했다. 이제는 잿빛의 이미지보다 서울의 여타 지역과 비교해도 뚜렷이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인 이미지를 지닌 곳으로 바뀌었다. 잘 정비된 가로와 길을 걷는 사람들의 화사한 옷차림, 세련된 마감재로 우뚝 선 고층 건물들은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하지만 누군가는 잊지 않고 있다. 생업에 종사하던 구두닦이, 미용사, 상인, 버스 기사, 공장 노동자,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했던 2박 3일을 잊지 않고 있는 이들이 있다.
서울청년단체협의회 대표로 시위에 참석했던 유선희씨
평범한 시민들이 참여한 항쟁
구로구청 광장은 주차된 차들로 빈틈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바람은 날카로웠으나 하얀 햇살이 광장 가득 부려지고 있었다. 그 한 귀퉁이에 공연을 할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 있고 그 주위에는 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서울청년단체협의회 대표인 유선희(39)씨를 거기에서 만났다.
“항쟁의 지도부도 아니었고, 항쟁의 첫날부터 참여했던 게 아니어서 성실한 취재원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유씨는 이렇게 운을 떼며 당시 구로구청 점거 농성에 참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유씨는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복역하고 막 출소했다. 구로구청 농성 이틀째인 1987년 12월 17일, 집에 있던 유씨는 구로구청에서 부정선거 투표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들었다. 사당동, 자신의 집에서 곧장 달려 나온 유씨는 구로구청으로 달려갔다. 도착한 시각은 오후 세 시. 구로구청 앞 광장은 해방구였다. 구청 건물 왼쪽 앞에는 부정투표함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구청 현관 앞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집회를 열고 있었다. 광장 이곳저곳에서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피워둔 화톳불이 타올랐고, 유인물과 재와 연기가 어수선하게 날아다녔다.
“집회의 연속이었어요.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연이어 앞에 나와 연설을 했고, 너도나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발언을 했지요.”
물론 당시 농성의 지도부가 있기는 했다. 공정선거 감시단 서울시본부 대표였던 김희선 씨를 비롯해 윤두병 씨 등이 지도부였다. 하지만 유씨의 설명에 따르면 구로구청 점거 농성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지도부 몇 명에 의해 움직인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농성이 끝나고 후일 결성된 구로동지회의 인적구성을 살펴보아도 확연히 드러난다. 구로동지회의 회원 가운데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유씨가 구로구청에 도착한 뒤에도 집회 참가자는 속속들이 불었다. 전날 참여했다가 귀가했던 시민들이 다시 모여들기도 했으며 유씨처럼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점점 그 수는 늘어났다. 첫째 날보다 둘째 날 그 수가 더 많았다. 이대로 간다면 사흘째에는 그보다 더 많은 나흘째 역시 그보다 많은 수가 될 터였다. 제 2의 유월항쟁이 될 것만 같았다.
구로구청에서 투표함을 끼고 농성을 하는 바람에, 대통령 선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선공고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구로구청을 점거한 시민들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17년 만에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는 감격도 잠시, 야당의 후보단일화가 무산되면서 국민들은 군부독재가 뿌리 뽑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이런 와중에 군부독재의 집권연장 야욕이 드러난 부정투표함이 발견되었으니 농성 시민들의 분노가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매시간 집회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로구청 점거 농성에 참여했던 양원태씨가 옥상에서 추락한 자리
당시 현장 상황실장을 맡았던 김병곤(오른쪽)씨가 휠체어를 탄 채 병실에 들른 양원태(왼쪽)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정선거 규탄에서 대통령 선거 무효화로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어떤 선거보다도 뜨거운 열기 속에서 치러졌다. 유월항쟁이 만들어 낸 대통령 직선제이니 만큼 국민들의 참여도 역시 높았던 것이다. 이제 막 선거권을 얻은 젊은이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인까지 국민 스스로 대통령을 뽑는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전국 각 투표장에는 투표를 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또한 선거부정을 방지하고 공정한 선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1월 말부터 학생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공정선거 감시단이 꾸려져 활동 중이었다.
구로구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투표를 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과 각 정당의 참관인, 공정선거 감시단 소속 시민, 학생들로 그 열기가 자못 뜨거웠다. 그런데 투표가 진행 중인 오전 11시 경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투표가 끝나고 나서야 이동이 가능한 투표함이 구로구청에서 밖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한 시민이 발견한 것이다.
그 시민은 주위 사람들에게 부정투표함이라고 소리쳤고 그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표함이 실려 있던 봉고차는 과자상자와 빵상자로 위장되어 있었고, 그 상자들을 헤집어보니 문제의 투표함이 나왔다. 호송 경찰도 없는 선거투표함 이송차였던 것이다. 흥분한 시민들은 오후 1시 30분 경 투표위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구청 3층에 마련된 선관위 사무실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투표함 1개, 붓 뚜껑 60개, 인주 70개, 정당 대리인 도장, 인주가 묻어있는 장갑 6켤레, 백지투표용지 1천 5백여 매가 발견되었다. 당시 시민들이 이러한 선거물품이 투표조작에 사용되었다고 믿은 이유는 붓 뚜껑을 비롯해 장갑에 묻어있는 인주가 방금 사용한 듯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4시부터 약 5천여 명의 시민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당시 개표가 진행되던 구로구청 5층 강당
농성을 시작한 시민들에는 아직 어린 중학생부터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아주머니, 연세 지긋한 노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구로항쟁은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제 2의 광주항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씨는 구로구청 점거농성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지었다. 이른바 운동권이 아닌 평범한 광주시민들이 광주민중항쟁을 만들어냈듯이, 구로구청 점거농성 역시 평범한 시민들의 항쟁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밤이 되자 농성자 수는 줄어들었다. 그들은 가정이 있고, 생업이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2월 17일 낮, 농성자 수는 전날보다 늘었다. 지난 밤 돌아갔던 시민들이 합세했을 뿐만 아니라,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정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12월 17일 밤, 밤샘 농성을 하는 사람은 2천여 명이었다. 16일 밤보다 늘어난 숫자였다. 이렇게 점점 구로구청 점거농성은 외부에 미치는 영향력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농성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구청 건물이 아닌 광장에 있었다. 그들은 밤새 화톳불에 의지해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했다. 한겨울의 추위도 그들에겐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17일 밤, 농성 지도부는 경찰의 진입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7시, 공정선거 감시단은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로 전환할 것을 선언하고, 9시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8일 오전에 시청 앞 광장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그곳에서 구로구청까지 행진할 것을 계획했다. 만약 구로구청에 농성중인 사람들이 다음날인 18일 국민대회를 시청 앞 광장에서 열게 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특히 노태우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할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바야흐로 부정선거 규탄의 움직임은 대통령 선거를 원천적으로 무효화하는 좀 더 강도 높은 투쟁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중이었다.
옥상에서 바라 본 옆 건물 구로경찰서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
유씨와 함께 구로구청 건물로 다가갔다. 유씨에 따르면 건물은 예전과 똑같다고 한다. 황토 빛 벽의 단단하게 생긴 5층 건물이었다. 현관 이마에는 ‘변화와 희망을 열어가는 활기찬 구로’라는 표어가 걸려 있었고 5층부터 1층까지 각종 현수막이 길게 걸뜨려져 있었다. 내부구조도 바뀐 건 없었다. 유씨는 현관에서 바라보이는 계단을 가리키며 그곳을 통해 농성 중이던 시민들이 경찰을 피해 도망갔다고 설명했다.
12월 18일 오전. 밤샘 농성으로 시민들은 지쳐 있었고 일부 시민들은 구청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여전히 구청 앞 광장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어둑새벽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즈음 이미 농성 지도부는 경찰 진입을 눈치 채고 최후의 저항 장소를 물색 중이었다. 건물 내부는 최루탄이 들어차면 저항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그들은 옥상을 최후의 장소로 선택했다. 아직 어둑신한 새벽 6시. 4천여 명의 무장경찰이 구로구청에 투입되었다. 시민들은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구청 건물로 쫓겨 들어갔다.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각 층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며 올라갔지만 경찰은 순식간에 그것을 뚫고 들어왔다.
“건물 내부는 온통 최루연기로 휩싸였고 정말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어요. 5층까지 쫓겨 올라갔는데, 그곳까지 경찰이 올라오는데 불과 3,40분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대부분 사무실 내부에 있었는데, 유리창이 깨져서 추락의 위험도 높았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어요. 그냥 밀고 들어와서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곤봉과 군홧발로 때리고 짓밟았어요.”
경찰의 진압 작전이 상식 이하였다는 건 양원태(39)씨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서울대 경영학과 84학번으로 구로구청 점거 농성에 참여했던 양씨는 5층 강당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라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분명 추락의 위험이 존재했음에도 경찰은 매트리스를 깔아놓지도 않았던 것이다. 5층까지 점령하고 나서야, 경찰은 황급히 구청 앞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옥상에서 저항하는 200여명의 농성자들 때문이었지만 요식 행위였다는 게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공론이다.
또한 옥상이 아닌 지하로 내려 간 사람들 가운데는 여전히 행방이 불명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다수의 사망자가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사망자가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만큼 살인적이고 폭력적인 진압이었다는 반증은 될 수 있겠지요. 어쩌면 구로구청 최대의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양원태 씨일 거예요.”
옥상에서 저항하던 사람들도 결국 오전 8시 경 모두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모두 천여 명이 연행되었고 그 가운데 2백여 명이 구속되었다. 유씨와 함께 올라가 본 옥상에는 초겨울의 찬바람 속에 모처럼 내리쬐는 햇살을 받기 위해 나온 미화원 몇 명이 있을 뿐이었다. 옥상은 좁다랗고 위태로워 보였다. 또한 그곳에서는 바로 구청 옆에 자리 잡은 구로경찰서의 옥상이 건너다 보였다.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시민들은 구로경찰서 옥상에서 쏘아대는 최루탄 때문에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사의 한 장을 장식한 여타의 역사적 사건의 현장들이 그렇듯 그곳에도 역시 그날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옥상에서 내려다 본 구청 앞 광장은 아득했다. 양원태 씨가 추락한 현관 옆 화단을 내려다볼 때는 어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유씨에 의해 구로구청 점거 농성 최대의 피해자로 일컬어진 양씨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여태 독신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지금은 「올벼」라는 어린이 책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양씨는 경찰에 쫓겨 구청 건물 5층의 소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바리케이드를 넘어 들어 온 경찰과 옥신각신 하던 중 깨진 창으로 추락했다. 그 사고로 척추와 갈비뼈가 손상되고 하반신 마비라는 충격적인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지난 10월 양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정작 양씨 본인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농성을 통해 깨달은 것이라면, 결국 민주란 민중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어요. 선거라는 제도 또는 보수적인 야당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허약한 것인가 라는 점을 말이죠. 본질적으로 아직도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항쟁이 있었기에 희망은 있는 거지요. 저는 여전히 사람들 가슴속에서 구로항쟁이 살아남아 있으며, 또한 지금도 사람들을 통해 그 정신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어요.”
양씨는 미처 다 말하지 못했지만 유씨의 말을 통해 그가 못 다한 말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민주화운동이요? 그거 좋지요. 보상이요?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구로항쟁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선후가 잘못 되었다고나 할까.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는 것도 좋고 공로자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대체 구로항쟁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과정은 어떠하며 감춰진 진실은 무엇인가를 먼저 밝히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유씨와 함께 구청 건물을 나와 양씨가 추락했다는 화단 근처를 서성거렸다. 거기에는 아무 흔적도 없다. 물론 핏자국도 없다. 하지만 거기 어딘가에 진실이 떨어져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흘려버린 진실이 금방이라도 사금파리처럼 반짝, 눈에 비칠 것만 같아 쉽사리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손홍규)
글_ 손홍규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ㅗ설 수상
<작가세계>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바람 속에 눕다` 를 비롯하여 `사람의 신화`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