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2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2
한 농민의 초상
권종대에 관한 두 번째 글을 쓰기도 전에 그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쩌면 예견된 죽음이기도 하련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장이라도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쟁쟁하게 울려 퍼질 저 살아 펄펄 뛰는 목소리는 그럼 이제 과거에 속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생명이 오직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너희들 고생이 많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여한도 없고 마음도 편하다. 남은 일은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그만 끝내자.”
권종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산소 호흡기를 떼어 냈다.
“아버지!”
깜짝 놀란 자식들이 침상으로 달려들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울부짖는 가족들에게 냅다 호통을 쳤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어!”
자식들의 입에서 ‘아버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란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의 호통은 계속됐다. 그는 사위어 가는 생명을 붙잡고 싶어 하는 가족들의 바람을 냉정히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그의 마지막 말은 두 달 전 그가 머물던 영해에 찾아갔을 때도 반복해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는 지도자라는 말을 극히 싫어해서, 내가 그 말을 입 밖에 낼 때마다 곧바로 ‘일꾼’이란 말로 교정해 주곤 했다. 만일 그가 살아서 이 글을 봤다면, 아마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일꾼이면 일꾼이지 큰 일꾼은 또 뭐야.”
기술만이 살 길이다
보릿고개 넘기가 그리도 힘들던 60년대 초반, 어둡고 침울한 농촌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권종대는 단지 한 사람의 농민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시절 농촌이 요구하는 가장 완벽한 일꾼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변모시켰다. 그리고 흡사 『상록수』의 주인공들과도 같은 열정으로 야학과 농촌부흥운동에 매진했다. 할아버지에게 ‘집안일을 하지 않고 동네일만 하고 다니냐.’는 뼈아픈 핀잔을 들어가면서, 일에 미쳐 돌아다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누구의 도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한국농민회나 농민자주총연맹 같은 단체가 있기는 하였으나, 농민의 권익 향상을 위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라에는 농민 문제를 농민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의식과 역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권종대의 열정을 부분적이나마 흡수할 수 있었던 단체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면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 정도가 고작이었다.
6, 70년대의 권종대가 자연스럽게 관(官)변의 색채가 짙은 재건국민운동이나, 자원지도자연합회에서 주관하는 4H 운동 등에 참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행보였다. 농촌 관변 운동의 지향은 뻔한 것이었다. 기술과 근면. 관과는 무관한 순수 민간단체인 전국농업기술자협회와도 오랜 관계가 있었으나 이 역시 ‘기술만이 살 길’이라는 지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대구, 서울, 온데 다 댕기면서 농사 기술 교육을 받았어요. 기술 교육을 받아 와서 이웃에 전달하고 했는데, 이야기는 잘해도 실천은 잘 못 했어. 임업 시험장에 가서 교육을 보름씩 받고 왔지만 여기서 당장 임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돼지 농사 교육을 받고 왔지만 당시 몇 마리 먹이는 게 고작인 수준에서 금방 돼지를 몇 십 마리 기를 수도 없는 거고……. 그러면서 기술 가지고는 안 되겠다, 기술 배우고 농업 개량 해 봐야 가격 폭락돼 버리면 그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독점재벌과 도시 위주의 공업화 과정 속에서 농촌은 방치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 고향을 떠나가고, 권종대의 번뇌는 깊어졌다. 지금껏 자신이 해 온 일이 산꼭대기로 하염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노역처럼 생각됐다. 이립(而立)의 나이라는 서른, 그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무렵, 한 선배가 영해에 새로 생긴 고등공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 왔다. 그의 말처럼 ‘무자격 교사’였지만, 배우면서 가르치는 것은 그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3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농촌운동의 출구를 찾고자 하는 잠복된 의지는 그를 여전히 목마르게 했다.
1970년, 그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농업기술자협회의 4차 연수생으로 일본에 갔다. 일본 농촌으로 1년 동안 양계 연수를 다녀온 것은 그의 마지막 실험이었다. 판로도 마땅찮고 자본도 없는 그에게 양계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닭똥 치우며’ 헛고생만 하다 온 것이었다. 그러나 헛고생만은 아니었다.
“이게 아니다. 농민이 못사는 건 농사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회 정치적인 관계에서 농민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걸 깨달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 농민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른 사람에 비하면 퍽 늦은 나이에 운동에 관여했지만, 그런 생각이 이미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운동을 접했을 때 바로 뛰어들 수 있었지요.”
1977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가 매년 주최하는 전국대회가 끝날 즈음, 권종대는 다소 조바심을 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연단에 오른 여러 연사 중에서도 한 가톨릭농민회 회원의 발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직접 쌀 생산비를 조사한 결과를 제시하면서, 정부가 그런 객관적인 근거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수매가를 책정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쌀 생산비 이상으로 수매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기술 교육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던 권종대에게 정부 정책의 모순과 폐단을 지적하고 농민의 정당한 요구를 밝히는 가톨릭농민회 회원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농촌의 현실을 두고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삶의 태도가 확연히 갈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권종대에게 적지 않은 흥분을 안겨 주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과학에의 눈뜸’이었다. 농촌 현실을 둘러싼 구조를 과학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진실로 농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각이었다. 십여 년간 농촌자원지도자로서 활동했던 모든 일이 마치 그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윽고 정연석 가톨릭농민회 교육부장이 대회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권종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퍼부었다.
“오늘 발표하신 내용 참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 가톨릭농민회라는 게 대체 어떤 단쳅니까? 나 같은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정연석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해 대는 이 삼십대 후반의 남자에게 말했다.
“가톨릭농민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제게 연락처를 주십시오. 조만간 연락을 드리지요.”
가톨릭농민회 경북연합 창립총회 참가와 함께 권종대의 농민운동 제2기, 즉 정치적 농민운동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줄탁()의 과정이자, 십여 년에 걸친 현장 경험과 시행착오가 예비해 놓은 일이었다.
1970년대는 분단 이후 우리의 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때였다. 1972년에는 가톨릭농촌청년회가 가톨릭농민회로 간판을 바꿔달면서 농민운동체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1974년부터는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농민지도자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면서, 농민운동 진영은 오랜 준비기를 끝내고 투쟁의 대오를 갖춰 갔다.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권종대의 활동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만 했다. 그는 77년 지역의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가톨릭농민회 영덕분회를 결성하고, 1년 만에 주위의 추천으로 안동교구 연합회장이 되었다. 이 무렵, 3차에 걸친 크리스찬 아카데미 지도자과정을 수료하였는데, 그의 열성이 어찌나 대단하였는지 그가 과정을 수료한 직후 아카데미 측에서는 경북 영덕군을 운동의 성과를 기대할 만한 ‘집중효과지역’으로 꼽을 정도였다.(농촌사회 발전을 위한 아카데미 농민운동, 역사비평)
몸으로 쓴 농민운동사
권종대는 안동교구 연합회장 시절을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떠올렸다. 3박4일 교육을 할 때면 농민들과 사전을 뒤져 가며 함께 공부하고, 일상에서 부대끼며 뜨거운 동료애를 키워나갔다. 그는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혼자 앞서 나가는 것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열 사람이 같이 내딛는 한 걸음을 더 중하게 여겼다.
“어느 대학도 그렇게 교육을 하는 데가 없어. 우린 ‘체온의 전당’이라고 그랬어.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끼리 체온을 서로 맞대고 육화되고 같이 느끼면서 서로 강사가 되고 학생이 되어 아, 역사라는 게 이렇게 돌아가는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때, 그 경험은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그 농민들의 기대를 절대로 저버릴 수가 없어.”
마지막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엔 울컥 물기가 배어 나왔다. 갑자기 나는 농사와 교육과 운동을 하나로 보는 그의 시각이 이 ‘체온의 전당’ 시절에 얻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1980년대의 정세는 권종대가 그러한 체온의 감동을 느낄 여유를 주지 않았다. 한국의 농민운동은 1982년 부당농지세 거부투쟁, 1983년 농협조합장 직선제 실시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추곡수매량 확대요구투쟁, 농가부채 탕감운동, 1985년 ‘농축산물 수입반대 및 소 값 피해보상투쟁, 1987·1988년의 수세·고추 투쟁 등 무수한 싸움을 거치며 나날이 성장하였고 있었다. 시대는 1970년대 종교 단체의 외피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자주적이고 전국적인 조직 건설을 향한 길을 열어 나갈 새로운 지도력, 농민 대중의 드높은 투쟁 열기를 차가운 이성으로 받아 안을 합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지도력을 원하고 있었다.
1986년부터 가톨릭농민회 부회장으로서 각종 농민 투쟁의 선두에서 전국적인 지도력을 키워 나갔던 권종대는 마침내 1990년,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 창립대의원대회에서 경북도연맹 소속 윤정석 후보와의 팽팽한 접전 끝에 전농 초대 의장에 당선되었다. 전농은 농민들 스스로 자신의 정당한 이익을 지키고 사회 정치적인 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대중조직이자, 각종 사회민주화와 정치투쟁의 사안마다 농민들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적인 그릇이기도 했다. 의장으로서 전농의 과제를 충실히 이행하는 과정은 권종대를 재야운동의 새로운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곧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등 기라성 같은 각 부문 운동가들이 모인 단체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고도의 긴장과 리더십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체머리를 흔들었다.
“아이구, 밤새도록 회의해도 밑도 끝도 없는 얘기, 질렸어 정말. 나도 회의라면 가농 할 때부터 많이 해 본 사람이지만도 거긴 완전히 회의 뺑뺑이야. 그런 회의가 하루 서너 개씩 있었다고.”
그러나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노수희는 이렇게 말했다.
“12시간 이상의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싸움 일보직전에 이른 상황에서도 낯 하나 안 붉히고 감정 드러내지 않으면서 회의 분위기를 살려내요. 외모는 얌전하고 선비 같아 보이지만 관중들을 휘어잡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유머 감각도 풍부하고요.”
그러나 권종대가 아무리 회의 주재의 달인이라 해도, 운동진영의 의견 대립이 심하던 그 시절에 모나지 않게 전국연합 의장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매우 고달픈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범민족대회 이후 수배가 되어, 고정된 숙소조차 없는 상태에서 풍찬노숙의 어려움을 견뎌 내고 있었다. 그의 빈소에서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던 정광훈은 넋두리처럼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회의 참 많이 했지. 의견 통일이 잘 안 되던 때였어. 그때 나도 많이 괴롭혔어. 권 의장이 간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그랬지. 틀림없이 저 사람 회의 스트레스로 병났을 거다. 운동권의 선비라 그럴까, 참 올곧은 삶이었지. 한창 지도적 역할을 할 나이에, 일찍 가 버려서 너무 아쉬워. 하지만 이건 분명해. 권 의장이 당시 각 부분 단체를 망라한 6전 대회, 7전 대회를 이끌면서, 전국연합이라는 남한 사회 변혁운동의 통일전선체를 이루려 했던 공로만은 인정해야 해.”
‘그때 나도 많이 괴롭혔어.’라고 말하는 정광훈의 얼굴에는 어쩐지 쓸쓸함이 묻어났다. 전노협도 민주노총이 되면서 떠나가고, 전교조도 교수협의회도 떠나가 버린 후, 약화일로를 걷고 있는 전국연합의 현실을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이런 그를 격려하기라도 하듯, 죽은 권종대가 말한다.
“기층조직이라 표방했던 전국연합에서 노동자가 싹 빠져나가뿔긴 했지만, 연합 조직이 십년 이상 지탱 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상당히 대단한 거요. 마오의 대장정을 생각해 보라고. 수년의 간고한 투쟁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혁명적 낙관주의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극심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절망하기 때문에 죽는 거여. 절망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거라고.”
글_김 기 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