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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민주화의 길

서울대 민주화의 길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 사람이라면 관악산을 등지고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가 있는 서울대학교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으로 수재들이 모인 곳이기에 모든 학부모와 입시생들이 선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관악산 입구에 위치해 있기에 산을 사랑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지나쳐 가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학교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고 그래서 이곳에 민주화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기야 나도 서울대에 ‘민주화의 길’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안지 2년이 넘었음에도 이제야 이곳에 처음 왔으니 남 흉 볼일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서울대학교를 가는데 서울대 입구 역에서 내리는 친구를 바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서울대입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정문에서 내리면 바보라고 한다나. 어쨌든 필자는 서울대에 볼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문에서 내렸다. 정식명칭인 ‘서울국립대학교’ 의 ㅅ, ㄱ, ㄷ 을 형상화했다는 독특한 정문은 1980년대 거리로 나가려는 학생 시위대와 이를 막으려는 경찰들 간의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1985년 5월 17일이 압권이었다. 이날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학살 원흉 처단’의 깃발을 들고 나섰다. 서울대생 1만여 명은 ‘오월제’의 마지막인 대동제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 광화문에 합류하려 했다. 당연히 경찰은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가로막았고, 학생들은 밤 10시가 넘도록 6시간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결국 교문 돌파는 성공하지 못했고, 광화문 투쟁은 학생 회관에서의 밤샘 농성으로 대신했지만, 학생들의 투쟁 의지는 정말 대단했다. 그날 교문에서 방패를 들고 돌과 화염병 세례를 받았던 어느 전경은 기억하기도 싫은 지옥 같은 날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이날 박종철 열사는 최루가루를 뒤집어 써 얼굴과 목에 수포가 생겨 농성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문을 지나 조금 가면 대운동장 뒤 쪽에 김태훈 열사의 추모비가 있다. 광주 항쟁 다음해인 1981년 5월 27일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뒤 투신 자결한 열사로서 광주 출신이기도 했다. 그 옆에는 우종원 열사와 김성수 열사의 추모비가 서있다. 우종원 열사는 민추위 사건으로 대공과의 수배를 받아오다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시신이 경부선 철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기관원이 유인해 나간 뒤 실종되었던 김성수 열사는 1986년 6월 20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되었다. 이 두 추모비는 그다지 눈에 띄는 곳에 있지 않다.

4.19기념탑이 규장각 주변에 있다고 했지만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4.19기념탑이 어디 있는지 물었더니 ‘역시’ 모른다는 대답이 나왔다. 이럴 때는 교직원에게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다. 역시 교직원은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 가도 이런 장소를 찾으려면 거의 똑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니 좀 씁쓸해 진다.

서울대 4.19기념탑은 동숭동에 캠퍼스가 있던 시절인 1961년 4월 19일에 세워졌으니 캠퍼스 건물 자체보다도 더 오래되었다. 5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어딘가 촌스러워 보인다. 기념탑 옆에는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에 쓰러진 안승준 열사의 추모비가 서 있고, 역시 같이 희생된 고순자, 김치호, 박동훈 열사의 추모비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유재신 열사와 손중근 열사를 기념하는 나신의 동상은 솔직히 지금 기준으로는 상당히 촌스러운 모습이지만 역설적으로 당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념탑과 추모비, 동상이 모여 있는 4.19동산의 관리 상태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때의 사진과 경과를 기록한 게시판 정도는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4.19동산을 떠나면서 규장각 옆에 있는 법과대학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4.19당시 내무장관으로 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직접적 책임자였던 홍진기가 생각이 났다. 법과대학 건물에는 홍진기의 호를 딴 ‘유민홀’이 있기 때문이다.
 


4.19동산을 뒤로 하고 천천히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발을 옮기면서 인문대학 옆에 위치한 박혜정 추모비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죽음은 다른 열사들의 죽음과는 달랐다. 경찰의 폭력과 최루탄이 일상화되다시피 하고, `회색분자`들에게는 민주화를 외치다가 죽어가고 감옥에 가는 학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날들이었다. `회색분자` 중 하나인 그녀는 이런 유서를 남기고 한남대교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으로 못 했던 빚갚음일 뿐이다
앞으로도 사랑할 수 없기에, 욕해주기를
모든 관계의 방기의 죄를 제발 나를 욕해주기를, 욕하고 있기를

-서울대 국문과 84학번 박혜정의 한강 투신 유서 중 일부. 1986-


박혜정 추모비에는 유일하게 열사가 아닌 박혜정 학형이라고 새겨져 있어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박혜정 추모비 위쪽에는 86년 4월 28일 신림동에서 같이 분신하여 산화한 김세진과 이재호 두 열사의 추모비가 있다. 이 두 열사의 장렬한 죽음은 학원가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비문은 고은 시인의 작품이다. 그 옆에 가장 ‘유명한’ 박종철 열사의 추모비가 있고 다른 열사와 다르게 흉상까지 만들어져 있다. 6월에 놓은 것으로 보이는 시든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 바로 뒤에 있는 최우혁 열사의 추모비, 중앙도서관 옆에 있는 민주열사 황정하, 노동해방 열사 조정식, 조국통일열사 조성만 열사의 추모비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열사들의 호칭이 다른 것만 봐도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이란 얼마나 여러 분야에서 싸워야 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의 심장인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이르렀다. 김세진, 이재호, 박종철 열사의 장례식이 열렸고 수많은 출정식이 열렸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86년 5월 20일에 일어났다.

오월제 행사가 한창인 오후 3시 30분경 문익환 목사님의 연설 중 학생회관 4층 옥상 난간에서 구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이동수 학생이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극도의 놀람과 흥분에 휩싸였다. 7m 아래로 떨어져서도 한동안 불길이 오르다가 이동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에 쏟아지는 최루탄의 매운 연기, 폭발음,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아크로폴리스를 향한 곳곳의 통로에서 색색의 헬멧을 쓴 사복 기관원들과 중무장한 전경들이 들이닥쳤다. 극도의 슬픔에 빠진 학생들은 다시 열을 지어 전경들과 싸웠고 그들은 최루탄이 매서워서가 아니라 현실이 가슴 아파 진한 눈물을 흘렸다. 열사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오후 4시쯤 운명했다.

이제 농업생명과학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유신에 항거해 할복하고 산화한 김상진 열사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산화한 이동수 열사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이동수 열사가 왜 김상진 열사와 함께 있나 의아했는데 와서 보니 원예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농대 출신 열사의 추모비는 나란히 서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곳에 있지는 않았다. 김상진 열사의 유서 즉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은 유시민 전 의원의 <항소이유서>와 함께 이 방면의 글 중 가장 백미가 아닐까 싶다.

오전 11시 30분, 순례를 마치고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많았다. 서울대생조차도 스펙을 많이 쌓아야만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까? 라는 씁쓸한 생각과 어쩌면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정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민주화의 길`은 학교 당국에서 조성한 것임에도, 표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이왕 조성한 것이면 제대로 홍보해야 하지 않나?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1960년에서 1988년까지 희생된 서울대생 출신 열사는 모두 19명. 730명이 제명되었고 그 대부분이 구속되었다. 무기정학을 받은 학생은 681명, 유기정학 496명, 근신 886명, 경고 1,579명, 지도휴학 206명 징계자의 총수는 4,578명에 달한다. 민주주의는 정말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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