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명동일대
1987년 명동 일대
글 한종수
[국민운동본부의 항쟁 종료선언 이후 명동성당으로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되고 북악산 아래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건축되고, 출사한 선비들이 두 궁전 사이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지금의 북촌이 형성되었다. 대신 벼슬이 없거나 출사를 준비하고 있는 선비들은 남산 아래쪽에 모여 살았다. 이들을 남산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물론 북촌이라고 전부 벼슬아치들이 산 것도 아니고 남촌이라고 전부 재야인사들만 산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구도는 그러했다. 이런 구도는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북촌과 종로를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려웠기에 남산 아래쪽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적 중심은 여전히 광화문 일대에 두었지만 경제적 중심을 남산 아래 자락에 두는 전략을 선택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조선은행 건물(현 한국은행), 옛 미스코시 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 제일은행 본점, 지금은 두 번이나 건물이 바뀌었지만 당시로는 통신의 거점인 중앙우체국도 이곳에 지어 경제적 중심으로 조성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회현동 지하도는 그 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도이다.
아무리 명동 일대에 멋진 고층 건물이 많다지만 명동의 상징은 누가 뭐라 해도 명동성당이다. 가톨릭은 순교지나 성자들의 연고지에 성당을 짓는 전통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한국 가톨릭의 첫 번째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이외의 모든 학문은 사학(邪學)이라고 간주되던 시절, 천주교를 믿는 것은 유신시대에 사회주의를 신봉한다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이런 기가 남아있는 땅이기에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된 계기는 유신독재가 한창이던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3·1절 57주년 기념 미사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약하는 유신헌정 질서에 반대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민주구국선언사건부터 시작된다.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매일 저녁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교실이나 군사독재를 규탄하는 성토장이었다.
[명동성당 문화회관을 나와 명동성당 입구 집회장으로 내려오는 단식농성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
이렇게 명동성당에 모인 시위대는 "투쟁열기를 명동으로 한정 지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 국민과 함께할 방법을 찾자"는 즉각 해산론과 "6·10국민대회의 열기를 지속하기 위해 투쟁본부로서 명동성당을 거점화해야한다"는 계속 투쟁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에 임시집행부는 격렬한 내부 논의를 거쳐 농성 해산이든 지속투쟁이든 일단 6월 12일 정오까지는 농성을 계속한다는 데에 잠정 합의했다. 이렇게 우연치 않게 명동성당에 모이게 된 농성시위대는 자연스럽게 의도하지 않은 철야농성을 감행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명동 성당이 그 위대한 6·10민주항쟁의 서막이 전개될 역사의 현장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6·10대회 다음날부터 신문은 “명동성당 1,000여 명 이틀째 시위”(동아일보 1987. 6. 11) 등처럼 명동성당 농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명동성당은 6·10대회의 열기가 식지 않고 더 뜨거워지는 중심지가 되었다. 시민들은 담벼락 위로, 혹은 계성여고를 통해 수많은 음식물과 속옷, 현금을 시위대에 전달하였다. 5월 광주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서울 한복판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후에도 명동성당은 억울한 이들이 모여 호소하는 곳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IMF 경제위기 시절, 금융노련을 비롯한 수많은 실직 노동자들이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했던 장소도 바로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 바로 밑에 있는 가톨릭회관 역시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가진 건물이다. 이 건물은 성모병원이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에 쓰던 건물이었는데,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이며 1987년 6월 항쟁 때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 축소 은폐 사건’을 폭로한 사제단의 사무실이 입주한 곳이기도 하다.
김종필, 최규하 등 유신세력 퇴진, 공화당 유정회 통대의 해산, 외세개입 거부 등을 선언하는 집회장을 뒤늦게 덮친 계엄사는 현장에서 96명을 체포했다. 한편 집회장을 빠져나간 참가자들은 유신 철폐와 거국내각 구성을 외치며 인근 코스모스백화점에서 대기 중이던 민청협의 양관수, 이상익 등과 합류해 무교동까지 진출해 시위를 벌이다가 또 44명이 연행되었다. 계엄사가 이 사건으로 연행한 연행자 140명을 12월 27일까지 한 달 간 불법 감금한 상태에서 저지른 고문과 폭력 등 만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검은 연기로 뒤덮힌 한국은행 앞 거리]
6월민주항쟁 당시 가장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명동 옆 한국은행 앞 분수대주변 이었다. 그 중에서 6월 18일, 시위대에 완전히 포위된 전투경찰 300여 명이 무장을 해제당하고, 분수대에 들어가 “민주주의 만세”를 외친 일화는 유명하다. 하기야 5월부터 계속된 시위에 전투경찰들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6월 더위에 방독면까지 써야 했으니 더위에 시달리느니 분수대에 들어가 열을 식히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절정은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민주항쟁이다. 소위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이런 시위가 일어나면 약탈행위는 거의 당연할 정도로 벌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기붕 같은 부정축재자의 집을 공격하거나 경찰서, 집권당의 사무실 같은 권력기관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의 가게가 공격을 당한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시위대에게 음료수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가게 안에 학생들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이런 ‘전통’은 우리 민주주의의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명동 일대의 화려한 상가는 이런 우리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증인들이기도 하다.